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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카인의 청혼 (94/127)

94화. 카인의 청혼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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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어떻게 이자를 두고 여인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이토록 강렬하게 수컷의 향을 풍기는 사람이거늘. 리오넬을 카인이 아델에게 품은 감정 또한 저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다.

16553302396081.jpg“그 말, 나도 돌려줘야겠는데.”

리오넬이 삐딱하게 답하자 카인은 한 걸음 그에게 바짝 다가가 붙으며 으르렁거렸다.

16553302396085.jpg“너는 본 적이 있나? 그분이 고트로프 산야를 달릴 때 어떤 얼굴을 하시는지? 그분에겐 에흐몬트 따위 어울리지 않아. 뭐? 네 모든 것을 바쳐? 웃기지 마라. 고작 네가 가진 것으로 그분을 어떻게 만족시키겠다는 것이냐?”

16553302396081.jpg“…….”

16553302396085.jpg“나는, 반드시 전하와 함께 돌아갈 것이다.”

리오넬은 뭔가가 목에 걸린 듯 아무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카인의 말 중 그 어느 것도 되받아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리오넬이 침묵하는 사이, 카인은 당장이라도 이 집에서 아델을 데리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를 지나쳐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 * * 곧장 아델의 방에 도착한 카인은 문가에 서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결국 아델이 입을 열었다.

16553302396097.jpg“피곤할 텐데 쉬지 않고.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

16553302396085.jpg“……돌아가실 것이지요?”

물으면서도 카인의 심장이 쿵쿵 세게 뛰었다. 다시 만난 그녀는 어딘가 낯설게 변해 있었다. 반년 전 만 해도 그와 함께 산야를 누비던 그녀가, 고작 반년 만에. 아니나 다를까, 아델은 쉬이 답하지 않았다. 정말 이 모든 변화가 그녀가 몸을 의탁하고 있는 그 남자로 말미암은 것일까? 카인은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16553302396085.jpg“저를 찾아 대나무 숲에 오셨던 날, 기억하십니까?”

16553302396097.jpg‘내가 너와 함께 가꾸어 갈 넓은 세상을 보여 줄게. 그러니 이 좁은 곳에서 나가자.’

  아주 가볍게 그를 압도하던 소녀.  

16553302396097.jpg‘내가 끝까지 책임져 줄 테니까, 나랑 함께 가.’

16553302396085.jpg“저를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저는 그 말을 믿고, 전하를 따라갔습니다.”

열셋의 소녀는 잊어버렸으나, 열넷의 소년은 가슴에 새긴 말이었다.

16553302396085.jpg“국혼에 응하신다고 했을 때도 창자를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저는 결국 전하의 뜻을 받들었습니다. 전하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분이셨으니까요.”

카인의 눈에서 눈물이 고일 새도 없이 흘러내렸다.

16553302396085.jpg“한데, 아무리 그래도 전하를 폐위시킨 에흐몬트에 남겠다고 하시는 것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16553302396097.jpg“…….”

16553302396085.jpg“돌아가요, 전하. 녹스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저와 함께 고트로프의 산야를 다시 달려요.”

카인이 운다. 그녀의 과거가 울고 있다. 아델은 오랜 친우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에게 바친 신의와 사랑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델은 그를 감싸안았던 손을 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16553302396097.jpg“카인. 폐위되던 날, 나는 죽으려 했다.”

그리고 놀라 커진 눈으로 그녀를 보는 카인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16553302396097.jpg“그때 내가 왜 죽지 않았는지, 나를 되돌아보는 중이야.”

16553302396085.jpg“…….”

16553302396097.jpg“좀 더 시간을 줘.”

16553302396085.jpg“……기다리겠습니다.”

카인은 눈물 맺힌 얼굴로 아델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그리고 아델의 방문에 기대 선 채 입술을 짓씹었다. * * * 카인에게 시간을 달라 말했으나, 그와 대화를 나누며 아델은 마음을 굳혔다. 왜 죽지 않았나? 많은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죽음을 입술 끝에 대던 순간 떠오른 이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아델은 함에서 극약을 꺼낸 뒤 망설임 없이 그것을 버렸다. 혼란으로 일렁이던 눈빛은 다시 또렷해지고, 얼굴에 자욱하던 물기는 모두 말라 버렸다. 아델은 성큼성큼 책상으로 가서 하던 작업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수만 갈래의 미래 중,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과거의 인연이 그녀를 애달프게 붙잡았으나, 마지막 보루라 생각했던 죽음을 버리게 만든 이는 미안하게도 그가 아니었다. 글을 적어 내리는 그녀의 눈빛이 그 어느 순간보다도 단단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달이 완전히 기울어 서쪽으로 사라지고 빛이 어슴푸레하게 세상을 메우기 시작할 무렵. 아델은 모든 작업을 끝마쳤다. 그녀는 그것을 가지런하게 정리한 뒤 희뿌연 새벽빛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보였다. 언젠가 후회하는 날이 올지 모르겠으나, 그것 또한 원하는 길을 걸어 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때,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긱스 부인이 책상맡에 앉아 있는 아델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16553302451659.jpg“밤을 지새우셨군요.”

16553302396097.jpg“괜찮소.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으니.”

16553302451659.jpg“……삶을 놓지 않기로 정하신 것이지요?”

아델은 노부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긱스 부인은 그제야 안심한 듯 주름진 얼굴을 휘어 웃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16553302451659.jpg“예, 그럼 됐습니다.”

16553302396097.jpg“고마웠소. 내가 이곳에 와서 부인 덕을 참 많이 보았소.”

16553302451659.jpg“……고트로프로 가시겠다 마음먹으셨나 보군요.”

16553302396097.jpg“일단은.”

일단이라? 긱스 부인은 아델의 말에서 의아함을 느꼈으나, 더 묻지 않았다. * * * 한편 그 무렵, 좀처럼 잠들지 못하던 데스포네 공작은 며칠 만에 얼굴을 비춘 레녹스에게 있는 대로 화를 내고 있었다.

16553302451697.jpg“이런 머저리 같은 자식!! 너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 이제야 기어 오는 거야?!”

레녹스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지만, 공작은 온갖 폭언을 퍼부은 뒤에야 숨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16553302451697.jpg“잘 들어라, 레녹스. 귀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레녹스는 눈을 빛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16553302451697.jpg“머저리 같은 황제 놈이 온통 그 계집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엘리자베타와 발드르가 귀족을 모으고 있다.”

데스포네 공작은 머릿속으로 탑의 지도를 되짚으며 말을 이었다.

16553302451697.jpg“그간 발드르를 몰아붙이느라 기사 놈들을 챙기지 못한 것이 패착이지……. 하지만 괜찮다. 곧 수도에 탑이 내려올 때가 되었으니까.”

16553302472215.jpg“수도에 탑이 내려온단 말씀이십니까?”

16553302451697.jpg“그래. 대형 탑이 내려올 것이다. 지난번처럼 황궁으로 곧장 내려오면 곤란하겠지만, 그래도 그 김에 반역을 꿈꾸고 있는 것들을 한꺼번에 쓸어 버릴 수 있겠지.”

이왕이면 수도에서 적당히 거리가 있는 곳에 딱 내려와 주면 좋을 텐데. 데스포네 공작은 눈을 빛내며 레녹스를 바라보았다.

16553302451697.jpg“수도에 탑이 내려오는 날, 그랜드와 발드르, 그리고 헤르베르트를 모두 뿌리 뽑을 것이다. 그놈들을 상대할 마법사들을 미리 추려 놓아라. 그 세 놈만 없어지면, 감히 동참했던 잔챙이들도 알아서 몸을 사리겠지.”

레녹스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3302472215.jpg“예, 알겠습니다.”

16553302451697.jpg“어서 준비해라, 레녹스. 얼마 남지 않았어.”

속삭이는 음성엔 짙은 탐욕과 광기가 흠뻑 묻어 있었다. * * * 데스포네 공작이 물밑작업에 한창인 그때. 황제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의 모든 신경은 여전히 아델라이드에게 쏠려 있었다.

16553302396085.jpg“고트로프 황녀께서는 여전히 헤르베르트 후작저에 머물고 계신 듯합니다.”

시종은 똑같은 말을 벌써 여섯 번이나 반복하는 중이었다. 황제가 답이 없자 시종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16553302396085.jpg“다시 한번 확인할까요?”

16553302472247.jpg“…….”

16553302396085.jpg“……폐하?”

16553302472247.jpg“황후를 만나야겠다.”

시종은 질린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집착이었다.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원래도 갸름하던 턱이 베일 듯 더 날카로워졌다.

16553302472247.jpg“웃옷을 가져와라. 지금 당장 헤르베르트 후작저로 갈 것이니.”

  * * * 기벨린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카인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기벨린은 애초에 카인이 아델을 찾아가는 것을 반대했었다. 아델이 잘살고 있어도 녀석의 상사병은 깊어질 것이고, 불행해 보인다면 그것 또한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기벨린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16553302396085.jpg“도대체 얼마나 썩어 문드러진 작자이기에 우리 전하께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다 하셨을까? 에흐몬트의 황제 말이야.”

기벨린의 중얼거림에도 카인은 답하지 않았다.

16553302396085.jpg“카인. 너무 심려치 마라. 전하께서는 고트로프로 가실 거다. 황녀 신분으로 타국의 일에 너무 깊숙하게 개입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전하께서 모르실 리가 없지 않나.”

16553302396085.jpg“…….”

그때, 갑작스레 창밖이 묘하게 어수선해졌다. 기벨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회색빛 새벽, 흐릿하던 사물의 윤곽이 서서히 선명해지는 시간. 한 남자가 후작저를 향해 뛰듯 걸어오고 있었다. 시종으로 보이는 몇몇이 남자의 뒤를 잰걸음으로 따르고, 후작저의 집사가 난감한 얼굴로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남자의 차림새를 확인한 기벨린의 어깨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기벨린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16553302396085.jpg“에흐몬트 황제가 온 거 같은데.”

그 말에 앉아 있던 카인이 벌떡 일어나 바람처럼 달려왔다. 후작저 정원을 마치 제집처럼 당당하게 가로지르는 남자는 누가 봐도 황제였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저자가 아델을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짐가방을 펼친 다음, 고트로프식 정복을 꺼내 빠르게 갈아입은 뒤 아델이 머무는 방으로 달려갔다. 더는 아델 홀로 수모를 당하게 두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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