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모든 것을 인정하네2022.01.08.
“황후! 자리에 앉으십시오!”
상석에 앉은 데스포네 공작이 호통을 치듯 말했지만, 아델은 미동도 없이 재판장 가운데에 마련된 의자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재판받는 자는 가장 낮은 곳에, 재판을 참관하는 황족들과 재판관은 훨씬 높은 곳에 앉게끔 되어 있어서 제아무리 고귀한 신분의 황족도 재판장에 오는 순간 두려움에 주눅 들거나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오히려 형형한 시선으로 재판관들을 바라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죄인이 아니네.”
“…….”
“하니, 죄인의 자리에는 앉지 않겠다.”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에 오히려 재판관들이 움찔할 지경이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크게 코웃음을 치며 지팡이로 바닥을 쾅 내리쳤다.
“내가 아주 참담한 말을 들었습니다! 울리히 황가의 원로로서 당장 긴급 재판을 열자고 주장한 것도 바로 나지요! 결코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셨더군요!!”
“데스포네 공, 어찌 되었건 황후 폐하이십니다. 언성을 낮추시지요!”
엘리자베타가 일갈하자 데스포네 공작은 거친 콧김을 팍팍 뿜어 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것도 반드시 치워 버리리라!’
그때, 지금껏 침묵하며 아델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예, 폐하.”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석 재판관이 크게 목을 가다듬으며 재판을 시작했다.
“오늘 재판은 카를 울리히 에흐몬트 황제 폐하에 의해 청구된 재판입니다. 아델라이드 울리히 에흐몬트 황후 폐하의 소추 사유는 결혼 의무 불이행입니다.”
재판관의 말이 귓가에 내리꽂히자 아델은 긴 숨을 내쉬며 치맛자락에 숨겨진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재판관의 말은 더 이어졌다.
“하여 오늘 재판에서는 두 분의 결혼식을 주관했던 대신관이 참석할 것입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뒤편의 문이 열리며 하얀 성복을 입은 대신관이 걸어 들어왔다. 대신관이 마련된 자리에 앉자, 숨죽이고 있던 엘리자베타가 말했다.
“황후께서는 에흐몬트 백성들의 삶을 염려하시어 뷔에타의 탑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국경일을 맞아 빈민들의 삶까지 챙기셨습니다. 한데 의무 불이행이라니요! 누구보다 황후로서 모범을 보이고 계신 분이십니다!”
“어허! 그게 어찌 황후로서의 본분인가?! 뷔에타의 탑은 마법사들이 없애면 될 일이고, 빈민들의 삶도 황제 폐하께서 챙기시면 될 일! 황후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지!!”
쩌렁쩌렁하게 재판장을 울리는 데스포네 공작의 말에, 아델은 비로소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더 무거워져서 이대로 땅속으로 파묻힐 것만 같았다. 재판관은 데스포네 공작이 또 고성을 지르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황후 폐하께서는 ‘초야 거부’를 사유로 이 자리에 서 계신 겁니다.”
재판관의 말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머리 위로 쏟아진 차디찬 정적에 아델의 온몸도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손끝이 어찌나 차가운지, 마치 맨몸으로 엄동설한에 내팽개쳐진 것만 같았다. 상석에 앉아 있던 황제는 그런 아델의 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자, 어때 아델라이드. 너를 지옥에 처박을 수 있는 사람도 나고, 그 지옥에서 빼낼 수 있는 사람도 오직 나뿐이야. 그러니 내게로 완전히 무너져라.’
재판관은 서류를 넘겨보더니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곁에서 보필했던 한나 긱스 백작 부인을 증인으로 소환하셨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대신관이 들어왔던 뒷문이 다시 열리며 긱스 부인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어둡고 권위적인 재판장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황후를 보자 긱스 부인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던 평소와는 달리 그녀는 벌겋게 물든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증인석에 섰다. 재판관은 사무적인 어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한나 긱스 백작 부인.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의 초야 요구를 거부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날 황제 폐하께서 초야 요구를 하시기 전, 두 분은 크게 다투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누가 초야를 치를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결혼식 당일 초야를 거부한 것은 다름 아닌 황제 폐하셨습니다.”
긱스 부인은 떨리는 숨을 크게 가다듬으며 두 눈을 부릅뜬 채, 목숨을 내놓은 사람처럼 강력하게 황제를 비난했다.
“묻는 말에만 제대로 답하시오.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의 초야 요구를 거부하신 것이 맞습니까?”
긱스 부인이 쉽사리 답하지 않자 데스포네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삿대질을 했다.
“엄정한 재판이네!! 당장 묻는 말에 답하지 못하겠나?!!”
재판장의 소음이 아델의 귓가를 차례로 때리고 지나갔다. 아델은 그 모든 일에서 한 발 떨어져 나온 사람처럼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삶은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녀를 이끌어, 결국 이런 자리에까지 서게 되었다. 형형히 빛나던 금빛 눈동자가 긱스 부인을 보며 한 번 흐려지고, 재판관을 보며 또 한 번 흐려지다가, 황제를 본 뒤 혼탁해졌다. 아델은 눈을 감았다. 소란한 목소리들이 멀어지며, 깊은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졌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결국 그녀의 위로 쏟아졌다. 바닥에 처박힌 영혼이 간신히 숨을 헐떡였다. 뷔에타의 탑도, 썩어 가는 집을 전전하던 빈민들도, 죽어 가던 사람들도, 그들을 구하고 싶던 그녀의 마음도, 모두 버겁게만 느껴졌다. 아, 지친다. ……그만하고 싶어.
‘아델!!’
그 와중에도 환청처럼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리니, 나는 정녕 미쳐 가는 것일까. 아델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때, 긱스 부인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것이 어찌 황후 폐하만의 잘못이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눈을 뜨니 흐트러진 모습의 긱스 부인이 보였다. 그녀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아델이 그녀를 제지했다.
“황후 폐……,”
“긱스 부인.”
꽉 잠긴 목소리가 들려오자 긱스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황후를 바라보았다. 지친 듯한 황후의 얼굴에 긱스 부인은 결국 눈물을 쏟았다.
“됐소. 인제 그만하시오.”
“황후 폐하…….”
카를은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됐다. 힘이 빠졌다. 기어코 날개가 꺾인 것이다. 이제 폐위를 선언하여 그녀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다음, 손을 내밀 일만 남았다.
‘그래, 아델라이드. 자존심 한 올까지 모두 버려라. 그리고 내 품에 기대는 거다,’
황제가 득의양양하게 미소 짓는 그 순간, 아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카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텅 비어 공허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것도, 절망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아델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떨어졌다.
“모든 것을 인정하네. 나는, 도저히 황제와 초야를 치를 수가 없었다.”
재판관은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소추 사유를 인정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황후는 아주 가볍게 답했다.
“인정하네.”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자, 그러니 그에 대한 나의 처분을 말하게.”
데스포네 공작은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크게 외쳤다.
“폐위지요!!”
폐위라는 단어가 쩌렁쩌렁하게 재판장에 울려 퍼지자, 엘리자베타는 주먹으로 탁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관!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도 대신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초야는 궁법에 적시된 황후의 의무이기에, 어떤 이유에서건 지켜져야 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의무 불이행을 직접 인정하셨기에, 폐위되실 수 있습니다.”
데스포네 공작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자베타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때, 음산한 웃음이 넓은 재판장의 벽면을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황후였다.
‘폐위, 폐위라.’
속에서 끓어나오는 듯한 웃음이 계속 터져 나오는 듯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재판관들이 침을 꿀꺽 삼킬 무렵,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그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려 한다면 기회를 줄 것이오!!”
“무슨 개소……!!”
버럭 고함을 지르던 데스포네 공작이 혀를 씹으며 뒷목을 잡는 사이, 황제가 다시 한번 외쳤다.
“그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황후로서의 본분을 다하겠다, 내게 약조하란 말이야!!”
한참을 웃던 아델이 웃음을 갈무리하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담담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안 해.”
“……뭐?”
“안 한다고.”
카를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등골이 서늘해진 그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 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아델은 재판관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판관, 뭐 하는가? 나에 대한 처분을 확정 짓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내버린 듯한 공허한 얼굴로, 아델라이드는 스스로 황후 자리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