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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분노하는 귀족들 (82/127)

82화. 분노하는 귀족들2022.01.11.

발드르 공작의 부름에 퇴궁하던 수많은 귀족 가문 수장들이 공가로 모여들었다. 공가 지하 비밀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부름을 받은 수장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테세우스는 오른편에 앉은 리오넬을 빤히 쳐다보았다. 회의를 소집한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어두운 지하를 밝히는 등불이 흔들리며 리오넬의 얼굴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맞은편에 앉은 몇몇 귀족들이 새삼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에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생각을 끝낸 모양인지 리오넬이 테세우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16553300445363.jpg“‘그 일’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이라 함은 데스포네 공작의 계획을 일컫는 것일 터. 테세우스가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난 리오넬이 한쪽에서 커다란 지도를 가져와 귀족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정중앙에 펼쳤다. 지도에는 수많은 지점에 몇 가지 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 의아해하던 귀족들도 이내 표시의 정체를 깨달았다.

16553300445368.jpg“……이거, 탑을 표시해 둔 것이로군요.”

의자에 앉아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16553300445368.jpg“이 검은 점은 현재 탑이 위치한 곳인 것 같습니다. 파란 점은 탑이 내려왔으나 파괴된 곳이고요. 여기, 뷔에타에도 파란 점이 표시되어 있군요!”

16553300445368.jpg“그럼 이 붉은 점은 뭡니까?”

귀족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을 해 보았으나,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오넬이 입을 열었다.

16553300445363.jpg“최종적으로 탑이 세워지길 바라고 있는 곳입니다.”

주어가 빠져 있었으나, 귀족들 모두 어렵지 않게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들은 멍하니 리오넬을 바라보다가 세게 입술을 짓씹으며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침묵하며 지난 14년과 다가올 미래가 모두 담긴 지도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들의 분노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16553300445368.jpg“이곳에 탑이 세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꽉 잠긴 목소리로 누군가 묻자, 리오넬이 들고 있던 불씨를 던져 넣었다.

16553300445363.jpg“제국 전역이 탑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법사들은 어디에서든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겠지만, 마수 역시 제국 전역을 활보할 수 있게 되겠지요.”

이미 뜨거울 대로 뜨거워진 귀족들의 분노가 거세게 폭발했다. 누군가가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16553300445368.jpg“그게 말이나 될 소리입니까?!!”

16553300445368.jpg“도대체 누굴 위한 나라가 되는 겁니까!!”

리오넬은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16553300445363.jpg“이 모든 자료는, 황후 폐하께서 알려 주신 겁니다.”

16553300445368.jpg“그래서, 황후 폐하께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로군요.”

16553300445368.jpg“지금 당장 궁으로 갑시다!!”

16553300445363.jpg“잠깐. 비공식 재판인 만큼, 우리는 황후 폐하께 어떤 어려움이 처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일단은 상황을 주시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귀족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리오넬은 눈을 빛내며 냉철하고 차분하게 지금의 상황과 앞으로 대비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늘 테세우스의 뒤에 서서 보좌하기만 했던 예전과는 다른,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16553300445363.jpg“우선 황후 폐하께서 이를 뒷받침해 줄 증거 자료를 준비해 주겠다고 하셨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중신 회의에 정식 안건을 넣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비공식 재판은 황후 폐하의 중신 회의 참석을 막기 위해서일 테니, 황후 폐하께서 참석하지 못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겠지요.”

리오넬이 말을 마치자 지금껏 침묵하던 테세우스가 일어났다.

1655330046891.jpg“이 지도에 관한 것은, 기습적으로 터트릴 예정이니 모두 함구하시오.”

16553300468918.jpg“알겠습니다.”

1655330046891.jpg“데스포네 공작과 황제 폐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안 이상, 에흐몬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는 침묵할 수 없소. 모두 돌아가 부름을 기다리시오.”

잠시 후, 귀족들이 빠져나가고 비밀 회의실에 테세우스와 리오넬만이 남았다. 테세우스는 리오넬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음을 눈치챘다.

1655330046891.jpg“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리오넬.”

그럼에도 리오넬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리오넬이 불쑥 입을 열었다.

16553300445363.jpg“현 황위 계승서열 1위가, 그랜드 공작 전하이시지요.”

1655330046891.jpg“…….”

앞뒤 맥락 없는 간결한 말이었으나, 그 무게는 엄청난 것이었다. 테세우스와 리오넬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깨질 듯 위태로운 침묵이 형제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똑똑똑. 살얼음 같은 침묵이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깨졌다. 형제는 일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리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3300445363.jpg“들어오게.”

테세우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집사였다.

16553300445363.jpg“무슨 일인가?”

리오넬이 한 걸음 다가서며 묻자, 집사가 낭패한 얼굴로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16553300445363.jpg“집사!”

리오넬의 다급한 재촉에 집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3300445368.jpg“황후 폐하께서 폐위되셨다고 합니다.”

  * * * 데스포네 공작은 신이 나서 이곳저곳에 소문을 퍼트렸다. 그 소식을 들은 로레인은 부리나케 디안에게 달려갔다. 최근 디안의 상태가 나날이 피폐해지는 데다가 황제의 총애마저 사라진 듯해서, 적당한 시기에 퇴궁을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갑작스레 들려온 황후의 폐위 소식에 로레인은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고쳐먹었다. 황후가 폐위되었으니, 차기 황후는 자연스레 후계를 임신한 디안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로레인은 디안의 침실 앞에서 숨을 고른 뒤 똑똑 문을 두드렸다.

16553300445368.jpg“궁주님, 저 로레인이예요.”

16553300493504.jpg“…….”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16553300445368.jpg“궁주님? 주무세요?”

로레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번 문 두드리려 할 때였다. 안에서 벌컥 문이 열리더니 창백한 낯의 디안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16553300445368.jpg“구, 궁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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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레인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불쑥 밖으로 내민 얼굴이 귀신처럼 퀭하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디안이 다급하게 말했다.

16553300493504.jpg“지금 궁 밖으로 사람을 보내서 산파를 데려와!”

16553300445368.jpg“예? 산파요?”

16553300493504.jpg“평민들을 돌보는 산파는 임산부의 몸도 볼 줄 안다고 들었어. 가서, 오랜 경력의 산파를 몰래 데려와. 지금 당장!”

16553300445368.jpg“아…… 궁주님, 지금 퇴궁령이 내려져서 누구도 궁으로 들어오지 못해요.”

그녀의 말에 디안은 발작하듯 반응했다.

16553300493504.jpg“퇴궁령이야 귀족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시종들은 밖을 드나들 것 아니야? 한시가 급하니까 지금 빨리!”

디안의 서슬 퍼런 명령에 로레인은 당황한 듯 입을 깨물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리려다 말고 전해야 할 말이 생각난 듯 디안에게 한 걸음 다가가 속삭였다.

16553300445368.jpg“황후 폐하께서 폐위되셨다고 해요.”

로레인은 슬쩍 디안의 표정을 살폈지만, 이 기쁜 소식을 들었음에도 이상하게도 관심이 없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 말을 못 알아들은 사람 같기도 했다. 디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초조한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로레인은 당황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6553300445368.jpg“……왜 그러시지?”

한편,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온 디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덜덜 떨었다. 황후가 폐위되었다는 엄청난 소식을 들었으나, 지금 제 눈앞에 닥친 현실이 훨씬 가혹하여 신경조차 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벽난로로 달려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시뻘건 불이 하얀 천을 한입에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래도 빨리 불이 붙지 않자, 불안해진 디안은 불쏘시개로 천을 불 속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잘 접혀 있던 천이 흐트러지며 그녀가 애써 감추려 했던 흔적이 드러났다. 새하얀 천에는 검붉은 것이 묻어 있었다. 디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천을 불길의 아가리 속으로 더 밀어 넣었다.

16553300493504.jpg“빨리 타 버려, 빨리…….”

잠시 후, 천은 불길에 휩싸여 녹아들듯 사그라들었지만, 디안의 마음속에 옮겨붙은 불안의 불씨는 더 커져만 갔다. 그녀를 온통 활활 태워 버리려는 듯. * * * 한편, 고트로프로 향할 사신단이 빠르게 꾸려졌다. 카를은 고트로프 황제에게 보낼 긴 편지를 직접 작성했다. 편지에 아델라이드 황후의 폐위 사유 및 관련 내용을 적은 뒤, 펜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마지막으로 하단에 직인을 찍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데스포네 공작이 웃음을 감추며 침통한 척 입을 열었다.

165533005167.jpg“제국의 황후가 이런 사유로 폐위되다니. 역사에 남을 일이로군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사신단은 황제의 편지를 들고 빠르게 물러갔고,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가뿐해진 데스포네 공작도 친히 그들을 황궁 앞까지 배웅하겠다며 함께 나갔다. 창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카를에게 일전 황후의 뒷조사를 해 왔던 비밀요원이 다가왔다.

16553300445368.jpg“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황제가 빠르게 말했다.

16553300516708.jpg“사신단과 함께 배를 탄 다음, 고트로프에 도착하기 전에 저들을 죽여라. 넓은 바다 위이니 증거 인멸도 쉽겠지.”

16553300445368.jpg“……예?”

생각지도 못한 명령에 비밀요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황제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어두운 빛으로 번뜩이는지, 비밀요원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제가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덧붙였다.

16553300516708.jpg“내가 원하는 것은, 황후의 폐위 소식이 고트로프에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16553300445368.jpg“…….”

비밀요원은 도대체 황제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어서 침묵했다. 재판을 청구하여 황후를 폐위시켜 놓고, 고트로프에서 이 일을 모르게 하라니?!

16553300445368.jpg“그러나 폐하, 폐위 소식은 어떻게든 고트로프의 귀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덮어 두었다간 자칫, 큰 문제가 생길 텐데…….”

16553300516708.jpg“그것까진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 저 사신단이나 없애. 알겠느냐?”

비밀요원이 선뜻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카를은 사나운 얼굴로 다가가 그의 멱살을 와락 잡았다.

16553300516708.jpg“왜, 못 하겠느냐?!”

얼굴을 들이밀며 으르렁대는 황제 앞에 비밀요원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16553300445368.jpg“아닙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오겠습니다, 폐하.”

16553300516708.jpg“절대 들키지 말고, 제대로 처리하고 와야 한다.”

16553300445368.jpg“예!”

황제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난 뒤에야 털어 내듯 그를 놓아주었다. 비밀요원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카를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황후궁의 지붕이 보였다. 마음이 자꾸만 거칠게 요동쳤다. 주먹 쥔 손은 땀으로 흥건했고, 등도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카를은 이를 세게 악물며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16553300516708.jpg‘안 한다고.’

공허한 얼굴로 그의 제안을 거절하던 아델의 얼굴을 떠올리자 미칠 것만 같았다. 이상했다. 분명 아델을 나락으로 밀어 넣고자 한 일인데, 나락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어째서 그녀가 아닌 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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