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데스포네 공작의 웃음2022.03.05.
아델은 긱스 부인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긱스 부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제가 꾸린 짐을 세세하게 설명하며 몸조심하라는 당부를 거듭했다.
“그러니 꼭 여러 번 씹어 삼키시고, 한낮에도 목에 바람이 들지 않도록 하시고…….”
“고마웠소, 부인.”
잔소리를 고분고분하게 듣던 아델이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자 노부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코끝이 시큰해졌으나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울면 부정 타는 법이라 되뇌며 눈물을 참았다. 대신 아델의 등을 마주 끌어안고 다정하게 토닥였다.
“조심히 가십시오.”
아델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힘주어 마주 안은 다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름진 노부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또 봅시다.”
그때, 엘리자베타가 후작저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아델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를 뒤로하고 곧장 헤르베르트 후작저로 달려온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를 만나고 싶던 참이라 아델은 반가운 표정으로 엘리자베타를 맞이했다. 엘리자베타는 한참 말없이 아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델, 당신이 걸어온 삶이 날 깨웠어요. 그간 에흐몬트의 황녀로서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더군요.”
그러고는 아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래서 꼭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날 일깨워 줘서 고맙다고.”
“스스로 눈을 뜨신 것이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아델의 화답에 엘리자베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단단하고 현명한 빛을 띠는 자색 눈동자가 황제의 그것과 닮은 듯 달랐다. 아델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꼭 성공하시길.”
엘리자베타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이제는 멈출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으니 빠르게 밀어붙여 승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주고받은 두 여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또 봐요.”
“그럴 겁니다.”
마주 보는 금빛 눈동자와 자색 눈동자가 결의로 빛났다, * * *
“안 돼!!! 이거 놔라, 당장 놔!!!!”
카를은 제 팔을 부여잡는 시종들에게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시종들을 밀치며 무작정 궁을 박차고 나가 절규하듯 아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가지 마, 아델라이드!!!!”
야차 같은 모습으로 정문으로 달려가려는 황제를 말리느라 전속 시종들이 쩔쩔맸다.
“내 황후가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가겠다고!!!!”
어린아이처럼 무작정 외치는 황제의 외침에 말단 사용인들마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기 손으로 폐위시키셔 놓고 이 무슨…….”
기사들뿐 아니라 입궁한 귀족들까지 황제의 추태를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어린아이처럼 아델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짖는 카를에게선 황제로서의 위엄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데스포네 공작이 나타났다. 실성한 듯한 황제의 모습을 본 공작의 두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공작이 함께 왔던 호위들에게 싸늘하게 명했다.
“당장 폐하를 궁 내부로 모셔라.”
덩치가 큰 호위들이 서둘러 황제에게 달려가자 전속 시종들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말고 비켜!!!”
황제가 거세게 반발하자 호위들이 난감한 듯 데스포네 공작을 쳐다보았다. 공작은 혀를 차며 카를에게 다가갔다.
“폐하, 이만 집무실로 돌아가시지요.”
“공작, 지금 빨리 가서 황후를 데려오시오.”
“집무실로 돌아가십시오.”
“지금 그 여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잖아!!!! 서두르지 않으면 영영 가 버린다고!!!!”
좀처럼 말이 통하지 않자 데스포네 공작이 짜증스레 호위들에게 눈짓했다. 결국, 호위들이 황제의 양팔을 붙잡고 연행하다시피 끌어당겼다.
“이거 안 놔?!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광분한 황제가 소리쳤으나, 데스포네 공작이 버티고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황궁의 모두가 건장한 호위들에게 붙들린 채 마치 죄수처럼 질질 끌려가는 황제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아델라이드!!!!”
집착과 애증이 엉망으로 뒤엉킨 목소리가 을씨년스럽게 황궁에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신도 지옥을 헤매고 있나 보네요.”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안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버림받고 비참하게 발광하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나 예민하고 고고하시어 그 누구에게도 마음 주지 않을 것 같으시더니. 꼭 그런 건 아니셨던 모양이에요, 폐하.”
메아리치는 폐후의 이름을 들으며 디안은 씁쓸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리며 습관처럼 제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리깐 눈동자에 해소되지 못한 울분이 차올랐다. 카를 에흐몬트 울리히는 분명 지옥을 전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폐후로 인한 것일 뿐, 디안의 지분은 조금도 없지 않은가? 디안 푸아티에는 늘 카를에게 떠밀려 불구덩이 나락을 헤매었는데. 디안은 걸음을 옮기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녀의 인생을 쓰레기통 취급한 이들에게 그녀가 겪은 고통을 모두 되돌려 주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도 지옥을 선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 * * 긱스 부인이 몇 번이나 세심한 손길로 망토를 여며 준 덕에 한 줄기의 바람도 아델의 품을 파고들지 못했다. 카인과 기벨린에 이어, 아델도 마지막으로 말에 올랐다. 대기 중이던 호위 기사들까지 준비를 마치자, 말들이 앞발을 구르며 푸르릉거렸다. 아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긱스 부인과 집사가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황량하고 차가웠다. 아델은 텅 비어 공허한 하늘을 응시하며 간절히 빌었다.
‘부디 혁명이 성공할 때까진, 탑이 내려오지 않기를.’
그때, 기벨린이 아델을 불렀다.
“전하.”
아델은 들었던 고개를 바로 하며 고삐를 잡았다.
“가자.”
후작저의 정문이 커다란 입을 벌리자 따뜻한 바람이 훅, 끼쳐 들었다. 분명 처음엔 날카로운 냉기를 머금었을 찬 바람이 사람들 틈을 스쳐 오며 훈훈해질 만큼, 수많은 인파가 수도 외곽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군집해 있었다. 에흐몬트를 떠나는 아델을 배웅하기 위하여. 카인과 기벨린마저 얼떨떨한 눈으로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소리 없이 일렁이는 물결 같았다. 스쳐 지나가는 아델을 향해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눈으로 안녕을 고하며 묵례를 올렸다. 아델은 그들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살처럼, 몰려나온 사람들이 빛나고 있었다. 에흐몬트 황후로서의 몇 달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리라. 아델은 눈물 젖은 얼굴들 사이에서 문득 붉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여자가 사람들 틈을 헤치고 오면서 아델을 마주 보았다.
“브룬힐.”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입 모양을 알아봤는지, 황후의 행렬을 따르며 브룬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저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데스포네 공작의 계획을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아델은 브룬힐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꼭 성공하여 살아남으란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브룬힐이 걸음을 멈추고 아델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수도 외곽의 정문으로 향하던 아델 일행을 마지막으로 배웅한 이들은 다름 아닌 귀족들이었다. 폐후가 떠나는 길이었기에 모두 후드를 뒤집어써서 제 신분을 가리고 있었으나, 아델은 그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테세우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정중히 고개를 조아리자 뒤에 있던 이들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가십시오. 감사했습니다.”
테세우스의 말에 아델은 미소로 답했다. 이윽고 활짝 열린 에흐몬트의 문을 넘어가니, 탁 트인 평야가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평야의 한편에, 그가 서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써 신분을 가린 이들과 달리, 거리낄 것 없이 제 얼굴을 드러낸 채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도 오고 가지 않았으나, 주고받은 시선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숙이자 아델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고삐를 흔들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이었으나, 지금은 가야 할 때였다. 곧, 아델을 필두로 한 일행이 지축을 울리며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오넬도 아델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차분히 몸을 돌렸다. 애가 끓듯 간절하던 검푸른 눈동자가 선연한 빛으로 바뀌었다. * * * 그렇게 아델이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엘리자베타를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들이 은밀하게 모여들었다. 그중엔 브룬힐 알렉사를 주축으로 한 마법사들도 섞여 있었다.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레녹스 푸아티에를 비롯한 데스포네 공작 주변의 마법사들을 저지하는 일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브룬힐과 그녀를 따르는 마법사들이 표적이 된 마법사들의 동선을 모조리 파악해 넘긴 정보를 토대로, 리오넬이 이끄는 기사 세력은 이미 내일을 대비하여 궁 내부의 동선까지 짜 두며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엘리자베타가 결연한 표정으로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일,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오.”
성공해야만 했다. 제국을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브룬힐도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찌릿한 전기가 척추를 타고 발끝까지 번지는 감각에 브룬힐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치떴다. 반사적으로 오른편에 앉아 있던 동료 마법사를 쳐다보자 그 역시 놀란 눈빛으로 브룬힐을 마주 보았다. 착각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잠시. 다시 한번 온 혈관으로 찌릿한 마력이 번졌다. 브룬힐은 낭패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엘리자베타가 묻자, 브룬힐은 황망히 입을 열었다.
“마력이 느껴집니다.”
“뭐?!”
모였던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브룬힐은 저릿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탑이 내려올 것 같습니다!”
* * * 그리고 그 찌릿한 마력의 감각은 데스포네 공작의 손끝에도 번졌다.
“그렇지!!!! 역시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으하하하하하!!!”
데스포네 공작은 광소하며 두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눈엣가시 같던 아델라이드 황녀가 사라지기 무섭게 하늘에서 탑을 내려주시다니!!
“레녹스!!”
“예!”
“지금 당장 준비해. 느낌을 보아하니 곧이구나. 으하하하하!”
레녹스도 그와 함께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오늘 모두 처리하는 겁니까?”
레녹스의 물음에 데스포네 공작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산하게 속삭였다.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탑이 내려오면 그냥 그대로 둬. 리오넬 헤르베르트, 그자가 마수에게 찢겨 죽는 꼴을 테세우스도, 엘리자베타도 똑똑히 지켜볼 수 있도록. 그런 다음 테세우스 발드르를 죽이는 것이다. 알았지?”
공작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짜릿한 감각이 미칠 것처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