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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사랑해 (83/127)

83화. 사랑해2022.01.15.

황후에 대한 처분은 금방 내려졌다. ‘초야 거부’라는 은밀한 사유와 더불어 황후가 직접 그것을 인정한 터라 금방 결과가 나온 것이다. 황후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않았으므로, 에흐몬트에서의 모든 직위가 박탈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죄인의 신분이 된 것은 아니었다. 재판관은 타국의 황녀에 대한 예우로, 고트로프에서 사람들이 올 동안 그녀가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던 황후궁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다만, 대우는 귀빈에 준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델은 어둠 속을 걸었다. 누군가의 시선도,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걷고, 또 걸었다. 귓가가 먹먹한 것이 꼭 물속에 잠긴 것만 같았다. 온몸이 매 맞은 듯 아프고 나른했다. 커다란 풍선이 가슴 속에 든 듯 가슴이 답답하여 숨 쉴 공간조차 없는 것 같았다.

16553300625574.jpg“하아…….”

아델은 길고 긴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래도 가슴이 답답해서 다시 한번 숨을 들이켰다 내쉬어 보았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몇 번이나 다시 숨을 내쉬는 동안, 어느새 황후궁에 다다랐다. 새카만 어둠 속에 몸을 묻은 황후궁은 주인을 잃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을씨년스러웠다. 긱스 부인이 서둘러 문을 열고 아델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묵묵히 아델의 곁을 지키며, 얼른 침실의 불을 밝히고 따뜻한 물을 끓였다.

16553300625581.jpg“황후 폐…….”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호칭에 긱스 부인은 침음을 삼킨 뒤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몸을 돌려 아델을 바라보았다.

16553300625574.jpg“…….”

아델은 멍하니 선 채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긱스 부인은 크게 숨을 가다듬은 다음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16553300625581.jpg“간편한 옷을 드릴 테니 갈아입으시고 침대에 누워 좀 쉬십시오.”

아델은 제 손을 잡은 긱스 부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긱스 부인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고, 눈빛도 차분했다. 그녀의 고요가 새삼 고마워서, 아델은 시린 설원 같은 노부인의 눈동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델의 담담한 시선에 노부인의 눈가가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16553300625574.jpg“……울지 마시오, 부인.”

16553300625581.jpg“…….”

노부인은 벌게진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16553300625581.jpg“왜 이렇게 서 계십니까…….”

아델은 그녀에게 안긴 채로 눈을 깜빡이다가 툭, 털어놓듯 말했다.

16553300625574.jpg“도저히 어디에 앉아 있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 넓은 공간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으니, 도저히 어디에 앉아야 할지를 모르겠소. 긱스 부인은 아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의 가슴이 이렇게 미어지는데, 아델은 오죽할 것인가? 아델은 노부인을 밀어내지 않고 담담한 위로를 받아들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제야 아델에게서 몸을 뗀 긱스 부인이 서둘러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엘리자베타가 서 있었다. 긱스 부인은 두 사람을 위해 조용히 방을 나갔다. 우두커니 방 가운데 서 있는 아델을 보자 엘리자베타는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수백 장에 달하던 고트로프에서의 행적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타는 성큼성큼 아델에게 다가가 그녀의 앞에 섰다.

16553300625574.jpg“……그랜드 공.”

꽉 잠긴 목소리에 엘리자베타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물었다.

16553300625619.jpg“부인하지 그러셨습니까.”

16553300625574.jpg“…….”

16553300625619.jpg“부인하여 어떻게든 재판을 뒤로 미루었더라면, 또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왜 그냥 그렇게…….”

아델은 믿을 수 없게도 웃었다. 초탈한 듯한 미소에 엘리자베타는 할 말을 잃어버렸고, 아델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16553300625574.jpg“더는 하고 싶지 않았소. 미안하오.”

엘리자베타는 아델의 사과에 목이 메었다. 아델은 금고에서 두툼한 서류 한 부를 꺼내 왔다. 그리고 그것을 엘리자베타의 품에 안겨 주며 말을 이었다.

16553300625574.jpg“내일 오전에 주겠다 했던 서류요. 일전 말씀드렸던 건에 대해 증거가 될 거요. 출처에 대해서는 부디 함구해 주었으면 좋겠소. 알게 되면, 데스포네 공작이 내부 고발자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

서류를 쥔 엘리자베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눈앞의 황후는 오랜 친우도 아니고, 주군은 더더욱이나 아니다. 한데, 엘리자베타는 마치 제 일인 것처럼 가슴이 뜯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손에 쥔 서류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아델라이드라는 여자의 존재가 더 크게 다가왔다. 엘리자베타는 아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간신히 물었다.

16553300625619.jpg“무엇이 더 하고 싶지 않았단 말입니까?”

아델은 일렁이는 엘리자베타의 자색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속삭이듯 답했다.

16553300625574.jpg“하도 무거워서 말이오……. 어찌나 무겁던지, 인제 그만 내려놓고 싶었소.”

선문답처럼 느껴지는 답이었으나, 황녀 엘리자베타는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다.

16553300625619.jpg“그토록 조국에 헌신해 놓고, 왜 유배 같은 혼삿길을 선뜻 나섰던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16553300625574.jpg“…….”

엘리자베타의 물음에 아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답했다.

16553300625574.jpg“그게 내 마지막 헌신이었소. 더불어 사죄였지.”

그 끝에 그녀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헌신이었나? 엘리자베타는 결국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16553300625619.jpg“당신은…… 당신을 위해 살아 본 적이, 삶의 어느 한 자락에라도 있는 겁니까?”

16553300625574.jpg“…….”

한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저 자신이라 말했던 아델라이드는, 엘리자베타의 물음에 끝내 답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저를 대신하여 울어 주는 엘리자베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 * 엘리자베타가 돌아간 뒤, 아델은 화려한 드레스를 벗고 간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밤은 깊어 가는데, 그녀는 침대에 누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16553300625581.jpg“좀 쉬시지요.”

아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16553300625574.jpg“내 걱정은 말고 부인이나 가서 좀 쉬시오.”

16553300625581.jpg“……고트로프로 사신이 떠났다고 합니다.”

16553300625574.jpg“…….”

그녀의 말에 아델의 마음이 물에 빠진 돌처럼 깊이 가라앉았다. 아델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두고 온 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뒤를 이어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루시오, ……어머니. 폐후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간다, 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한기가 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가 불쑥 들어왔다. 그 무례에 화가 난 긱스 부인이 쌍심지를 켜며 시녀를 노려보는데, 시녀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긱스 부인에게 다급히 말했다.

16553300667929.jpg“지금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16553300625581.jpg“황제 폐하?”

그 말에 아델도 번쩍 눈을 떴다. 긱스 부인과 아델이 시녀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거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시녀가 겁을 먹고 옆으로 물러나는 사이, 긱스 부인은 어금니를 세게 물며 아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황제가 사나운 얼굴로 부인을 노려보며 다가왔다.

16553300667938.jpg“비켜.”

16553300625581.jpg“폐위되셨다고는 하나 이분은 고트로프의 황녀 전하십니다, 황제 폐하!”

긱스 부인이 목숨을 내놓은 것처럼 황제에게 고하자, 황제는 그녀의 앞에서 멈춰 서며 으르렁댔다.

16553300667938.jpg“그대가 언제부터 고트로프 귀족이었나? 당장 비켜라, 한나 긱스.”

16553300625581.jpg“아무리 황제 폐하셔도 이러셔서는 안 됩니다.”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려 구석으로 몸을 숨긴 시녀에게 명령했다.

16553300667938.jpg“너. 한나 긱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

시녀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얼른 정신을 차리고 긱스 부인에게 다가갔다.

16553300667929.jpg“부인…….”

긱스 부인은 시퍼런 눈빛으로 황제를 노려보며 버티려 했지만, 시녀가 그녀를 끌어당기는 통에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16553300625581.jpg“황제 폐하, 이러시면 안 되십니다!!”

긱스 부인이 비명을 지르듯 황제에게 소리쳤으나,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긱스 부인이 사라지며 모습을 드러낸 아델에게 향해 있었다. 아델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기 싫다는 듯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 카를을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16553300667938.jpg“아델라이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자, 감정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카를의 두 눈이 거세게 떨렸다.

16553300667938.jpg“아델라이드.”

그가 제 이름을 입에 담자, 거센 반발이 아델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아델은 두 눈을 부릅뜨며 카를을 노려보았다.

16553300625574.jpg“내 이름, 부르지 마십시오.”

적나라한 적의에 카를은 온몸을 떨며 비척비척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도저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서성이다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아델을 올려다보았다.

16553300667938.jpg“내가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겠소?”

아델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그를 외면했다.

16553300667938.jpg“제발 나를 좀 보시오.”

16553300625574.jpg“…….”

카를이 처절하게 매달렸음에도 그녀는 그를 보려 하지 않았다. 카를은 제가 황제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젖은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온통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처음 그녀를 마주했던 날, 이미 마음을 빼앗겼음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선대 황후의 그늘에 가려 그 감정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렸을 뿐이다. 그가 그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사이가 틀어진 뒤였다. 범람하는 강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카를은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6553300667938.jpg“사랑해.”

고개를 돌리고 있던 아델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아델은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며 울고 있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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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3300625574.jpg“뭐?”

16553300667938.jpg“사랑해.”

아델의 두 눈이 그 어느 순간보다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16553300625574.jpg“사랑?”

사랑이란 단어가 이렇게 역겨웠던가? 카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델의 치맛자락을 쥐었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16553300667938.jpg“사랑해서, 그대를 내 옆에 두려고 그런 거요.”

아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카를에게 잡혀 있는 치맛자락을 확 빼내며 일갈했다.

16553300625574.jpg“그게 사랑인가요?”

16553300667938.jpg“…….”

16553300625574.jpg“사랑 같은 소리 집어치우세요!”

아델이 그에게서 한 걸음 멀어지자 카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로 아델을 향해 호소했다.

16553300667938.jpg“그대에게 모욕과 상처를 줬던 과거를 후회하고 반성하오. 하지만 나는 종종 그대에게 진심을 말하고 손을 내밀었소! 내 모든 제안을 거절한 것은 바로 그대요! 내가 이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바로 아델라이드, 그대라고!!”

그의 말에 아델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53300625574.jpg“진심? 깃펜에 달린 깃털이 되라고, 그저 숨만 쉬며 황후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했던 통보 말인가요?”

16553300667938.jpg“…….”

아델은 고개를 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뒤,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말을 내뱉었다.

16553300625574.jpg“저는 황후로서 본분을 다하지 않았던 것을 인정하여, 폐위를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더 이상 폐하와 대화할 이유가 없으니 돌아가시지요.”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카를은 울분이 치밀었다. 돌려받지 못한 사랑이 모두 그녀의 탓인 것만 같았다.

16553300667938.jpg“그대가 폐위된 굴욕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녀는 침묵으로 답했고, 카를의 두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이 여자는 끝내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 황제인 그가 무릎을 꿇고 사랑을 속삭였음에도!!

16553300667938.jpg“못 견딜 텐데. 그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카를은 확신했다. 아델라이드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 이 굴욕을 견뎌 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뱉듯 말했다.

16553300667938.jpg“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시오. 황후로서의 본분을 다하겠노라 약조만 하면, 폐위를 없었던 일로 해 줄 수 있으니.”

  * * * 시간은 묵묵히 밤을 향해 걸었다. 뚜벅뚜벅 무심하게. 카를이 돌아간 뒤, 아델은 무심히 걷는 시간을 감내하며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긱스 부인도 내보낸 채, 어깨를 늘어트리고 간신히 숨만 내쉬었다. 너무 지쳤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삶을 되돌아보던 아델은 문득 엘리자베타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16553300625574.jpg“……나를 위한 삶이라…….”

아델은 건조한 눈으로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쉼 없이 산야를 헤치고 다닌 손은 황녀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칠었다.

16553300625574.jpg“그 또한 나를 위한 삶이었지.”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하여 같은 삶을 살 것이니 후회는 없다. 아델은 손에서 시선을 떼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한데 왜 이렇게 지친단 말인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해도 모자랄 터인데, 아델은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만 싶었다.

16553300625574.jpg“사랑…… 사랑이라.”

아델은 카를의 말을 떠올리며 실소했다. 그 추악한 이기심이 어떻게 사랑인가?  

16553300739555.jpg‘무엇을 하시든 제가 뒤를 지키겠습니다.’

16553300739555.jpg‘괜찮으십니까?’

16553300739555.jpg‘무엇을 좋아하십니까?’

  한데 왜 이 순간,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일까. 왜, 부드럽게 휘는 검푸른 눈동자가 떠오르는 것일까. 왜, ……어느 한 자락 나를 위한 삶이 있었냐던 엘리자베타의 물음이 떠오르는 것일까. 아델은 고통스러워서 몸을 옹송그렸다.

16553300625574.jpg“그래……. 폐위가 될 만했구나. 나의 마음이…….”

늘 치열하게 싸우듯 살아왔다. 때로는 승리했고, 때로는 물러났다. 한데 지금은 어디로 물러나야 할지, 어떻게 맞서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조차 지쳤다.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금고에서 작은 함을 가져왔다. 고트로프식 함의 뚜껑을 열자, 어른 검지만 한 작은 약병 2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트로프의 위대한 장군은 늘 가슴에 극약을 품고 다니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6553300667929.jpg‘헛되고 헛되노라. 허무에서 태어나 허무로 돌아가니, 죽음으로조차 잃을 것이 없도다.’

16553300625574.jpg“……그런가. 죽음으로조차 잃을 것이 없던가…….”

그 뒤, 아델은 여명이 희뿌옇게 밝아 올 때까지 테이블 위에 자그마한 약병들을 올려 둔 채 의자에 앉아 여전히 죽음 같은 어둠을 헤매고 있었다. 그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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