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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카인과 기벨린 (92/127)

92화. 카인과 기벨린202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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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은 얼굴로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하며 씹어 내뱉듯 말했다.

16553302059328.jpg“쓸데없는 질문하지 말고, 돌아가.”

16553302059332.jpg“전 매일 궁금한데, 폐하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버지이시잖아요.”

16553302059328.jpg“디안!!”

16553302059332.jpg“의원들에게 제 임신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들이 진단을 자꾸만 미뤄요.”

16553302059328.jpg“…….”

16553302059332.jpg“사내아이라면, 이 아이를 후계로 삼아 주실 건가요?”

16553302059328.jpg“…….”

16553302059332.jpg“안 되나요?”

얼음장 같은 황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디안이 속삭이듯 물었다.

16553302059332.jpg“왜요? 제가 비천해서요?”

그리고 간절히 바랐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누가 감히 너에게 비천하다 했느냐고 그녀를 달래며 묻기를. 그리고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침묵 끝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16553302059328.jpg“나의 후계는 황후의 소생일 것이다.”

귓가를 타고 흘러든 잔인한 말이 그녀의 가슴을 거칠게 헤집었다. 디안은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3302059332.jpg“……그렇군요.”

그래. 그랬던 것이로군요. 내 신분이 비천하여 황후로 삼을 생각이 없었고, 내 아이를 후계로 만들 생각은 더더욱 없었던 것이군요. 디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그와 마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몸을 돌리자 고였던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렇게 일렁이는 세상을 비척비척 걷다가,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16553302059332.jpg“폐하, 제게 왜 상아궁을 주셨어요?”

16553302059328.jpg“…….”

16553302059332.jpg“저를 왜 곁에 두셨어요?”

16553302059328.jpg“…….”

그는 잔인하게도 끝내 답하지 않았지만, 디안은 그의 침묵에서 답을 읽어 냈다. 황제는 그저, 제가 견디기 힘든 감정을 그녀를 통해 해소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16553302059332.jpg‘폐하에게 내 존재는 마치…… 쓰레기통 같은 것이었군요.’

이상하게도 쿡쿡 웃음이 터졌다. 상아궁으로 돌아온 디안은 미리 준비했던 아기용품을 모두 꺼내었다. 자그마한 아이의 옷, 손바닥보다 작은 신발, 앙증맞은 모자…… 디안은 그것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울면서 웃었다. 상실감이 노도처럼 몰아쳐 그녀를 덮쳤다. 끝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지옥을 밤새 맨발로 걷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16553302059332.jpg“내가 진정 미워해야 할 건…… 그 여자가 아니었어.”

그래. 그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지옥으로 처박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16553302059332.jpg“왜 나 혼자 이걸 견뎌야 해? 나를 지옥에 처박은 사람들은 멀쩡히 잘 살아있는데.”

눈물에 젖어 붉게 충혈된 하늘색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 * * 집사가 손님들을 모셔오겠다며 물러나고 문이 닫히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아델은 천천히 뒤로 돌아 멍하니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에는 잔뜩 흐트러진 여자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단장을 위해 빗을 들어 머리를 빗기 시작했지만, 어찌나 손이 떨리는지 오히려 엉키기만 할 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델의 손에서 빗을 천천히 빼낸 리오넬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16553302074236.jpg“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16553302088858.jpg“…….”

그에게 단장을 맡긴 채, 그녀는 눈을 감고 흐트러진 표정을 가다듬었다. 숨소리가 점차 차분해지며 이윽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치켜떴을 때는 서로의 온기에 취했던 순간이 신기루처럼 느껴질 만큼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리오넬은 자꾸만 먹먹하게 차오르는 마음을 누르며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어 내렸다. 하지만 그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거울 속에 비친 아델의 표정이었다.

16553302074236.jpg“원치 않는 객이라면 돌려보내겠습니다.”

16553302088858.jpg“……아니오.”

16553302074236.jpg“누가 온 것입니까?”

16553302088858.jpg“……카인.”

리오넬의 뇌리에도 각인처럼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16553302088858.jpg‘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데려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절박한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그녀는 죽을 것 같으니 그들을 불러 달라고 애원했으면서, 금세 괜찮다고 체념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동요를 감추고 있었다. 화려하게 허무한 그녀의 삶이 그의 가슴에 사무쳤다. 어떻게 해야 당신이 짊어진 그 무거운 짐을 내가 나누어 들 수 있을까.

16553302088858.jpg“후작, 먼저 가 보시오. 나도 곧 나갈 터이니.”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하는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 * * 한편, 카인과 기벨린은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한 집사가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후, 자리에 앉아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장장 두 달에 걸친 긴 여정 끝에 겨우 도달한 에흐몬트의 수도에서 아델이 황후 자리에서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황망했던가.  

16553302088858.jpg‘잘 지내, 카인.’

16553302088894.jpg‘…….’

16553302088858.jpg‘너, 나한테 인사도 안 할 테냐?’

16553302088894.jpg‘…….’

16553302088858.jpg‘잘 지내. 나도 잘 지낼 테니까.’

  태연하게 웃으며 농담처럼 인사를 건네던 아델라이드 황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녀가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던 그 날, 카인은 그녀를 실은 배가 수평선 아래로 뚝 떨어질 때까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항구에 홀로 서 있었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늘 강인한 척하는 그녀의 뒤를 지켰던 날들이 부는 바람에 허망하게 나부꼈다. 그의 마음도 이러한데, 그녀의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그렇게 떠난 길이건만, 폐위되어 고작 후작저에 몸을 의탁하고 계시다니. 성별이 모호할 만큼 아름다운 카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달칵 문이 열리자 카인과 기벨린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데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아델이 아니었다. 범상치 않을 만큼 아름답고도 단정한 남자에게선 외모만큼이나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리오넬 역시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척 보기에도 빼어난 두 사람을 빠르게 훑었다. 은발을 느슨하게 묶은 이는 리오넬마저 순수하게 감탄할 정도로 이목구비가 수려했고, 나머지 한쪽은 평균 체격이 큰 에흐몬트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우람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이윽고 두 사람 앞에 도착한 리오넬이 먼저 입을 열었다.

16553302074236.jpg“어서 오시오. 나는 이 저택의 주인인 리오넬 헤르베르트 후작이라 하오.”

카인도 예를 갖추어 응대했다.

16553302088894.jpg“야심한 시각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시오. 나는 고트로프의 카인 녹스요.”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저음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기벨린도 인사를 건넸다.

16553302088894.jpg“기벨린 루한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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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인 녹스와 기벨린 루한. 그날, 아델이 찾던 사람들이었다. 리오넬은 목 아래 날카로운 칼이 겨누어진 것처럼 말로 형용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헤르베르트 후작저까지 찾아왔다는 건, 저들도 이미 에흐몬트의 상황을 알았다는 뜻이었다. 당연히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모시고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겠지. 분노에 이글거리는 두 사내의 눈동자에서 단단한 결심이 엿보였다. 그때, 기벨린이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3302088894.jpg“우리 전하께서 이곳에 계시다 들었소. 도대체 폐위 사유가 뭐란 말이오?”

그의 온몸에서 분노가 넘실거렸다. 오랜 기간 전장을 누빈 리오넬마저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날카롭고도 공격적인 기세였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자 세 남자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금빛 눈동자, 끝이 살짝 올라간 듯한 눈매, 굳게 다문 입술. 풍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무 같은 모습이 그녀다우면서도 애잔했다. 바짝 날이 서 있던 카인의 눈매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꿈속의 길에 발자국이 남는다면 돌길도 바스라져 흔적조차 남지 않으리라던 노래처럼, 수평선 아래로 그녀가 사라진 날부터 카인은 늘 그녀를 그려 왔다.

16553302088858.jpg“카인. 기벨린.”

아델이 부르자 카인과 기벨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기벨린이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린 채 아델을 샅샅이 살피며 탄식했다.

16553302088894.jpg“우리 전하…… 왜 이리 마르셨습니까.”

16553302088858.jpg“안 말랐는데?”

16553302088894.jpg“마르셨습니다. 마르셨어요! 얼굴이 핼쑥해지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좋아하시는 육포를 잔뜩 챙겨 올 것을 그랬습니다. 아니, 남겨 올 것을…….”

16553302088858.jpg“오는 길에 다 먹었군?”

16553302088894.jpg“…….”

기벨린은 큰 덩치를 작게 말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아델은 그 모습에 쿡쿡 웃었다. 그리고 기벨린에게서 고개를 돌려 찌를 듯한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는 카인을 마주 보았다.

16553302088858.jpg“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고트로프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16553302088894.jpg“…….”

16553302088858.jpg“카인.”

16553302088894.jpg“괜찮으십니까.”

16553302088858.jpg“……물론이지.”

끝내 의연한 아델의 모습에 카인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멀리서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리오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곁을 지키고 싶었으나, 리오넬은 이쯤에서 자리를 비켜 주기로 마음먹었다.

16553302074236.jpg“세 분께서 회포를 푸실 시간이 필요할 테니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아델은 스쳐 가는 리오넬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16553302088894.jpg“전하.”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카인이 그녀를 부르자, 아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권했다.

16553302088858.jpg“일단 앉자.”

기벨린은 엉덩이가 소파에 닿기 무섭게 아델에게 물었다.

16553302088894.jpg“도대체…… 까닭이 무엇입니까? 얼토당토않은 사유로 감히 전하를 폐위시킨 것이라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 아델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쉬듯 답했다.

16553302088858.jpg“나는 폐위를 인정했다, 기벨린.”

16553302088894.jpg“?!”

아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침묵하는 두 사람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마친 뒤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16553302088858.jpg“……고트로프에도 면목이 없다.”

카인과 기벨린은 아델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결국, 아델은 고트르프에서 황태녀의 직위를 내려놓은 것과 같은 이유로 이곳 에흐몬트에서도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아델을 탓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런 사람이기에, 두 사람 모두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 아닌가. 기벨린은 황소처럼 거친 콧김을 푹 내쉰 뒤 화통하게 말했다.

16553302088894.jpg“에이! 잘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서 안 계시니 팔팔하게 날아다니던 다른 놈들도 기운이 없지 뭡니까? 갑시다, 전하! 뭐가 걱정이십니까? 고트로프와 저희가 있는데요!”

16553302088858.jpg“…….”

16553302088894.jpg“……전하?”

이상함을 느낀 기벨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델은 고요한 얼굴로 그저 그를 바라볼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침묵하던 카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16553302088894.jpg“설마 남으실 생각이십니까?”

16553302088858.jpg“…….”

아델이 답이 없자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16553302088894.jpg“그게 아니라면요?!”

16553302088858.jpg“…….”

16553302088894.jpg“명예를 잃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정말 이곳에서 죽기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16553302088894.jpg“카인!”

직설적인 언사에 기벨린이 성을 냈지만, 카인은 물러나지 않고 아델을 몰아붙였다.

16553302088894.jpg“왜 늘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인 것처럼 행동하십니까? 고트로프로 돌아가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니요, 고국의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6553302088858.jpg“카인.”

16553302088894.jpg“그러시잖아요?”

결국 그는 눈가가 붉어진 채 덜덜 떨리는 입술로 간절하게 애원했다.

16553302088894.jpg“돌아가요, 전하. 우리의 나라로. 전하께서 그토록 사랑했던 울창한 산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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