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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껍데기를 벗고 나니 (84/127)

84화. 껍데기를 벗고 나니2022.01.18.

많은 일이 있었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둠의 등 뒤로 빛이 바싹 달라붙기 시작했다. 엘리자베타는 황궁을 나서자마자 곧장 발드르 공저로 향했다. 공저엔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침착하게 그녀를 맞이한 집사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공작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16553300840995.jpg“헤르베르트 후작도 이곳에 있는가?”

16553300841005.jpg“예, 전하.”

두 사람은 어둑한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이윽고 엘리자베타가 집무실로 들어서자, 각자 생각에 잠겨 있던 형제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세우스와 눈빛을 주고받은 엘리자베타가 고개를 돌려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16553300840995.jpg“!”

한데 그를 본 순간, 엘리자베타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등불에 그늘진 리오넬의 얼굴 위로 첨예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발적으로 치솟는 불길이 아니라, 시퍼런 납덩이에서 느껴지는 차디찬 한기가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리오넬은 엘리자베타를 향해 정중히 묵례한 뒤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16553300841015.jpg“폐위 사유가 무엇입니까?”

엘리자베타는 내심 놀랐다. 그녀가 아는 리오넬은 매사에 감정 변화가 크지 않은 인물이었는데, 지금의 그는 범람하기 직전의 강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출렁이는 그의 눈빛에 엘리자베타는 숨을 고르며 답했다.

16553300840995.jpg“도저히 항변하기 어려운 사유였소. 폐위 사유는…….”

16553300841015.jpg“…….”

16553300840995.jpg“초야 거부였소.”

세 사람의 머리 위로 차갑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테세우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16553300841033.jpg“황후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엘리자베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3300840995.jpg“……그만하고 싶다 하시더군.”

리오넬은 무겁다고 말하며 힘겨워하던 아델의 얼굴을 떠올렸다. 명치가 체한 것처럼 답답하여 그는 억눌린 숨을 간신히 들이 삼켰다. 엘리자베타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16553300840995.jpg“일단은 이 서류부터 확인하지. 황후 폐…… 아니, 고트로프 황녀께서 주신 증거 자료요.”

상념에 잠겨 있던 리오넬과 테세우스도 엘리자베타의 맞은편에 앉으며 서류를 들어 올렸다. 자료를 훑는 시선이 빠르고 능숙했다. 오랜 기간 수집된 방대한 자료는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의 죄를 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만 여전히 마법사단이 데스포네 공작의 수중에 있으며, 황후가 폐위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리오넬이 먼저 입을 열었다.

16553300841015.jpg“안건을 상정하기에 앞서 소문을 내는 것은 어떠십니까?”

16553300840995.jpg“소문?”

엘리자베타가 고개를 갸웃하자 리오넬이 설명을 덧붙였다.

16553300841015.jpg“황궁이 어수선합니다. 마법사단은 여전히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의 수중에 있으니, 지금 이것을 터트린다 해도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라리 소문을 내어 모두가 알게 한 다음 안건을 상정하는 쪽이 나을 것입니다.”

테세우스는 리오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16553300841033.jpg“그래. 과연 그편이 낫겠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랜드 공.”

엘리자베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더불어 한 가지를 더 제시했다.

16553300840995.jpg“비단 수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영지에도 이 일을 알리는 것이 좋겠소. 일반 백성들에게도 이 일을 알리시오. 그리고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16553300841033.jpg“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즉각적인 테세우스의 만류에 엘리자베타는 고개를 저었다.

16553300840995.jpg“나는 단 한 순간도 황녀로서 책임을 다한 적이 없었소. 삶의 어느 한 자락, 전심을 다한 적이 없으니 이제 할 때도 되었지.”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그 어느 순간보다도 단단한 빛으로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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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발드르 형제와 논의를 나눈 뒤, 엘리자베타는 공작의 집무실을 벗어나 복도를 걸었다. 그랜드 공저에 들러 입고 있는 화려한 드레스를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한참 걷고 있는데 별안간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타는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리오넬이었다.

16553300840995.jpg“헤르베르트 후작.”

엘리자베타의 한 걸음 앞에서 멈춘 리오넬이 그녀를 강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16553300840995.jpg“내게 할 말이 있소?”

16553300841015.jpg“전심을 다하시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를 의미하시는 것입니까?”

16553300840995.jpg“어디까지?”

16553300841015.jpg“이 모든 책임이 데스포네 공작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공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물론 이곳은 공작의 명에 의해 집사를 제외한 사용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테지만, 아주 위험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타는 그에게 입조심 하라 이르지 않았다. 리오넬은 그녀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말을 이었다.

16553300841015.jpg“틀린 일을 바로잡으려 하여도 끝끝내 부인하며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그때엔 어찌하실 겁니까?”

리오넬의 검푸른 눈동자가 엘리자베타의 짙은 자색 눈동자를 꿰뚫듯 응시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시선을 주고받던 두 사람 사이로, 희뿌연 빛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엘리자베타는 수백 장에 달하던 아델의 행적과, 에흐몬트의 지난 14년이 담긴 방대한 자료를 떠올렸다. 불타오르던 그랜드 숲과, 비참한 몰골로 거리를 전전하던 어린아이들을 떠올렸다. 지금껏 꾹꾹 눌러 두기만 했던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치밀어 튀어나왔다.

16553300840995.jpg“……끝내 부인하여 제국을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는 자가, 황좌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겠지.”

그녀의 대답에 리오넬의 눈빛이 차갑게 일렁였다.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인 다음, 몸을 돌려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졌다. * * * 창백한 여명을 가르고 뿌연 빛이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한 시각. 리오넬은 황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는 간밤 애가 닳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황궁은 공식적인 업무기관이기도 했기에, 비상계엄 상황만 아니라면 동틀 무렵 문을 개방한다. 퇴궁령이 내려진 다음 날도 예외는 없었다. 황궁의 문지기는 말을 달려 빠르게 멀어지는 리오넬의 뒷모습을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16553300841005.jpg“……헤르베르트 후작에 대한 입궁 금지령이 내려졌는데…… 자, 잡아!”

그러나 그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16553300841005.jpg“에이, 정말! 어디에 계시는지 빨리 찾아내!”

  * * * 긴 밤, 죽음을 눈앞에 둔 아델은 제 겉을 감싸고 있던 무거운 옷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 버렸다. 벼랑 끝에 내몰리고 나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이 그저 껍데기처럼 느껴졌다. 황위, 권력, 명예, 신념…… 그 모든 것들이 힘없이 밀려난 자리에 아델라이드, 그녀만이 오롯이 남았다. 한데 이상하게도 모든 껍데기를 다 벗어 버리고 나자, 길을 잃었다. 삶의 어느 한 자락도 스스로를 위해 살아 본 적이 없었기에, 마치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산을 맨몸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된 심정이었다. 아델이 죽음보다도 더 깊은 허무와 절망에 허우적거리는데, 기적처럼 그가 나타났다. 그는 달려온 듯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아델은 습관적으로 ‘리오넬’이라고 부르려다가, 말을 삼켰다. 대신 의식적으로 허리를 펴며 이렇게 불렀다.

16553300874472.jpg“헤르베르트 후작.”

16553300841015.jpg“…….”

그녀의 낯선 호명에 리오넬은 숨을 멈췄다. 아델은 그의 이름을 가만히 입속으로 굴려 보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16553300874472.jpg“이리될 줄 알았더라면 진작 보좌관을 사임토록 했을 텐데, 미안하오.”

리오넬은 흔들리는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파리한 안색, 꽉 잠긴 목소리, 하룻밤 사이 바싹 마른 듯한 몸을 하고서, 그녀는 여전히 담담함을 가장하려 하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허리를 펴고 표정을 가다듬는 그녀의 모습에 리오넬의 세상이 정지했다.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간신히 부여잡고, 리오넬은 하염없이 아델을 바라보았다. 적막이 내려앉은 공간, 시간마저 멈춘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는 말이 없었으나, 동시에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고. 힘들지 않으냐고. 담담한 척하던 아델의 표정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죽음을 손에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차마 그것을 마실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눈빛 때문이었다. 모든 껍데기가 날아가 버리고 맨몸이 된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하나는, 놀랍게도 고국도 무엇도 아닌……. 이 걱정 어린 시선이었다. 낙하하는 그녀를 향해 겁도 없이 두 팔을 벌리던, 이 남자였다. 그때, 찬란한 아침 햇살이 창문을 투과하여 방 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아델을 바라보던 리오넬의 시야에 빛에 반짝이는 유리병이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자그마한 약병을 바라보았다.

16553300841015.jpg“…….”

그의 시선을 눈치챈 아델이 서둘러 그것을 손에 쥐려 했으나, 빠르게 다가온 리오넬이 그녀보다 먼저 약병을 잡아챘다.

16553300874472.jpg“후작!”

16553300841015.jpg“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리오넬은 굳은 표정으로 약병을 바라보았다. 고트로프식 문양이 새겨진 작은 유리병에는 짙은 남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16553300874472.jpg“이리 주시오!”

아델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내밀었으나, 리오넬은 약병을 그대로 손에 쥔 채 꽉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16553300841015.jpg“……이게 무엇입니까.”

16553300874472.jpg“피로 회복제요.”

아델은 빠르게 대답했다. 약병을 바라보던 리오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칠게 흔들리는 남자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으나, 아델은 끝내 거짓말을 했다.

16553300874472.jpg“고국에서 가져온 피로 회복제요. 하도 피곤하여 꺼내 놓은 것일 뿐.”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끝내 거짓말을 하는 아델 앞에서, 리오넬은 입술을 세게 짓씹다가 서슴없이 약병 뚜껑을 열며 말했다.

16553300841015.jpg“그럼, 제가 먼저 마셔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당장이라도 마실 것처럼 약병을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대었다. 놀란 아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채 손을 뻗었다.

16553300874472.jpg“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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