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오늘, 황궁을 나갈 것이오2022.01.29.
갑작스러운 그의 선언에 엘리자베타와 테세우스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 멍하니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이내 정신을 차린 테세우스가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강하게 일갈했다.
“리오넬,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엘리자베타조차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리오넬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그는 테세우스를 직시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후작저로 모실 것입니다.”
“제정신이야?!!! 도대체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러는 것이야!!”
테세우스가 격양된 목소리로 몰아붙였지만, 리오넬은 물러서지 않았다.
“황후의 직위를 잃으셨을 뿐, 그분은 죄인으로 구금된 것이 아니라 귀빈으로서 황후궁에 머물고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희가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도움이 필요하니, 황후궁이 아닌 후작저에 거처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폐후이시다! 그분을 헤르베르트 후작저로 모시면, 너는 무엇이 된단 말이더냐!!!”
형의 물음에 리오넬은 모든 진심을 담아 답했다.
“상관없습니다.”
“……뭐?”
테세우스가 멍하니 되묻는 사이, 형제를 지켜보고 있던 엘리자베타가 끼어들었다.
“그럼 차라리 그랜드 공저로 모시겠네.”
그녀의 말에 리오넬이 고개를 돌려 엘리자베타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열심히 설득했다.
“발드르 공의 말처럼 그대가 황녀 전하를 후작저로 모신다면 온갖 추문이 뒤따를 것은 물론이거니와 후작가가 황제의 표적이 되고 말 것이오. 그러니 차라리 그랜드 공저로 모시는 편이 낫소.”
“저는 차라리 제가 표적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미 탑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랜드와 발드르로 향할 겁니다. 무사히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그 시선을 헤르베르트로 돌리는 쪽이 낫습니다.”
그저 무모한 치기가 아니었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군대를 움직이는 것처럼, 리오넬은 철저한 계산 하에 모든 판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곧 데스포네 공작의 귀에도 소문이 들어갈 것입니다. 평민들이 떠드는 소리에는 콧방귀를 뀔 인물이지만, 귀족들까지 합세한 이상 그냥 넘기지는 못할 테니 틀림없이 그랜드와 발드르를 견제하려 들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의 신경을 헤르베르트에 붙잡아 둔다면,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는 결코 힘을 합칠 수 없을 겁니다.”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마저 말문이 막힐 정도로 냉철한 판단이었다. 리오넬은 엘리자베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 제게 하셨던 말씀, 여전히 공작 전하의 가슴 속에 있는 것입니까?”
‘……끝내 부인하여 제국을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는 자가, 황좌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겠지.’
그의 물음에 엘리자베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자 리오넬은 품에서 한 통의 서류를 꺼내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굳은 표정으로 그것을 읽어 내리던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서류에는 제국을 뒤집을 계획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리오넬은 이미 첫 단계를 실행에 옮겼다. ‘소문’과 ‘여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리오넬은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웬만한 상처는 약을 바르면 낫습니다만, 아예 썩어 버린 상처는 일단 그 부분을 도려내야만 하지요. 두 분께서도 느끼셨듯, 작금의 제국은 약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은 반박하지 않았다.
“명예나 체면 따위는 제게 무의미합니다.”
“…….”
“형님께서는 제가 그분을 후작저로 모시자마자 여론을 형성하여 안건을 상정해 주십시오.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은 그 순간 분열할 겁니다.”
리오넬이 단호하게 내놓은 빈틈없는 계획 앞에, 테세우스는 어떤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동생은 처음부터 이럴 각오로 헤르베르트 후작위를 승계하겠다고 한 것은 아닐까. 리오넬은 말 그대로 무소의 뿔처럼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사실 테세우스가 진정 염려하는 것은 그깟 명예가 아니었다. 동생이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테세우스는 그것이 두려웠다. * * * 한편, 그간 골칫거리였던 황후를 드디어 치워 냈다는 기쁨에 취해 들떠 있던 데스포네 공작은 때아닌 소문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저어 수행원의 입을 막았으나, 또 다른 수행원이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보고하자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어느 쳐죽일 놈들이 그따위 헛소문을 내고 다닌단 말이냐? 지금 그 소문이 어디에서 퍼지고 있다고?”
“슬럼과 평민 주거지역 주변으로…….”
“그럼 되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침대에 도로 누웠다. 밤을 꼴딱 샜더니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어서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이따위 시시한 것을 보고라고!! 그것들은 원래 그래. 파르르 끓어올랐다가 푸스스 식지. 천하고 힘없는 것들이 아무리 떠들어 댄다 한들, 뭘 어쩔 건가.”
괜히 긴장했다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을 무렵이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다급히 문을 두드리자 공작은 있는 대로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또 누구냐!!!”
그러나 세 번째로 들어온 수행원이 건네는 이야기는 데스포네 공작도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귀족들까지도 동요하고 있다, 이 말이냐?”
“예. 무엇보다도 황제 폐하와 공작 전하가 제국 전역이 탑의 영향권에 들어오기를 바란다는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뭣이? 누,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리고 있단 말이야?!”
“이미 소문의 진앙을 찾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 옮겨지고 있습니다.”
데스포네 공작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평민들 사이의 소문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안건을 상정할 수 있는 귀족들에게까지 말이 돌고 있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업까지 유출되다니! 그것은 황제조차도 모르는 극비 중의 극비가 아니던가! 반사적으로 묻기는 하였으나, 누가 꾸민 일인지는 조사하지 않아도 뻔했다.
“발드르, 그랜드. 이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것들이…….”
데스포네 공작은 잔뜩 분개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당장 궁으로 갈 것이니 의복을 가져와라!!”
* * * 그 시각, 리오넬이 보낸 편지가 아델에게 도착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델은 서둘러 편지를 펼쳤다. 편지는 가벼운 인사말로 시작하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구절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헤르베르트 후작저로 모시겠습니다.] 그 문장을 읽고 아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뇌리를 스쳤으나, 아델은 편지를 마저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리오넬은 그를 닮은 깔끔한 필체로, 그녀를 헤르베르트 후작저로 모셔야 하는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그토록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그녀가 절대 후작저로 오려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아델은 한쪽에서 물건을 정리 중인 긱스 부인에게 물었다.
“지금 수도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알아봐 주시오.”
긱스 부인이 명을 받고 곧장 밖으로 나간 사이, 아델은 리오넬의 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읽어 내렸다. [낙타와 사자와 아기를 아십니까.] 이유도 모른 채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걷는 낙타에게 필요한 것은,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울 용기를 지닌 사자의 정신이다. 그리고 용맹한 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아기의 정신이다. [왜 탑이라는 재앙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던 저희에게, 황녀님은 사자의 정신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제 저희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를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후작저로 와 주십시오.] 리오넬 개인의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채, 에흐몬트 백성 모두의 대의를 내세운 논리적인 편지는 아델의 마음을 거세게 흔들었다. 때마침 긱스 부인이 돌아왔다. 멀리 알아볼 것도 없었다. 이미 시종과 시녀들조차 소문에 대해 쑥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에게서 그 내용을 전달받은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의 하단을 확인했다.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델은 리오넬의 편지를 벽난로 속으로 집어넣었다. 외부로 유출되면 위험할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편지가 재가 된 것을 확인한 다음, 아델은 몸을 돌리며 긱스 부인에게 말했다.
“오늘, 황궁을 나갈 것이오.”
그러자 긱스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결연한 얼굴로 답했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곧 황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 * *
“뭐야?!!”
두 주먹으로 책상을 거세게 내리치며 험악하게 되묻는 황제를 향해 시종은 더욱 깊게 고개를 조아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트로프 황녀께서 퇴궁을 준비하신다 합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머릿속이 탈색된 듯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카를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휘몰아치는 위기감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혹시 꿈은 아닐까 부정해 봤지만, 안타깝게도 냉정한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황후궁에서 황녀님의 물품을 밖으로 옮겨 나르고 있다 합니다.”
“폐후가, 어딜 간다고?”
“…….”
“폐후가!!! 궁 밖으로 나가겠다고?!! 누가 그녀를 제집으로 들인단 말이냐!!!”
광기마저 어린 목소리로 고함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황제를 시종은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상이 아니야.’
제 손으로 폐위시켜 놓고, 뒤늦게 이 무슨 집착이란 말인가. 시종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로 그때,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데스포네 공작이 들어왔다. 입궁하는 길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몰려드는 귀족들을 목격하고 기함하며 헐레벌떡 황제궁을 향해 달려온 참이었다. 본디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 아무리 유서 깊은 가문도 탑이 내려오면 몰락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암울한 소식에 많은 가주가 밤잠을 지새우며 전전긍긍했다. 한데, 그 예측 불가능한 줄 알았던 엄청난 재해가 사실은 만들어진 것이었다니? 심지어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마법사단을 앞세워 궁극적으로 제국 전역이 탑의 영향권에 들이려 한다니? 기막힌 소문에 귀족들은 말 그대로 뜨겁게 타올랐다. 친 황제파마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 정도였으니, 그랜드 공작이 이에 관한 안건 상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귀족들이 성난 벌 떼처럼 황궁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폐하!!”
기껏 성가신 황후까지 치워 놓은 마당에 이대로 손 놓고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공작이 목소리를 높였으나, 황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성난 걸음을 옮겼다.
“황제 폐하!!”
결국, 데스포네 공작은 황제를 가로막으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황제가 사납게 일렁이는 눈으로 공작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비키시오, 공작.”
“지금 어딜 가려 하시는 겁니까!!”
“폐후가 제멋대로 궁을 나간다고 하지 않소?”
“가서 무슨 권한으로 막으시려고요? 죄인의 신분으로 구금된 것도 아니고 귀빈으로 머문 것뿐이니 원한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 내가 죽이자고 할 때 죽였어야지!’
데스포네 공작은 속으로 불평을 삼키며 카를을 압박했다.
“지금 고작 폐후의 거취 따위를 신경 쓰실 때가 아닙니다! 정신 차리고 자리에 앉아 보십시오! 지금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알아서 하시오.”
황제가 공작의 말허리를 자르며 제 팔을 잡고 있던 손을 거칠게 털어 냈다.
“언제 내 허락받고 움직인 적 있소? 하고 싶은 대로 알아서 하시오.”
그러고는 공작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다는 듯 그를 지나쳐서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황당한 얼굴로 황제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데스포네 공작의 속에서 용암 같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저 빌어먹을 자식을 도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힘을 합쳐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애를 써도 모자랄 판에, 이미 폐위시킨 여자를 붙들고 뭘 어쩌겠다는 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