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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93/127)

93화.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2022.02.19.

아델은 카인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째서 그립지 않겠는가? 어느 한 자락 사랑하지 않은 곳이 없던 고국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런데 그때, 단단하고 단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16553302273611.jpg‘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그러졌던 것들을 바로잡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지쳐 잠든 남자의 고요한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맞닿았던 뜨거운 입술의 감촉마저 되살아나자 가슴이 크게 술렁였다. 그가 그녀에 약속하고, 해내고자 하는 일은 성공하면 혁명이나, 실패하면 반역이다. 그럼에도 리오넬 헤르베르트는 그녀를 후작저로 데려옴으로써 황제의 표적이 되기를 자처했다. 이제 황제가 대놓고 헤르베르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그의 처지는 더욱 위태로워지리라. 피 흘린 채 죽어 가는 리오넬의 모습에까지 상상이 미치자 아델은 번뜩 눈을 떴다. 그녀는 차마 카인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16553302273617.jpg“아직 할 일이 남았어.”

16553302273621.jpg“……무슨 할 일 말입니까.”

아델은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카인을 마주 보았다. 아름다운 녹음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친 바다를 건너 한달음에 달려와 준 이들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는 차마 리오넬을 남겨 두고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16553302273617.jpg“작금의 에흐몬트는 뿌리까지 썩었다. 마법사단을 장악한 황제가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지. 곧 혁명이 일어날 거야. 여기에 내 도움이 필요…….”

16553302273621.jpg“무슨 상관입니까.”

카인이 감히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따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16553302273621.jpg“전하. 전하께서는 이제 에흐몬트 황후가 아닌 고트로프 황녀이십니다. 에흐몬트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입니까. 혁명이라고요? 실패하면 반역이 아닙니까? 그런 위험한 일에 동참하신다고요? 진심이십니까?”

16553302273621.jpg“카인, 그만해라.”

보다 못한 기벨린이 흥분한 카인을 만류하며 아델을 향해 말했다.

16553302273621.jpg“전하.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카인이 무례하기는 했지만, 구구절절 옳지 않습니까? 더구나 반역에 가담하다 자칫 전하께서 잘못되기라도 하신다면…… 저 또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두 신하의 충정 어린 간언에, 애써 태연을 가장하던 아델의 눈동자가 텅 비어 갔다. 기벨린이 슬픔을 삭이는 사이,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카인이 품에서 고트로프 황제 루시오의 편지를 꺼내 아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말했다.

16553302273621.jpg“황제 폐하께서 전하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폐하께서는 저희에게 전하께서 불행하다면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고트로프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고트로프는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델은 카인에게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고작 종이일 뿐인데,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는지 손을 저절로 아래로 떨구어졌다. 한참 동안 침묵하며 편지를 바라보던 아델이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16553302273617.jpg“내게 생각할 시간을 줘.”

  * * * 아델은 응접실을 나와 홀로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새카맣게 어둠 속에 잠긴 복도가 꼭 그녀가 처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손에 쥔 루시오의 편지는 여전히 뜯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그녀의 방이 있는 복도에 다다랐을 때, 아델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어두운 복도를 우두커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응접실 앞을 서성이던 리오넬은 결국 몸을 돌렸다. 자꾸만 문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스스로가 못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저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방 앞이었다. 조금 전 이 방에서, 그녀와 숨을 나눴다. 부드럽고 뜨거운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을 때, 리오넬은 이것이 삶의 끝이라 하여도 좋다고 생각했다. 금붉게 타오르던 눈동자도, 그의 어깨를 감싸 안던 가느다란 팔도 모두 꿈만 같았다. 열락의 순간을 되짚던 사이, 그의 가슴 속 악마가 불쑥 입을 열었다.

16553302273611.jpg‘그분의 마음속에도 내가 있을까?’

사고처럼 튀어나온 질문에 리오넬의 눈이 커졌다. 그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대의를 내세워 이루려는 혁명도, 사실 궁극적 목표는 결코 정의롭지 않았다. 그의 깊숙한 곳에 꿈틀거리는 시뻘건 욕망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엄청난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 하나 그러면 어떠한가? 명예는 애초부터 그의 안중에 없었는데. 심지어 아델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그 스스로를 위해서다. 고작 계절이 두 번 바뀐 시간만큼의 인연에 그의 영혼은 그녀에게 온통 속박당했다. 리오넬은 아델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고트로프로 가지 않았으면 했다. 카인 녹스와 기벨린 루한……. 그녀가 절망에 차 간절히 부르짖을 만큼 신뢰하는 충신들의 방문이 못내 싫었다. 그녀가 믿고 의지하는 그들을 치졸하게 질투했다. 오지 말지……. 그녀가 고트로프로 갈 생각을 하지 않도록, 이곳에 오지 말지……. 리오넬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제 민낯을 마주하고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벽에 등과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시간의 걸음을 지켜보기를 한참,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어둑한 복도에 투명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도 리오넬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쿵, 또 심장이 내려앉듯 뛴다. * * * 어두워서 다행이다. 이 처참한 표정이 그에게 보이지 않을 테니. 아델은 어금니를 세게 물며 더욱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그를 외면한 채 방의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16553302273617.jpg“돌아가서 쉬시오, 후작.”

짧은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다급한 물음이 그녀의 발을 잡아챘다.

16553302273611.jpg“가실 겁니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어찌나 여린지 아델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 그를 마주 보고 말았다. 그는 차마 그녀에게 손조차 뻗지 못한 채 엉망이 된 표정으로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델이 대답하지 않자 리오넬은 간절함을 담아 애원했다. 그간 차마 털어놓지 못한 진심이었다.

16553302273611.jpg“이곳에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16553302273617.jpg“……나는 폐후요.”

황족이라는 신분은 그녀를 구속하는 올무이자 그녀를 뿌리내리게 하는 닻이었다. 평생 줄에 묶여 살아온 짐승이 목줄이 풀려도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듯, 아델 역시 제 등에 얹고 있던 신분의 무게에 늘 짓눌리면서도 그것 외의 삶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생에 단 한순간도 오롯이 ‘아델라이드’로 살아 본 적 없기에 이토록 거세게 흔들리는 것이리라. 그리고 리오넬은, 그런 그녀를 보며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이 긍지 높은 사람이 뿌리내릴 한 줌 흙이 되고 싶다. 닻이 되고 싶다. 쉼이 되고 싶다. 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16553302273611.jpg“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아델이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는 사이, 리오넬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16553302273617.jpg“후작!”

놀란 그녀가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리오넬은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16553302273611.jpg“헤르베르트의 모든 것을 가져 주십시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손에 쥐고, 늘 그러셨던 것처럼 당신께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마음껏 하십시오. 저를 도구로 사용하셔도 좋고, 발판으로, 때로는 방패막이로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16553302273617.jpg“……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요!”

16553302273611.jpg“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아델이 멍해진 사이, 리오넬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온 마음을 다 쏟아냈다.

16553302273611.jpg“저의 모든 것을 가져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눈물이 턱을 타고 방울방울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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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델은 그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소리 없이 방문이 닫혔다. * * *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온 아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16553302273611.jpg‘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황족이라는 이름이 떨어져 나간 영혼은 갓 태어난 생명처럼 굳은살 하나 없이 그저 연약했다. 제 모든 것을 가져 달라는 남자의 간절한 진심 앞에서 그녀의 연약한 영혼은 거칠게 흔들렸다. 아델은 눈을 꾹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스르르 힘이 빠진 손에서 편지가 미끄러졌다. 아델은 눈을 떠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구부려 편지를 들어 올렸다. 투박한 봉투를 뜯어내자 고급스러운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델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루시오의 편지를 펼쳤다. 편지의 첫 줄에는, 유려한 필체로 ‘사랑하는 누님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아델은 입술을 짓씹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16553302273621.jpg‘아델 누님!!’

차라리 루시오가 그녀를 경계했다면 죄책감이 덜했을까. 동생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에흐몬트로 떠나기 전, 아델은 마지막으로 루시오에게 남긴 편지에 제 안의 감정을 고스란히 적어 두고 왔다. 자기 때문에 누이가 떠났다고 자책할 동생을 염려해 일부러 더 냉정하게 쓴 편지였다. [……때때로 힘든 날이 오면, 나는 이유 없는 미움에 휩싸입니다.] 명석한 루시오가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되돌아온 답신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긴 편지를 읽어 내리던 아델의 눈에서 절로 흘러넘친 눈물이 볼을 타고 미끄러졌다. 마구잡이로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아델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누님.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은 누님의 안전과 행복입니다. 누님은 고트로프의 황녀로서 의무를 다하며 한순간도 누님 스스로를 위해 사신 적이 없잖습니까? 그리 가실 줄 알았다면 미리 말씀드릴 것을,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델은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누님, 혹시라도 누님이 그곳에서 불행하시다면, 명예니 체면이니…… 그런 것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누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고트로프의 황위라면, 그리하여 누님이 행복하실 것 같다면 저는 기꺼이 이 자리를 누님께 넘겨드릴 것입니다.] 홀로 걷는 길이라 생각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어린 루시오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 누이가 무엇으로 괴로워하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 누이의 곁을 지킨 것이다. [누님, 저는 진실로 누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황녀로서 고트로프를 위해 온 힘을 다하셨던 것처럼, 이번엔 누님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몰두하는 삶을 사세요. 그게 무엇이든 저는 누님을 도울 겁니다.] 아델은 루시오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시간이 서서히 멈췄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에 머물렀으나, 그녀의 영혼은 살아온 모든 순간을 되짚고 있었다.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과거의 잔상,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수만 갈래의 미래.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황족으로서 의무를 마땅히 다하며 친우들과 산야를 누비던 그 순간 모두가 찬란했다. 어린 동생과 손을 잡고 거닐던 순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삶의 모든 순간에서, 아델의 우선순위는 제가 아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고트로프의 황녀로서 지닌 권리만큼의 의무를 행해야 했다. 이름으로 주어진 권리와 의무를 목숨처럼 생각했다. 고집스레 붙들고 있던 그것들을 어쩔 수 없이 손에서 놓아 버렸던 날, 이제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깊은 구석에 숨겨 두었던 작은 함을 가져왔다. 그리고 함에서 죽음을 꺼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16553302273621.jpg“전하. 카인 녹스입니다.”

아델은 서둘러 함 뚜껑을 닫아 옆으로 치운 다음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16553302273617.jpg“들어와.”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익숙한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눈앞에서 문이 닫혔지만, 리오넬은 그녀를 부를 수도, 문을 두드릴 수도 없었다. 극으로 치달은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걸었다. 그녀는 그의 지옥이자 천국이었다. 삶이 이곳에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한 줄기 희망이 엉망으로 뒤섞여 그를 괴롭혔다. 복도 끝에 다다른 리오넬이 몸을 돌렸을 때, 온몸으로 날아와 박히는 날카로운 화살 비처럼 거친 살기를 품은 시선이 내리꽂혔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계단이 꺾어지는 중간 복도에서 카인 녹스가 리오넬을 죽일 듯 노려보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리오넬은 카인을 바라보며 긴 숨을 한 번 몰아쉬었을 뿐, 아델의 앞에서 무너질 것 같던 모습을 보인 게 언제였냐는 듯 조금도 물러섬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 계단, 한 계단 거침없이 내려간 리오넬이 어떤 말도 건네지 않은 채 몸을 트는 그 순간, 선득한 목소리가 리오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16553302273621.jpg“네놈이 감히 품어서는 안 될 만큼 고귀한 분이시니, 다시는 그 마음을 내보이지 마라.”

그 말에 멈춰 선 리오넬이 천천히 몸을 돌려 카인을 바라보았다. 두 남자의 날 선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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