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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무너지는 카를 (95/127)

95화. 무너지는 카를2022.02.26.

단정한 저택의 정문을 거침없이 통과하던 카를은, 빠르게 울려 퍼지는 구둣발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택의 주인인 리오넬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를 보자 배 속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당장이라도 저자를 잔인하게 죽여 버리고만 싶었다. 황제의 흉포한 기세에 따라왔던 시종들조차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카를은 리오넬을 노려보며 후작저 집사에게 명령했다.

16553302566085.jpg“고트로프 황녀가 머무는 방으로 안내해라.”

제아무리 황제라 한들 이 시간에 예고도 없이 방문한 것으로 모자라 타국의 황녀가 머무는 방으로 안내하라니? 집사가 난감한 얼굴로 제 주인을 쳐다보자 어느새 성큼 다가온 리오넬이 황제에게 가볍게 묵례한 다음, 단호히 말했다.

1655330256609.jpg“해도 뜨지 않은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일단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16553302566085.jpg“그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1655330256609.jpg“그럴 수는 없습니다.”

격분한 황제가 리오넬의 멱살을 확 움켜쥐었다. 주위에 있던 이들 모두 놀라 숨을 들이켰으나, 정작 리오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16553302566085.jpg“감히 그 여자를 네놈 집에 꼭꼭 숨겨 두고 뭘 어쩌려고? 감히 나에게 그럴 수는 없어!!”

1655330256609.jpg“황제 폐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16553302566085.jpg“뭐라?!!!”

붉게 물든 눈동자, 흉포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 황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때, 낭랑한 음성이 리오넬과 카를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16553302566119.jpg“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에 카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계단 끝에 선 아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오넬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졌다. 카를은 리오넬을 지나쳐 비척비척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16553302566119.jpg“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무작정 계단을 올라 중간 정도에 다다랐을 무렵, 카를은 홀로인 줄 알았던 아델의 등 뒤에 못 보던 사내 둘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를은 멈칫하며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국적인 의복을 갖춘 그들은 틀림없이 고트로프 사람들이었다. 카인과 기벨린은 포악한 기색이 가득한 황제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아델을 지키듯 양옆에 섰다. 카를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냉담한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그의 마음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카를은 이곳이 어디라는 것도 잊은 채 아델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3302566085.jpg“내가…… 내가, 잘못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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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3302566085.jpg“그대를 그렇게 폐위시킨 것을 후회해.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제발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황제의 모습을 주시하던 많은 이가 소리 없이 탄식했다. 아델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했다.

16553302566119.jpg“저는 제 폐위를 받아들였습니다. 폐위 사유는 정당했고, 반론의 여지가 없지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후회하실 것이 없습니다.”

16553302566085.jpg“아니, 제발 그런 말 하지 말고……. 내 그대가 하라는 일은 뭐든 할 터이니…….”

16553302566119.jpg“에흐몬트 황제 폐하.”

눈앞에 저 남자의 끝도 없는 집착에 진절머리가 났다. 지금 저자의 말과 행동은 제국의 군주라기보다는 장난감을 빼앗겨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이곳은 밀폐된 공간도 아니지 않은가. 황제를 따라온 시종들과 후작저의 사용인들의 숨죽인 시선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일평생 황족으로서의 긍지를 지키며 고귀하게 살아온 아델이 보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태였다.

16553302566119.jpg“저는 제 처분을 받아들였고, 더는 에흐몬트의 황후가 아닌 바. 에흐몬트 황제 폐하를 뵐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니, 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마십시오.”

아델은 다시 한번 그와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고 한 줌 미련도 남지 않은 모습으로 몸을 돌렸다. 엄연한 무례였으나, 먼저 예법을 어긴 쪽은 황제였기에 누구도 그녀의 태도를 비난할 수 없었다. 카를은 아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불렀다.

16553302566085.jpg“아델라이드!!!”

당장 그녀를 쫓아가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카인과 기벨린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카를은 두 사람을 분개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16553302566085.jpg“당장 비켜라!”

16553302583625.jpg“저는 고트로프 녹스 가문의 수장인 카인 녹스입니다. 저분은 고트로프의 황녀 전하이시며, 고트로프의 신하인 저는 황녀 전하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여 비킬 수 없습니다.”

16553302566085.jpg“당장 비켜!!!”

16553302583625.jpg“비킬 수 없습니다.”

카인과 기벨린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카를은 멀어지는 아델의 뒷모습을 벌게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 진짜 끝이구나. 진짜 인연이 끝났구나. 죽음 같은 절망이 독처럼 서서히 퍼졌다. 카를은 휘청이다가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16553302583625.jpg“황제 폐하!!”

따라온 시종들이 그 모습에 놀라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라 있는 힘껏 황제를 부축하여 일으켰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카를의 시선은 아델이 사라진 자리를 헤매고 있었다.

16553302566085.jpg“아델라이드!!!!”

그의 비명 같은 외침이 후작저를 뒤흔들었다. 리오넬은 무너지는 카를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앞으로 진행할 혁명을 찬찬히 되짚었다. 카를 울리히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더는 에흐몬트를 맡길 수 없다. * * * 한편, 엘리자베타도 잠들지 못하고 밤새 서류를 살폈다. 고작 이틀 만에 수도 귀족의 7할 이상이 그녀와 손을 잡았고, 기사 가문은 전원 응했다. 오랜 기간 쌓인 울분이 폭발하기 시작하니, 그 속도가 마른 들에 번지는 불보다 빨랐다. 엘리자베타는 거사를 이틀 뒤, 중신 회의 날로 정했다. 리오넬의 소개로 만난 브룬힐 알렉사가 탑이 곧 내려올 것이라 확언했으니, 이 계획을 더 늦출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면 발드르 공작과 귀족들에게 그녀의 인장이 찍힌 서류가 전해질 것이다. 정말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셈이다. 리오넬의 제안대로 혁명을 준비하면서도 때때로 엘리자베타의 머릿속에는 홀로 덩그러니 남은 소년이 아른거렸다. 카를이 데스포네 공작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은 사실 그녀 때문이 아닌가? 어머니에게 이복동생이 학대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과거의 죄가 그녀의 마음을 자꾸만 옥죄었다. 밤새 고민하던 엘리자베타는 결국 이른 아침 황궁으로 향했다. 거사를 진행하기 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소 이른 시간이었으나, 황궁 문지기는 엘리자베타의 방문에 문을 열어 주었다. 엘리자베타는 창백한 황궁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이윽고 황제궁이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그녀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저 궁 입구에서 우두커니 홀로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배에 힘을 단단히 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엘리자베타는 황제를 금방 만날 수 있었다. 황제는 집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새벽녘 헤르베르트 후작저를 다녀온 차림 그대로였다. 시종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서던 엘리자베타는 황제의 몰골에 숨을 멈추었다.

16553302605836.jpg“……폐하.”

그의 혼탁한 눈빛엔 황제로서의 위엄도, 이지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16553302605836.jpg“……왜 이러고 계신 겁니까?”

16553302566085.jpg“…….”

16553302605836.jpg“폐하!”

정신 차리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엘리자베타에게 황제가 불쑥 명령했다.

16553302566085.jpg“이 자리를 누이에게 줄 테니, 나에게 아델라이드만 데려오시오.”

어린 시절의 죄책감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왔건만. 엘리자베타는 결국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16553302605836.jpg“폐하의 손으로 직접 그녀를 폐위시켜 놓고 말입니까?”

16553302566085.jpg“하도 나를 밀어내기에, 내가 없으면 낭떠러지뿐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그 말에 엘리자베타의 눈빛에 노기가 섞여들었다.

16553302605836.jpg‘도대체 황제라는 자가! 지금껏 이따위 인간을 황제로 모시었던가?!’

엘리자베타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단호히 말했다.

16553302605836.jpg“데스포네 공작은 제국은 안중에 없고 제 잇속만 챙기는 자입니다. 그자가 제국 전역에 탑을 세우려고 합니다. 폐하의 백성은 그자의 욕심으로 인해 하루…….”

16553302566085.jpg“그녀만 데려오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소.”

엘리자베타는 치미는 욕을 누르며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16553302605836.jpg“……그자의 욕심으로 인해 하루하루 말라 죽…….”

16553302566085.jpg“아델라이드만 데려오라니까.”

16553302605836.jpg“……폐하에게 에흐몬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16553302566085.jpg“…….”

엘리자베타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년의 잔상을 좇아 온 길이었건만, 그의 영혼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되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죄책감과 슬픔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빛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옅어졌다. 동시에 다짐은 더욱 굳어졌다. 황제궁 입구. 과거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빛에 슬픔이 가득했다. 엘리자베타는 소년을 마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16553302605836.jpg‘미안했다. 그리고 미안하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이유로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엘리자베타의 눈매가 단단해지자, 소년의 얼굴이 서서히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문을 박차고 나왔다. * * * 디안은 밤새 아이의 옷을 매만졌다. 처음부터 없었다는데, 마치 진정 아이를 잃은 것만 같은 상실감이 몰아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지독한 상실감을 나눌 사람이 한 명 없는 처지도 그녀를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새벽녘에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로레인이 없었다. 디안의 보석들도 함께. 몇 년의 인연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

16553302624263.jpg“하하…….”

디안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16553302624263.jpg“그래, 어디 너뿐이겠니? 그 사람에게 이 상아궁은 쓰레기통이었으니…… 차라리 네가 낫구나, 로레인.”

로레인을 찾아 벌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거니와, 이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디안은 그저 침대에 홀로 덩그러니 누웠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다가, 문득 아주 오랜 옛날 엄마가 불러 주던 노래를 조용히 흥얼거렸다. 엄마의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목소리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16553302583625.jpg‘우리 딸, 잘 잤어?’

   사랑받았던 것 같다.  

16553302583625.jpg‘사랑해.’

  아니, 사랑받았었다. 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기어이 다시 넘쳐 귓구멍으로 흘러들었다. 흥얼거리던 노랫소리가 뚝 끊겼다. 레녹스의 말처럼,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마수의 공격에 죽어 가는 와중에도, 아빠는 그녀를 향해 외쳤다.  

16553302583625.jpg‘어서 도망가!’

  그제야 디안은 처음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16553302624263.jpg“……그렇게 살려 주신 목숨인데…… 내가 날…… 너무 하찮게 대해서 죄송해요.”

당신들 딸인 내가, 비천할 리 없는데. 내가 날 조금만 더 사랑했더라면, 소중하게 여겼더라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는 않았을 텐데.

16553302624263.jpg“그래서…… 용서할 수가 없어. 도저히.”

디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금고에서 작은 약병 두 개를 꺼냈다. 약병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섬뜩하리만치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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