80화. 재판2022.01.04.
연회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충격 어린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며 연회장이 술렁였다.
“긴급 재판?”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리오넬은 반사적으로 황후를 돌아보았다. 늘 담담하던 그녀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리오넬은 이를 갈며 재판관을 향해 일갈했다.
“재판이라니?! 어떠한 예고도 없이, 지금 말인가?!”
재판관은 크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의 명예를 고려하여 비공식 재판으로 진행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울리히 황가 내부의 재판이자, 긴급 재판이기에 별도의 고지 없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때, 엘리자베타가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재판관 앞에 나섰다.
“그래서 국경일인 오늘, 그것도 연회 자리에서 재판을 청구한단 말인가? 그것참 듣도 보도 못한 일이로군!!”
“……그랜드 공작 전하께도 증인 자격으로 소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발드르 공가 쪽 귀족들이 곧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재판을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이자, 재판관들은 진땀을 흘렸다. 그때,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하던 황후가 리오넬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소란하던 연회장이 다시금 침묵에 휩싸인 가운데, 재판관에게 다가간 황후가 그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재판이라면, 내게 죄를 묻겠다는 뜻이구나.”
“…….”
황후의 기세에 짓눌린 재판관이 차마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거절한 것은 그대요.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것 또한.’
황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아델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어려웠으나 더 물러날 곳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재판?
“그래, 가 보자. 안내해라.”
그 목소리가 어찌나 차분한지, 더불어 그녀의 태도가 어찌나 여상한지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빡였다.
“무엇 하느냐. 앞장서래도.”
황후의 담담한 재촉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재판관들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리오넬은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주위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분이 무얼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 아직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 가느다란 어깨에 올려 둔 짐이 너무 무거워서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데. 그녀는 홀로 이고 가다가 그 무게에 짓눌려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나눠 들지 않을 사람이었다. 죽을 것 같아서 고국에 둔 사람들을 불러 달라고 했다가도, 그럴 수는 없다고 마음 돌린 사람이었다.
“모시겠습니다.”
리오넬은 그런 황후의 곁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마저도 원치 않았던 듯했다. 시종이 나타나 커다란 목소리로 귀족들을 향해 외쳤다.
“황가 내부의 긴급 재판으로 오늘 연회를 파한다고 하셨습니다! 더불어 퇴궁령이 내려졌으니, 모두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에 아델은 리오넬의 팔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러고는 걱정 말라는 듯 싱긋 웃어 준 뒤 몸을 돌렸다.
“내가 함께 가니 너무 걱정 말고 일단 돌아가게.”
엘리자베타가 리오넬을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리오넬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용암이 끓어 솟구치는 것처럼 온몸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머리를 차분하게 식히려 애쓰며 생각했다. 지금은 분노에 눈이 멀어 뜨겁게 타오를 때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황후를 지키기 위해 냉정해져야 했다. 도대체 무슨 재판일까. 황후에게 어떤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일까? 죄?! 죄라니?! 리오넬은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세게 움켜쥐었다.
‘죄라면 그분이 아닌 황제에게 물어야지! 황제로서 어떠한 본분도 다하지 않는 그자를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리오넬은 순간적으로 뇌리를 관통한 생각에 두 눈을 치떴다. 시종들과 병사들이 연회장을 둘러싸고 퇴궁하라며 압박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이, 테세우스가 리오넬 곁으로 다가왔다. 동생의 분노가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였다. 테세우스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리오넬이 입을 열었다.
“형님, 귀족들을 모으십시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선득한지 테세우스는 리오넬의 등을 다독이려던 손을 내리고 말았다.
“추가 기울어지기 전에 무엇이든 해 보려 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가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리오넬은 그 말을 남긴 채 연회장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 * * 한편, 황후궁에도 재판관들이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시녀들은 긱스 부인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재판관이 왔다고?”
“예, 부인을 찾고 있습니다.”
황후가 돌아오기 전인지라 그녀는 여전히 깔끔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긱스 부인은 꼿꼿한 자세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꽤 늦은 시각에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노부인의 모습에 재판관들마저 기가 질렸다.
“무슨 일입니까, 이 늦은 시각에.”
고압적인 음성이 재판관들의 귓가에 꽂혔다. 관록의 노부인이 뿜어내는 기운에 재판관들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골랐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에 대한 재판을 청구하셨습니다. 황궁법에 의거하여 치러지는 재판에 한나 긱스 백작 부인을 증인 자격으로 소환하셨으니, 지금 함께 가시지요.”
긱스 부인은 재판관의 말에 두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황후 폐하에 대해 재판을 청구하셨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황후 폐하의 명예를 위해 비공식으로 진행하시겠다 하셨기에,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가시지요.”
긱스 부인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으나, 그럴수록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웃옷을 입고 나올 테니.”
긱스 부인은 떨리는 손을 치맛자락에 감추며 서둘러 웃옷을 입고 나왔다. 재판관들을 따라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는 노부인의 눈동자가 황후에 대한 걱정으로 떨렸다. * * * 에흐몬트의 모든 국민은 국법에 의거하여 재판을 받지만, 울리히 황가는 예외였다. 울리히 황가의 구성원, 즉 황족은 황궁법에 의거하여 재판을 받게 되며, 이때엔 황궁 내부에 마련된 재판장에서 재판이 진행된다. 아델은 육중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검은 문이 천천히 입을 벌리기 시작하자, 지옥문이 열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때, 엘리자베타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별일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델은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웃었다. 찰나 같은 순간이 지나고, 이윽고 거대한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아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높은 상석에 앉은 재판관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오른편에 마련된 황좌에 앉아 있던 황제와 아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 * 한편, 레녹스는 불안하여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디안을 닦달했다.
“황제께서 너에 대한 모든 애정이 식은 것 같더구나! 어찌 너를 단 한 번도 살피지를 않으시냔 말이다!”
“…….”
“이러다가 네가 아이를 낳고 나면, 아이만 쏙 데려가시고 너는 궁 밖으로 내쳐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
디안은 레녹스의 목을 확 비틀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귀족들의 시선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렇게 직접 속을 뒤집지는 않으니까. 그 와중에도 레녹스는 계속 입을 놀렸다.
“그리고 말이야. 왜 아직도 의원들이 명확하게 네 임신을 발표하지 않는 거냐? 어? 생각해 봐라, 디안. 고작 의원 나부랭이가 왜 자꾸 네 임신 발표를 뒤로 미루는지.”
“……제발 입 좀 닥쳐.”
“혹시 말이야…… 황제께서 발표를 미루라고 하시는 것 아니야?”
디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일렁이는 등불에 움푹 파인 볼과 눈이 깊은 그늘을 만들어 냈다. 레녹스는 해골 같은 그녀의 몰골에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너, 지금 몰골이 엉망이다. 뭘 먹든, 좀 어떻게 해 봐.”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내가 뭘?”
“너한테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거야?”
디안은 온 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레녹스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옆방으로 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문에 기대어 미끄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아 어둠에 몸을 묻었다. 끈적한 물음이 귓가에 달라붙었다.
“……황제께서 미루라고 하셨을까? 내 임신 발표를? ……왜?”
디안의 눈이 황망히 떨렸다. 몇 달 전이었다면 오만하게 웃으며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을 의문이지만, 지금의 디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기억의 톱니바퀴가 천천히 맞물려 돌아가며,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임신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날, 황제의 표정은 어떠했나? 오싹하게 소름 돋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지. 그 표정을 떠올린 순간, 디안은 깜짝 놀란 눈으로 제 배를 바라보았다.
“어…….”
갑자기 배가 아팠다. 쿡쿡 찌르는 것도, 얹힌 듯 답답한 것 아닌, 아랫배가 차가워지는 것처럼 살살 아파 오는 통증.
“아, 아니야…….”
차라리 몰랐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디안이 익히 알던 통증이었다. 어둠 속에 묻힌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차디찬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카를 울리히의 냉정한 얼굴이 환영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리자, 디안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비명 같은 단말마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럴 리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