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황후 자리를 버리겠습니다2022.02.01.
아델의 짐은 정말 별것 없었다. 에흐몬트로 올 때 가져왔던 대부분이 지참금이고, 아델 개인 소유로 가져온 것은 약간의 비상금과 몇 가지 물건이 다였다. 옷장의 드레스들도 예복이 대부분이기에 가져갈 이유가 없었고, 각종 장신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오넬이 은밀히 보낸 사람들이 그녀의 물건을 대부분 후작저로 옮겼음에도 황후의 침실은 여전히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후의 만류에도 그녀를 모시겠다고 기어이 고집을 부린 긱스 부인이 제 짐을 챙기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간편한 드레스를 입은 아델은 황후의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아주 천천히, 작은 미련이라도 남은 것이 있는지 살폈지만, 몇 번을 다시 보아도 더 가져갈 것도, 남겨 둘 것도 없었다.
‘아, 정말 별것 아니네.’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놀랄 만큼 가벼워졌다. 그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쾅, 하고 문이 열렸다. 저렇게 그녀의 방문을 무도하게 열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 얼마나 정신없이 달려왔는지 반짝이는 금발이 온통 흐트러져 있고, 언뜻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도 같았다. 날카롭고 퇴폐적인 느낌이 물씬 드는 보라색 눈동자로, 그는 아델을 노려보았다. 아델의 옷차림을 아래위로 훑던 황제가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어딜 가려고?”
이글거리는 눈빛이 마치 그녀를 잡아먹을 듯했다. 아델이 그를 외면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황제가 그녀를 가로막고 바짝 다가서며 으르렁거렸다.
“묻잖소? 어딜 가느냐고.”
아델의 황금빛 눈동자가 도전적으로 날아들었다. 아무리 해도 쥘 수 없는, 이 강렬한 눈. 황제는 이대로 그녀를 가두고 싶었다. 가두고 속박하여서라도 가질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더니 다시 문을 향해 움직였다. 황제는 기어이 그녀의 어깨를 세게 잡아 돌려세웠다. 이런 행동을 그녀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만, 그는 이것 외의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역시나 아델이 거칠게 그 손을 쳐냈다. 두 사람은 핏발 선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대치했다. 한 걸음, 또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에 몸서리치던 황제가 내내 묻고 싶었던 것을 툭, 내뱉었다.
“기어이 그놈한테 가는 건가?”
“…….”
“기어이 리오넬 발드르에게 가는 것인가?!!!”
황제가 절망하며 소리치는데도 아델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워졌다. 그는, 끝까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인지도.
“어디로 가는 것이 중요한가요?”
“…….”
“아니.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더는 당신의 곁을 견딜 수가 없다는 것뿐이죠.”
“내 황후가, 내 곁이 아니면 어디에 있겠다는 건가?!”
제 손으로 황후를 폐위시켰으면서, 황제는 그녀 앞에서 절규했다. 아델라이드를 황후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은 그녀가 있을 곳은 황제의 옆자리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벼랑 끝에 몰린 그녀가 손을 내밀 사람은 황제뿐일 테니. 그런데 이게 뭔가. 아델은 카를의 절망을 찬찬히 읽어 냈다. 그리고 시시각각 무너지는 오만한 얼굴을 보며 아주 잔인한 말을 꺼냈다.
“황후? 날 폐위시켜 놓고?”
카를은 그녀의 비난에 말문이 막혔다. 웃음기를 지운 아델이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차라리 잘됐어요.”
마치 무언가를 훌훌 털어 낸 것같이 후련한 황후의 모습에 카를의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만. 더 말하지 마. 차라리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아델은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
“폐위되지 않았더라도 언젠간 이 말을 했겠죠.”
“……그만.”
그동안 그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초승달처럼 매혹적인 웃음을 지금에야 보여 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 옆자리, 내가 버리겠다고.”
단호한 선언에 황제는 무너질 듯한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델은 한 줌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도 끝끝내 제 방식을 버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를이 핏발 선 눈으로 절규하듯 소리쳤다.
“아니!! 그대는 그럴 수 없어. 그대가 있을 곳은 오직 내 옆자리뿐이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그대를 다시 내 옆에 앉히고야 말 테니. 그대는 나의 황후니까!!!”
감히 황후라는 말을 들먹이는 그에게, 아델은 단단한 어조로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황후 자리를 버리겠습니다. 더는 못 견디겠으니까.”
카를은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바로잡으시오. 복위시켜 줄 테니, 그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란 말이야!”
“아니.”
“…….”
“전, 두 번 다시 당신 곁에 서지 않을 거예요.”
아델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카를의 가슴을 잔인하게 헤집었다.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카를은 제 곁을 스쳐 문을 향해 걸어가는 아델을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리오넬 헤르베르트, 내가 기필코 그자를 죽일 거요.”
저주 같은 그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으나, 아델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 카를은 아델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황제이고, 그자는 내 신하이니 가능하지. 가장 악독한 조건의, 도저히 살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 버릴 거요. 살아 돌아오면 또 보내고, 살아 돌아오면 또 보내고. 그렇게 언젠가 그자가 죽어 나자빠질 때까지.”
아델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대가 그 새끼 옆에 있으면, 기필코 그렇게 할 거요. 그대가 지금 떠난다면 그자의 명예를 진창에 처박을 뿐 아니라 결국 목숨까지도 앗아 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쇳덩이처럼 차갑고 시퍼런 냉기가 아델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으나, 다행히도 등 뒤의 황제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아델은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 * * 아델은 그대로 황후궁을 벗어났다. 황후로서 가졌던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온 길이건만, 황후궁을 벗어나자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아델은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유난히도 차가운 날이었다. 뒤따라 나온 긱스 부인이 서둘러 아델의 어깨에 두꺼운 외투를 걸쳐 주었다. 아델은 긱스 부인과 함께 황량한 회색빛 길을 묵묵히 걸었다. 삶은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고, 눈 앞에 펼쳐질 미래는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 밀려들어 목 끝에서 찰랑이자, 마치 깊은 물 속에 잠긴 것처럼 아득하고 버거웠다. 그렇게 먹먹한 길을 걷고 걸어, 이윽고 갈림길이 나타났다. 아델이 기계적으로 몸을 트는 그 순간 훅,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모든 할 말을 잃어버린 채 멍하니 앞을 내다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왈칵 치밀며 두 눈이 뜨거워졌다.
“……아.”
폐위되어 떠나는 길고 비참한 길을 따라, 정복을 갖춰 입은 수많은 기사가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실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찌를 듯한 기사들의 기세에 화가 나서 동동거리던 귀족들도 입을 다물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앙리 자칼이 한 걸음 걸어 나오더니 아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델은 그 모습을 시뻘게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깨에 걸쳐져 있던 외투를 벗어 긱스 부인에게 건넸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등을 펴고 자세를 바로 한 뒤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걸음에 맞춰 기사들이 그녀를 향해 일제히 경례했다. 그것은 기울어져 정체된 판에 강력한 물음을 던진 선구자에 대한 존경이자, 단 두 번에 불과했으나 그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며 함께 싸운 동료에 대한 뜨거운 지지였다. 폐후에게 쏟아지는 기사들의 예우에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함께 고개를 숙이는 시종, 시녀들도 꽤 많았다. 이윽고 그녀가 황궁의 정문에 다다르자 거대한 문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먹먹한 어둠을 찢고 도래한 것처럼, 문 너머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그 빛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다. 아델은 그녀가 에흐몬트로 왔던 때를 가만히 돌이켜 보았다. 가을이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있을 무렵이었다. 따뜻한 바람이 기분 좋은 선선함을 품고, 새파랗게 울창하던 나무들이 고운 옷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할 즈음. 그러나 그녀에게 에흐몬트는 늘 겨울이었다. 아니, 되돌이켜 보니 비단 에흐몬트만이 아니라 아델라이드의 세상은 늘 겨울이었다. 아무리 옷을 여며도 시린 바람이 기어이 품을 파고들어 손끝을 차갑게 식혔다. 그 추위에는 도통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봄이 좋았다. 황량한 겨울을 이겨 낸 여리디여린 것들이 파르라니 세상을 물들이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그녀의 삶도 언젠가 그러하리라는 괜한 기대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의 삶은 그토록 화려하게 허무했다. 고급스러운 유리병에 담긴 한 잔의 죽음을 가슴에 품고 다녀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삶과 지극히 닮은 그것을 버리고 싶었다. 허무를 가슴에 품은 채 살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매만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를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나는 것이. 그가 그녀를 보며 다정하게 웃는다. 황량한 겨울에 부는 봄바람처럼, 여린 새싹처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또다시 그녀를 향해 내민 단단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무수한 시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직한 손. 그 순간, 리오넬이 작게 속삭였다.
“다른 생각일랑 하지 마시고, 그냥 잡으시면 됩니다.”
아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만을 가득 담은 검푸른 눈동자에는 한 줌의 두려움도, 갈등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델은 그가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크고 단단한 손은, 참 따뜻했다. 감각이 없을 정도로 차게 식은 손에 따뜻한 온기가 퍼지자 비로소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