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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피로 물든 디안의 깨달음 (89/127)

89화. 피로 물든 디안의 깨달음2022.02.05.

긱스 백작저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긱스 부인이 떠난 뒤, 아델은 헤르베르트 후작 가문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리오넬이 건네는 두꺼운 담요로 무릎을 감싼 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자, 나른한 졸음이 몰려들었다. 몹시 지친 듯 느릿하고 무겁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결국 굳게 닫혔다. 리오넬은 그녀가 잠드는 모습을 숨을 멈춘 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하얗던 얼굴은 이제 시퍼렇게 보일 정도로 창백하고, 맞잡았던 손끝은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가느다란 목이 힘없이 꺾이자, 보다 못한 리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리오넬은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그마한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싼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가느다란 어깨를 감싼 뒤,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혔다. 다행히 마차가 널찍해서 그녀 한 사람 누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리오넬은 담요로 아델의 몸을 덮어 준 다음,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보좌관이라는 직책으로 그녀의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감히 바라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돌리곤 했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니 심장이 온통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악마가 리오넬에게 속삭였다.

16553301638664.jpg‘달이 기울어 바다에 빠졌구나.’

어금니를 세게 문 리오넬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원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늘진 남자의 눈동자가 어둡게 넘실거리며 아델을 담았다. 아델은 제 가슴 속에 악마가 산다고 했지만, 그것은 리오넬도 마찬가지였다. 아델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도저히 황궁에서 못 있겠다고 고백한 그 순간, 리오넬은 마음먹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 그녀를 데려오겠다고. 그 결심엔, 간악하고 어두운 희열이 섞여 있었다. 죽음마저 각오한 그녀의 절망 앞에서 그가 한 생각은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이기적인가. 괴로워 탄식하던 그는 다시 멍하니 아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은 꼭꼭 감춰 둔 채,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그녀가 머물 곳을 만들어 드리리라. 그녀가 원하는 것이,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이니. * * * 이윽고 거대한 마차가 헤르베르트 후작저에 도착했음에도 아델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피로와 각종 정신적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아친 탓이었다.

16553301638671.jpg“황녀님.”

리오넬이 속삭이듯 불렀으나,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결국, 리오넬은 그녀를 품에 가두듯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충족감으로 심장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리오넬은 바람 한 점 못 들어오도록 그녀의 몸을 담요로 잘 감싼 뒤 마차에서 내렸다. 대기 중이던 사용인들은 폐후를 안아 들고 내리는 후작의 모습에 놀란 듯 숨을 멈췄으나, 이내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리오넬은 집사가 미처 안내하기도 전에 아델의 방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직접 그녀가 머물 방을 미리 선정하여 단장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아델의 방은 후작저에서 채광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중후한 액자와 커튼은 오전 사이 밝은 톤으로 바뀌어 있었고, 포근하고 새하얀 침구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오넬이 아델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자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서둘러 다가왔다.

16553301638671.jpg“푹 주무실 수 있도록 빛이 들지 않게 하고, 방 안 온도를 조금 더 높여라.”

리오넬은 직접 아델의 방을 둘러보며 몇 가지를 더 지시하고 마지막으로 아델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그녀의 방을 나섰다.

1655330163868.jpg“잠시 쉬시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요새 통 주무시질 못하셨지 않습니까.”

뒤따라 나온 집사가 조언했지만, 리오넬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16553301638671.jpg“해야 할 일이 남았네. 황녀 전하께서 깨어나시거든 내게 연락 주게.”

1655330163868.jpg“……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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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폐후가 떠난 에흐몬트 황궁은 말 그대로 들쑤셔 놓은 벌집 같았다. 호전적이고 성미가 급한 에흐몬트 귀족들은 곧장 황제궁 앞에 모여 자기들끼리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이 사태에 대해 큰 소리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안건을 상정하여 중신 회의를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궁 안에서 그 사태를 지켜보던 데스포네 공작이 성난 얼굴로 쿵쾅대며 밖으로 나왔다. 보통 때였다면 그의 등장에 기가 눌려 침묵했을 귀족들도 이번만큼은 달랐다.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함께 얽힌 탑에 관한 소문이 그들의 용기에 불을 지핀 것이다. 데스포네 공작이 여전히 시끄러운 귀족들을 향해 노성을 터트렸다.

16553301638699.jpg“지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1655330163868.jpg“공작 전하!! 탑을 일부러 파괴하지 않고 방치 중이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16553301638699.jpg“누가 그런 헛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데스포네 공작이 발작하듯 핏대를 세워 가며 소리쳤다.

16553301638699.jpg“대 에흐몬트 제국의 마법사단은 최선을 다하는 중일세!!”

1655330163868.jpg“하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분명 이 년 안에 제국의 모든 탑을 파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16553301638699.jpg“이런 무도한 자를 보았나!! 어디 감히 폐후에게 황후 폐하라니!!”

1655330163868.jpg“뷔에타의 탑은 바로 파괴하고, 칼뱅의 탑은 그대로 두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16553301638699.jpg“아, 그건 내 이미 대답을 했거늘!!!”

1655330163868.jpg“뷔릴리엔의 탑도 파괴해 주십시오!”

1655330163868.jpg“몬테의 탑을 파괴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제아무리 데스포네 공작이라 한들, 성난 귀족들의 합리적인 질문 공세 앞에서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황제궁 내부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 불같은 기세로 황제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16553301638699.jpg“폐하!!!”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집무실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궁 밖의 소란에도 그게 무슨 대수냐는 태도였다. 이를 본 데스포네 공작의 분노가 폭발했다.

16553301638699.jpg“개떼처럼 몰려든 저 귀족들 안 보이십니까?”

데스포네 공작의 질책에도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엉뚱한 중얼거림이었다.

16553301658853.jpg“헤르베르트 후작저로 갔다, 이거지…… 결국.”

16553301638699.jpg“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쓰실 때가 아닙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공작이 황제에게 다가가 몸을 기울이며 쏘아붙였음에도 카를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그는 마치, 아주 오랜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딱 선대 황후가 제 친모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그즈음으로.

16553301658853.jpg“감히, 나를 두고……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 가 버렸어. 나를 두고.”

16553301638699.jpg“…….”

16553301658853.jpg“아델라이드…….”

데스포네 공작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황망히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밀려드는 파도에 대항해도 부족할 이때,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결국 데스포네 공작은 몸을 돌리며 노성을 터트렸다.

16553301638699.jpg“이 시국에 레녹스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야!!”

  * * * 그 시각, 데스포네 공작이 찾는 레녹스는 상아궁에 있었다. 황후의 폐위 소식과 탑에 관한 의혹으로 제국이 떠들썩했으나, 어디 레녹스의 마음에 비할까? 그는 디안 앞에 시커먼 꾸러미를 툭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다.

16553301678915.jpg“…….”

16553301678919.jpg“…….”

남매는 시뻘겋게 독이 오른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디안이 꾸러미를 열어 볼 생각이 없는 듯하자 레녹스는 거친 손길로 그것을 연 다음, 억지로 그녀의 품에 안겼다.

16553301678915.jpg“!!!”

그것은 임산부의 배를 흉내 내는 복대였다. 그제야 오라비가 떠넘긴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린 디안이 무척 혐오스럽다는 듯 그것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레녹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디안을 쏘아보며 차갑게 일갈했다.

16553301678919.jpg“감사하게 생각해야지?”

16553301678915.jpg“……아니라고 했지.”

16553301678919.jpg“뭐가 아니야? 아이, 있는 것 맞아?”

16553301678915.jpg“……있어. 있다고.”

발끈하며 반발했지만 디안의 마음은 이미 끝없는 나락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달거리라던 노파의 말은 사실이었다. 검붉은 핏자국이 디안에게 잔인한 현실을 계속 상기시켰다. 설령 진짜로 임신이었다 한들, 지속되는 하혈 앞에 아이가 괜찮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황궁 의원에게 이 사실을 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것이 알려지는 순간,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기 때문이리라. 레녹스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16553301678919.jpg“네 배 속에 아이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면, 넌 당장 황궁에서 쫓겨날 거다. 똑똑하신 누이께서도 이미 알고 있겠지?”

16553301678915.jpg“…….”

16553301678919.jpg“이 오라비가 시기별로 복대를 교체해 줄 테니, 넌 온종일 저걸 착용하고 있어. 진찰하는 의원들 입은 내가 막을 거다. 모두 죽여 없애면 후환이 남진 않겠지. 그리고 한 다섯 달쯤 뒤엔 내가 적당한 사내아이를 데려올 테니 그런 줄 알아.”

16553301678915.jpg“…….”

16553301678919.jpg“아, 그리고 그 산파 둘. 내가 죽였다.”

말을 마친 레녹스는 몸을 돌려 저벅저벅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막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는데, 등 뒤에서 디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16553301678915.jpg“너한테 난 뭐야?”

레녹스는 멈춰 서서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돌렸다. 움푹 파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디안에게선 과거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레녹스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16553301678919.jpg“그렇게 외모 단장에 열을 올리더니, 다 내팽개친 거야? 네 몰골이 그러니 황제께서 상아궁에 발걸음도 안 하시는 게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방을 나가 버렸다. 멍하니 문을 바라보던 디안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혐오스러운 물건에 닿았다. 레녹스에게 그녀의 존재는 딱 저것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디안은 나락의 끝에 서서 가만히 과거를 되짚었다. 황후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16553301658853.jpg‘아니, 너는 안 된다.’

왜 안 되었을까? 왜, 나는.

16553301658853.jpg‘이곳은 내 생모가 살아 보고 싶어 했던 곳이다.’

자기 생모가 살아 보고 싶어 했던 곳을 내어 줬으면서. 그러나 그는 그 생모를 끝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디안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16553301658853.jpg‘아이가 있어?’

그녀가 임신했다고 알렸던 날, 황제의 눈은…… 마치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의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디안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16553301678915.jpg“그는…… 내가 아이를 가지길…… 바라지 않았어. 진심으로.”

왜냐하면, ……왜냐하면.

16553301678915.jpg“비천한 출신의 여자에게서, 후계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디안은 제가 우는 줄도 모르고 울다가, 발작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입에서 짠 눈물 맛이 났으나 그녀는 계속 울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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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야, 도통 아이가 생기지 않던 이유를 깨달았다.

16553301678915.jpg“피임하고 계셨어요, 폐하?”

내가 그렇게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알면서도. 여인의 애끓는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화려한 상아궁 벽면을 잘게 울렸다. * * * 한편, 그 무렵.

1655330163868.jpg“어후, 추워!”

식사를 마친 기벨린이 팔을 감싸며 호들갑을 떨자 카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330163868.jpg“다 먹었으면 가자.”

두 사람은 앉았던 자리를 말끔히 정리한 다음 말에 올랐다. 기벨린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끝도 없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1655330163868.jpg“산 하나 없이 평야만 이어지니 지겹다, 지겨워.”

1655330163868.jpg“그래도 거의 다 왔다. 이르면 내일 아침쯤엔 도착할 테니까.”

지도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카인이 던진 말에 기벨린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1655330163868.jpg“그래 좋다! 황후 폐하께서 내주시는 편안~한 잠자리에서 퍼질러지게 잠이나 자야지! 어서 가자, 카인! 이랴!”

잠시 후, 겨울 햇살이 내리쬐는 드넓은 가도 위로 두 필의 말이 에흐몬트 수도, 정확히는 아델라이드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그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들의 주군 아델라이드가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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