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사랑해요2022.03.01.
황제는 그 후로도 아델의 이름을 한참이나 부르짖다가 돌아갔다. 아니, 시종들의 손에 떠밀려 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긱스 부인이 이를 알리러 찾아갔을 때, 아델은 밤새 작성한 서류를 마지막으로 검토하던 중이었다.
“아, 부인.”
고개를 든 얼굴은 초연했다. 황제가 돌아갔음을 고하려던 긱스 부인은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그저 싱긋 웃으며 물었다.
“필요한 것은 없으신지요?”
그에 아델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헤르베르트 후작을 불러 주시겠소?”
“예, 알겠습니다.”
긱스 부인이 나간 사이, 아델은 차분히 앞날을 그려 보았다. 이것이 맞나, 과연 옳은 선택인가, 그리해도 될 것인가. 온갖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담담한 얼굴과는 달리, 책상 아래 감춰진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잠시 후, 누군가 정중하면서도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아델이 자리에서 막 일어서는 순간 문이 열렸다. 정말 급하게 달려왔는지 그는 어딘가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저 남자는 늘 그랬다. 그녀가 부르면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 맹목적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덮쳐 오던 두려움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뻐근해져서 아델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리오넬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소는 늘 혼을 빼놓을 만큼 화려하여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지만, 지금은 새벽처럼 아스라하고 수수한 느낌마저 풍겼다. 그녀는 아주 가볍고 가뿐해 보였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리오넬은 도저히 아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눈을 내리깔았다. 새벽녘 불청객처럼 들이닥친 황제가 아델에게 다가가 윽박지를 때, 그 곁을 당당하게 지킨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저는 고트로프 녹스 가문의 수장인 카인 녹스입니다. 저분은 고트로프의 황녀 전하이시며, 고트로프의 신하인 저는 황녀 전하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여 비킬 수 없습니다.’
계단 아래에서 그들의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던 리오넬은 지독한 패배감에 몸서리쳤다. 그간 보좌관으로 그녀의 지척에 있었으면서도 어느 한순간도 카인 녹스처럼 당당히 그녀의 옆자리를 지킨 적이 없었다. 우습게도 그것이 새삼 가슴 아팠다. 그때였다.
“헤르베르트 후작.”
서늘하고 낮은 음성에 리오넬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이리로.”
아델은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신중히 생각을 정리하였으나, 막상 말하려고 하니 가슴이 요동쳤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아델은 들고 있던 서류를 리오넬 쪽으로 내밀었다.
“어젯밤 작성하던 마법적 지식을 다 정리했소.”
리오넬의 시선은 그녀가 내민 서류에 못 박혀 있었다. 아델은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리오넬의 얼굴을 응시했다.
“혁명은 언제 일으킬 생각이오?”
리오넬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대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빠를수록 좋소.”
“그랜드 공께서 연락을 주실 것입니다만, 아마도 내일 중신 회의를 기점으로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상보다도 훨씬 급박한 전개에 아델마저 눈을 크게 떴다.
“해서 황녀님께서 머무실 수 있도록 수도 밖에 별장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고트로프에서 온 이들과 함께 오늘 그곳으로 이동하시지요.”
폐위된 뒤, 아델은 고트로프의 황녀이자 귀빈의 신분으로 에흐몬트에 머물고 있었다. 타국의 황녀로서 이 일에 휘말린다면, 결과와는 상관없이 큰 곤욕을 치르게 되리라. 리오넬은 아델이 혁명에 휘말리지 않도록 가장 먼저 이것을 신경 썼다. 아델은 말없이 리오넬을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난 그곳으로 가지 않을 거요.”
리오넬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지만, 아델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 고트로프로 갈 것이오.”
그의 눈가가 삽시간에 붉어졌다. 턱이 애처로울 정도로 덜덜 떨리며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지 입만 벙끗거렸다. 마치 하늘이 무너진 사람처럼 위태롭게 떨고 있는 그를 향해 아델은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가 없었소.”
‘아닙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라고 말해야 옳지만, 리오넬은 차마 답하지 못했다. 한데 아델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고트로프에서 적법한 절차를 마친 다음, 다시 돌아와 그대를 가질 것이오.”
순간, 리오넬은 벼락을 맞은 듯 얼어붙었다. 그가 정말 제대로 들은 것이 맞을까? 맞다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 찰나의 순간 리오넬은 수십 번도 더 그녀의 말을 되짚었지만, 그러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멍하니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연신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 얼굴이 은은하게 달아오르고, 한쪽만 드러난 동그란 귓바퀴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큰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한 심장에서부터 뜨거운 피가 온몸으로 내달렸다. 리오넬은 전율하며 아델에게 성큼 다가갔다. 거칠게 맥동하는 심장 소리가 그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오자 아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한 채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가진다니, 말이 헛나왔소. 그게 아니라 나는…….”
리오넬은 참을 수가 없어서 속삭였다.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아델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헤르베르트 후작.”
“그게 아니라, 제 이름…… 제 이름 말입니다.”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에 아델이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동시에 숨을 삼켰다. 그가 울면서 웃는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푸른 바다에서 넘실거리는 감정이 공기를 타고 아델에게 전해졌다. 아델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입술을 벌렸다.
“리오…….”
그러나 그녀가 다 부르기도 전에, 그의 이름은 서로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부서져 입속으로 흘러들었다. 격정을 이기지 못한 리오넬이 고개를 기울여 숨이 급한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삼킨 탓이다. 섞이는 숨이 달아서 미칠 것 같았다. 탐욕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삼킬수록 더 심해져만 가는 목마름에 리오넬은 저도 모르게 아델을 몰아붙였다. 아찔한 감각에 정신이 혼미해진 사이, 뒤로 밀려난 그녀의 등에 책상이 닿았다.
그가 그녀의 뒷머리를 끌어안고 그녀에게로 온통 쏟아져 내렸다. 책상 위의 깃펜들이 나뒹굴고, 잉크병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으나 서로의 숨에 취한 두 사람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를 탐하고 또 탐하다가, 리오넬은 문득 그녀의 뺨이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그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델은 황족으로서의 품위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런 그녀를 짐승처럼 몰아붙였다니. 그는 저 자신을 후려치고만 싶었다. 리오넬이 입술을 깨물며 죄책감을 삼키는 그때, 그녀가 작게 입을 열었다.
“죽지 마.”
“…….”
“죽지 마, 다치지도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델은 책상 위에 누운 채, 그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리오넬은 먹먹한 표정으로 그녀를 천천히 일으켜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작은 새처럼 품 안에 함빡 들어오는 가느다란 몸이 마치 제 심장 같았다. 그녀가 기댄 옷깃이 서서히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가슴 위로도 벅찬 감동이 번져 왔다. 리오넬은 제 품에 안겨 있는 아델의 머리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여태 가슴 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말을 조심스레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나른하게 기대어 있던 작은 몸이 살짝 굳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를 밀어 내지 않았다. 리오넬은 긴장한 어깨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사랑해요.”
황량한 겨울을 이겨 낸 여린 새싹처럼, 그가 속삭이는 사랑이 아델의 가슴에서 피어났다. 아델은 격동하는 그의 심장에 귀를 대고 천천히 웃었다.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커다란 손길이 서툴지만, 그래서 사랑스럽다. 세상에서 가장 여린 새처럼 보호를 받는 기분도 썩 나쁘지는 않구나. 그런 생각마저 들 무렵. 리오넬이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속삭였다.
“혹여 돌아오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아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나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끝이 아닌지,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가 더 흘러나왔다.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계시든, 무엇을 하고자 하시든, 저는 그저 당신만 있으면 되니 그저 당신의 옆자리만 제게 허락해 주십시오.”
리오넬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미칠 것처럼 달콤한 향내가 폐부에 끼쳐 들자,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쯤에서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품에서 떼어 놓기가 싫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혁명도, 에흐몬트도 모두 버리고 이대로 그녀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때, 그녀가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리오넬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자,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그녀가 있었다. 아델이 서서히 다가와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난만한 장미 같은 입술이 그의 입가에 닿은 채 살짝 벌어졌다.
“그걸 위해 가는 거야. 그대 옆에 내가 있으려고.”
녹을 듯 달콤한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리오넬은 아델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그는, 반드시 살아남아 이 사람의 곁에 설 것이다. * * * 꿈처럼 달콤한 시간도 잠시, 리오넬은 당장 눈앞에 주어진 무수히 많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아델을 남겨 둔 채 천근처럼 느껴지는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리오넬이 후작저를 나서자 아델도 카인과 기벨린을 불렀다. 고트로프로 돌아가겠다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벨린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예, 전하! 지금 당장 이 나라에서 떠납시다!”
생각할수록 분했다.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지만, 새벽같이 타국의 황녀를 찾아와서 감히 귀빈이 머무는 방으로 안내하라니?! 게다가 협박이라도 하듯 아델에게 그 잘난 얼굴을 들이밀 때는 말 그대로 짐짝처럼 들어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었다.
“지금 당장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돌아가자.”
아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기벨린이 기다렸다는 듯 방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카인은 침묵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델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카인?”
카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서린 감정은 원망 같기도 했고, 슬픔 같기도 했다. 아델이 침묵하는 사이, 카인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면, 저와 혼인해 주십시오.”
“안 돼.”
이번이 처음도 아니건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거절이 새삼 쓰리고 슬프다. 카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호소했다.
“결혼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고트로프에서 편히 머무실 수 있도록 녹스의 이름만 가지세요. 간간이 탑 대항기구를 지원하며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살면, 전하께서 그토록 두려워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제가…… 온 힘을 다해 막을 테니…….”
“카인.”
“그러니 전하, 돌아가면…….”
“울지 마. 네가 울면 내 마음이 아프다.”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카인은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서러운 감정을 눈물로 쏟아냈다. 수려한 남자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반짝였지만, 아델은 쉽사리 그의 뺨을 쓸어 줄 수 없었다. 어설픈 위로는, 때로는 칼날보다 잔인해질 수 있으므로. 아델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늘 말했듯 너는 내게 형제와 같은 이다.”
“전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넌 그럴지 모르지만 난 그래.”
“…….”
“그래서 난 너와 혼인할 수 없어.”
“…….”
“이제 돌아가자. 준비해.”
잔인해. 당신은 참 잔인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서, 진정 잔인하다. 카인은 젖은 눈으로 아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기 직전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죽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는 찾으셨습니까?”
떠보듯 물어본 주제에 긴장하여 가슴이 술렁였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등 뒤에서 느릿하게 답이 들려왔다.
“찾았어.”
카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아델을 바라보았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선명한 금안, 꽉 다문 붉은 입술. 그녀는 그대로였다. 카인이 꿈에서조차 그리던 모습 그대로. 한데, 뭔가 달랐다. 분명 뭔가가 달라졌다. 그가 알던 그녀가 맞는데도, 낯선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설마, 리오넬 헤르베르트. 그자의 이름을 말씀하실까? 한데 담담하게 튀어나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아델라이드.”
카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