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달을 삼킨 바다2022.01.22.
리오넬의 손을 황급히 움켜쥔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이리 줘!!”
간신히 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진 것처럼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필사적으로 약병 뚜껑을 닫는 가느다란 손이 달달 떨리고, 눈물이 야트막한 담벼락을 소리도 없이 타고 넘었다. 리오넬은 어둡게 침잠된 눈으로 아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안에 들어있는 죽음을 어떻게든 빼내어 보려는 손길이 너무나 연약했다.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던 사람이 결국 이렇게까지 무너져 내린 모습을 보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밤새 죽음을 만지작거리며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내놔, 내놓으라…….”
간신히 강물을 막고 있던 댐이 그 작은 균열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리오넬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를 끌어당겨 힘껏 품에 안았다.
한편 그의 품에 파묻힌 아델은 멍하니 눈을 치떴다. 온몸을 옭아매는 강인한 힘과 뺨에 맞닿은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고, 보좌관도 무엇도 아니면서 이곳에서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말도 하얗게 부스러져 자취를 감추었다.
“…….”
온몸을 감싸는 온기. 부서질 것 같던 몸을 꽉 잡아 주는 강인한 힘. 등을 감싼 섬세한 손길. 뻣뻣하던 아델의 목덜미와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아델은 온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그의 품에 기대었다. 그리고 멍하니 생각했다.
‘아, 내가 추웠구나.’
맞닿은 가슴 너머에서 느껴지는 일정한 심장 박동 소리에 눈꺼풀이 서서히 닫혔다. 그 일정한 소리가 마치 위로 같았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죽고자 하셨습니까.”
“…….”
아델이 답이 없자 리오넬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델은 느릿하게 눈을 떠 그를 마주 보았다. 폭풍우가 치는 밤바다. 외로이 떠 있는 달도, 달을 올려다보는 바다도 위태롭게 출렁이고 흔들린다.
“……고트로프로 돌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아델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돌아갈 수 없어.”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올가미처럼 제 목을 옥죄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지치고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내 안의 악마가 나에게 속삭여. ‘그날, 동생을 죽게 뒀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라고.”
리오넬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아 일렁였다. 아델은 시선을 내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 의자에 주저앉았다. 꼭꼭 숨겨 두었던 말을 토하듯 내뱉고 나자, 물밀듯 피로가 몰아쳤다. 이 나약한 모습을 더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그에게 그만 나가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그가 그녀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놀란 아델이 그를 만류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두 눈에 그녀만을 오롯이 담은 채.
“한데 왜 죽지 못하셨습니까.”
밤새 죽음을 만지작거렸으면서도 그녀는 왜 죽지 못했을까.
“도저히 이곳에서 죽을 수가 없으셨던 것 아닙니까?”
“…….”
“당장 문밖을 지키고 있던 긱스 부인, 증거 자료를 주었던 브룬힐 알렉사도 눈에 밟혔을 것이며, 고국에 두고 온 사람들도 염려가 되셨겠지요…….”
‘그 염려에 저는 없었습니까?’
리오넬은 차마 뒷말을 입에 담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검푸른 눈동자가 일렁이더니 기어이 눈물이 길을 만들었다. 아델은 보석처럼 낙하하는 그의 눈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오넬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눌러 삼키며 한 자, 한 자 천천히 내뱉었다.
“어차피 버리시려던 목숨이었다면…….”
“…….”
검푸른 바다가 거칠게 출렁였다. 출렁이고 뒤집히다가 결코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달의 발끝을 적시더니,
“당신의 목숨을, 저에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기어이 달을 집어삼켰다. * * * 한편, 동이 트자마자 궁에 들어온 사람은 비단 리오넬 뿐만이 아니었다.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쪽문으로 황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파가 은밀히 들어왔다. 로레인은 인적이 드문 길만을 골라 그녀를 상아궁으로 안내했다.
“빨리 오세요.”
“아유…….”
허리가 굽은 노파가 로레인의 채근에 한숨을 쉬어 가며 움직였다. 디안이 상아궁의 시녀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터라, 텅 빈 궁 안에서 노파와 로레인의 발걸음 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방 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디안은 벽을 타고 올라오는 발소리에 다급히 문밖으로 뛰쳐나와 노파를 맞이했다. 비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의사는 아니었으나, 노파는 수십 년간 산모를 돌본 산파였다. 전문적인 의료 지식은 몰라도, 보면 안다. 노파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디안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디안은 초조한 얼굴로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턱이 덜덜 떨리는 통에 자꾸만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노파가 허리를 펴며 짧은 숨을 내쉬자, 침대에 누워 진찰을 받던 디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말해 보게. 내가 왜, 하혈을 하는 겐가? 아이는 괜찮은가?”
그녀의 목소리가 가련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름진 눈으로 디안을 빤히 쳐다보던 노파가 툭, 털어놓듯 말했다.
“하혈이 아닙니다.”
“……하혈이 아니라니?”
“이건, 달거리입니다.”
“…….”
디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 같더니 눈앞도 하얗게 변해 버렸다. 핏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충격에 디안이 앉은 자리에서 쓰러질 듯 휘청이자, 노파는 주름진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바로 잡아 주었다. 평생을 산파로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본 노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하얗게 질려 있던 디안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노인의 팔을 와락 잡았다.
“달거리라니! 분명 임신 중이었거늘!!”
노파는 씁쓸한 표정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선고했다.
“아기님을 가지고 싶어 몸이 착각했던 겁니다.”
“거짓말 마라! 몸이 착각했다니?! 나는 태동도 느꼈어!!”
노파는 어떤 대답도 없이 그저 물끄러미 디안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기가 가지고 싶어 애가 닳은 여인들은 가끔 이렇게 임신을 착각하기도 했다. 심지어 배가 진짜 불러 오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착각한들, 없던 아이가 생기지는 않는 법. 노파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디안이 다급한 얼굴로 그녀를 붙잡았다.
“왜, 어딜 가려고?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지 않으냐!”
노파는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더 해 드릴 일이 없습니다.”
디안은 노파의 대답에 아득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파의 팔을 움켜잡고 애원했다.
“다시, 다시 진찰해 봐라. 틀림없이 실수가 있었을 거야. 내 안에, 아이가 없을 리 없어. 제발, 다시 봐!!”
바로 그때, 방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깜짝 놀란 노파와 디안이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바로 레녹스였다. 레녹스는 눈을 부릅뜬 채 한 걸음, 한 걸음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노파가 서둘러 몸을 피하려 했으나, 레녹스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아, 아이고!”
그러고는 디안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아이가 없어?”
디안이 항변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입만 뻐끔거리는 디안을 노려보던 레녹스가 노파를 획 돌아보았다. 서슬 퍼런 기세에 노파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임신한 것이 아니야?”
“…….”
“빨리 대답해!!”
레녹스의 거센 채근에 노파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다, 달거리를 하셨습니다…….”
“아니야!!”
디안이 발작하듯 반응하였으나, 레녹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파를 더 추궁했다.
“달거리라니?!”
“제, 제가 보기엔 차, 착각을 하신 듯싶습니다.”
“착각? 임신을 착각했다고?”
“가,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
“이런 머저리 같은!!!”
“살려 주십시오…….”
겁에 질린 노파가 울면서 간청하였으나, 레녹스의 흉포한 기세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레녹스는 온몸의 피가 발아래로 쏟아져 버린 듯한 오싹함에 미칠 것만 같았다. 황후의 폐위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몸소 달려온 길이었건만,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위기감이 노도처럼 몰려와 그를 강타했다. 레녹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노파를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물었다.
“이 진단에 네 목숨을 걸 수 있겠느냐?!”
“다, 달거리든 뭐든 하여간 임산부가 하혈을 한 것은 보, 보통 일이 아닌 겁니다.”
“즉, 네 말은 이러나저러나 지금 배 속에 아이가 없다?”
“예, 예…….”
“없다고.”
확인하듯 다시 한번 묻는 물음에 노파는 주름진 눈을 가늘게 떨며 답했다.
“예……. 살려 주십시오…….”
잠시 후, 레녹스가 거짓말처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는 노파에게 몸을 기울여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가.”
불현듯 떨어진 명령에 노파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레녹스 또한 노파가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방을 나서고, 충격에 점철된 디안은 결국 침대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잠시 후, 밖으로 나갔던 레녹스가 다시 돌아와 사정없이 디안을 몰아세웠다.
“뭐? 착각? 착각?!!”
“아니야.”
“뭐가 아니야?! 많고 많은 황궁 의원을 다 두고 왜 산파를 불렀어? 너도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으니까 그런 것 아니야?!”
“아니라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레녹스는 여동생에게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제 인생에서 유일한 오점이 바로 그녀라며, 어느 것 하나도 제게 도움이 된 적 없었다고 몰아붙이다가 기어이 부모의 죽음까지 거론했다.
“너만 아니었어도!!!!”
이미 탈진할 만큼 지쳐 있던 디안은 귀를 틀어막으며 이불을 뒤집어써 버렸다.
“너, 황궁 의원 부를 생각하지 말고 죽은 듯이 있어.”
레녹스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리며 이불 속에 숨은 디안에게 윽박지르고는 그 길로 상아궁을 벗어났다. 그리고 또 다른 산파를 은밀히 수소문하여 상아궁으로 데려갔다. 분노하여 발작하는 디안을 무시하고 그녀를 진찰하게 하였는데, 역시 결과는 같았다.
“진짜 착각이었어……. 이런 멍청한……!”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디안을 뒤로하고 궁을 빠져나온 레녹스는 은밀한 일을 도맡아 하는 심부름꾼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주소가 적힌 종이 두 장을 내밀며 명령을 내렸다.
“이 주소에 사는 산파 둘을 소리소문없이 처리해라. 그리고 임산부처럼 보일 복대를 구해와. 더불어 다섯 달쯤 뒤엔 갓 태어난 사내아이가 필요하니, 미리미리 고아원 같은 곳을 수소문해 놓고.”
간신히 붙잡은 이 희망의 끈을 절대 놓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허상이라 할지라도. 레녹스의 하늘색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띠고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