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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아델의 마지막 명 (98/127)

98화. 아델의 마지막 명2022.03.08.

그 무렵, 일행과 함께 수도의 외곽 경계를 벗어나 항구로 이어지는 가도를 달리던 아델도 한순간 온몸에 번지는 마력을 느꼈다. 아델이 급히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놀란 듯 앞발을 치켜들었고, 주위의 기사들도 서둘러 말을 멈춰 세웠다.

16553303478363.jpg“괜찮으십니까?!”

곳곳에서 걱정스레 물었으나, 아델은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예민해진 감각 사이로, 찌릿한 자극이 분명 느껴졌다. 아직은 옅지만, 그것은 분명 마력이었다.

16553303478363.jpg“전하!”

아델은 몸을 돌려 지금껏 달려온 길을 바라보았다.

16553303478363.jpg“왜 그러십니까?”

카인의 물음에 아델이 중얼거리듯 답했다.

1655330347838.jpg“마력, 너도 느꼈지?”

16553303478363.jpg“전하.”

채근하는 듯한 부름에 아델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1655330347838.jpg“분명 마력이었어, 그렇지?”

마력이 지나간 길을 따라 오싹한 소름이 온몸을 내달렸다. 삽시간에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분명, 탑이 내려올 전조였다. 내일 거사를 앞두고, 하필 오늘 탑이 내려오다니! 걱정으로 물든 아델의 얼굴을 바라보며 카인은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에흐몬트에 미련을 갖는지, 그 역시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아델에게 말했다.

16553303478363.jpg“안 됩니다, 전하. 가셔야 합니다.”

1655330347838.jpg“…….”

16553303478363.jpg“전하는 고트로프의 황녀이십니다. 타국의 정쟁에 더는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카인의 말에 아델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더 짜릿한 감각이 전율처럼 온몸을 스쳤다.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황량하고 차가운 바람이 아델과 카인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카인은 그녀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카인의 시간은 아델이 떠나던 그 날에 멈추었으나, 아델의 시간은 그 뒤로도 계속 흘렀다. 카인에게 아델은 그의 정체성이자 세계였지만, 슬프게도 아델에게 카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카인이 알지 못하는 현재의 아델은 그가 알던 그녀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선택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망토 속으로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낸 그녀가 그것을 카인에게 내밀었다.

16553303478363.jpg“전하!”

기벨린이 비명을 지르듯 아델을 부르며 다가왔고, 카인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빼곡하게 새겨진 고귀한 문양. 아델의 손 위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그것은 아델라이드 고트로프의 신분패였다. 카인이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며 지독하게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16553303478363.jpg“이걸 왜 제게 내미시는 겁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우주를 관통하는 기적이라 했다. 비록 그에게 허락된 말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그녀 곁에 있어 행복했다. 그녀와 함께 산야를 누비던 매 순간이 설레었다. 그녀의 작은 습관, 눈빛 하나마저 세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사랑이란 그렇게 집요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아델의 황금색 눈동자가 결심으로 단단해졌다. 고집스러운 그의 주군은, 저런 눈빛을 할 때면 결코 제 마음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카인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델을 바라보는 사이, 결국 그녀가 입을 열었다.

1655330347838.jpg“카인 녹스. 그대에게 내리는 나의 마지막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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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잔인하다.

1655330347838.jpg“나 아델라이드 고트로프는 지금 이 순간부터 고트로프 황녀로서의 모든 지위와 권한을 내려놓으니, 그대는 나의 의지를 황제 폐하께 전하라.”

당신은 정말 잔인하다. 카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부릅뜬 기벨린의 눈도 삽시간에 붉어지더니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아델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에흐몬트의 기사들마저 충격 어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머리 위로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델은 일렁이는 눈으로 그녀를 원망스레 응시할 뿐 끝내 신분패를 받으려 하지 않는 카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울고 있는 기벨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 역시 가슴 아프지만, 명령을 거둘 수는 없었다. 이미 그녀의 삶은 방향을 잡았으므로.

1655330347838.jpg“기벨린 루한.”

기벨린이 일그러지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 감추며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16553303478363.jpg“예, 전하.”

아델은 신분패와 더불어 자신의 의지가 적힌 문서를 품에서 꺼내 기벨린에게 내밀었다.

1655330347838.jpg“부탁한다.”

기벨린은 치미는 울음을 내리누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아델을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16553303478363.jpg“제가 아는 전하라면 절대 하시지 않을 선택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택하심은, 진정으로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벨린은 울면서 억지로 웃었다. 그러니 어찌 붙잡을 수 있을까. 이분이 단 한 번도 제 뜻대로 사는 것을 본 바가 없거늘. 처음으로 펼친 그 마음을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16553303478363.jpg“도와드릴까요?”

1655330347838.jpg“아니.”

깔끔하게 돌아온 거절에 기벨린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아델을 위한 최선은,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리라. 기벨린은 손으로 눈물을 슥 훑어 지운 다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16553303478363.jpg“전하의 명을 반드시 이행하겠으니, 걱정 마십시오!”

아델은 눈물 젖은 부하들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말머리를 돌렸다.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카인이 그녀의 가슴을 저릿하게 했으나,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1655330347838.jpg“카인, 미안하다.”

함께 온 호위들도 말없이 아델을 따라 말머리를 돌렸다. 저 먼 곳에서 하늘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맑았던 겨울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마력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델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고삐를 세게 내리쳤다. 아델을 태운 말이 폭발적으로 도약하며 수도를 향해 질주하자 호위들도 일제히 그녀를 따라 말을 몰았다.

16553303478363.jpg“카인.”

기벨린이 그를 불렀으나, 카인은 고트로프의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던 배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에흐몬트의 지평선을 향해 내달리는 아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과거를 후회했다. 별안간 그의 눈앞에 나타나 씩 웃던 소녀. 그때 그녀를 따라가지 말걸. 그랬더라면, 그녀를 마음에 품지 않았을 것이고, 혹은…… 그녀가 그를 형제로 여기는 일도 없었을 것인데. 기어이 눈물이 턱을 타고 흩어졌다. 모두가 부질없는 후회다.

1655330347838.jpg‘카인 녹스!’

낭랑한 음성, 오만하리만치 당당하게 빛나던 그 소녀를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었으랴? 백 번, 천 번을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는 그녀를 따라나섰으리라.

16553303478363.jpg“돌아가자, 카인. 그게 전하께서 원하시는 거야.”

기벨린의 말에 카인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빛을 잃어버린 듯한 친구의 모습에 기벨린의 가슴도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델이 건네준 신분패와 서류를 품 안에 갈무리하며 카인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손에 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만의 삶을 향해 달려간 아델을 위해 기도하며. * * * 카를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6553303537727.jpg“에이, 진짜. 저것도 너무 가깝네.”

함께 하늘을 살펴보던 데스포네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마치 옆에 있는 황제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였다. 이번 탑은 수도 관문 앞 평야 지대쯤에 내려올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탑이 필요해도 그 위치는 곤란했다. 탑 때문에 황궁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래도 이번 탑도 파괴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았다. 몇 번 하다 보면 원하는 위치에 세워지겠지. 입맛을 다시던 데스포네 공작이 별안간 히죽 웃었다. 위치는 좀 아쉽지만, 지금 중요한 건 탑이 내려온다는 거였다. 공작의 눈에 탑은 그간 눈엣가시 같던 것들을 한꺼번에 죽여 없앨 수 있는 한 줄기 동아줄과도 같았다. 데스포네 공작은 황제를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53303537727.jpg“그랜드 공작이 세력을 모으고 있으니 그대로 두면 역모를 일으킬 겁니다. 저 탑은 폐하를 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에요. 오늘 헤르베르트와 발드르, 그리고 그랜드를 모조리 쓸어 버릴 겁니다.”

천치처럼 정신을 놓고 있던 황제가 그 말에 형형한 눈으로 데스포네 공작을 바라보았다. 자수정을 닮은 눈동자에서 질척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16553303537736.jpg“나는 리오넬 헤르베르트, 그자가 죽는 꼴을 꼭 봐야겠소.”

16553303537727.jpg“그자가 가장 먼저 죽을 겁니다.”

뱀처럼 속삭이는 공작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노려보았다.

16553303537736.jpg“그자의 죽음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안내해.”

16553303537727.jpg“물론이지요, 폐하.”

16553303537736.jpg“더불어, 수도에 있는 모든 가문의 수장들에게 집결 명령을 내리시오.”

리오넬 헤르베르트, 그자의 죽음으로 모두에게 본을 보여야 하니. * * * 우르릉. 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자 사람들은 떨리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타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마법사와 기사 전원에게 소집 명령이 떨어졌고, 뭉쳐 있던 귀족들도 자연스럽게 제 위치로 흩어졌다.

16553303478363.jpg‘탑이 있는 상태에선, 레녹스 푸아티에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브룬힐 알렉사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엘리자베타는 침통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16553303558181.jpg“다시 기회가 올 겁니다.”

테세우스의 위로에 엘리자베타는 억눌린 숨을 몰아쉬었다.

16553303558189.jpg“하나, 문제는 오늘이오.”

테세우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절망의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16553303558189.jpg“황제가 모든 가문의 수장들에게 집결 명령을 내렸소. 그것도 외곽 성벽 위로 말이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헤르베르트 후작을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겠소.”

16553303558181.jpg“그는 살아남을 겁니다.”

테세우스는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 역시 침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붉은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어두워지던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한곳으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아닌 이들조차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었다. 리오넬을 필두로 한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성곽 앞에 도열했다. 거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탑이 원망스러웠다. 대지를 집어삼킬 듯 거칠게 휘몰아치는 마력과 바람이 그들의 뺨을 세차게 치고 지나갔다. 그때, 성루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외쳤다.

16553303478363.jpg“근위대는 탑의 최초 저지선을 만들라!!!”

황제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리오넬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를과 리오넬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황제의 눈동자에 넘실거리는 진득한 질투와 악의가 시뻘건 하늘보다 더 붉고 음습했다. 리오넬은 고개를 돌려 탑이 떨어질 자리를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수도 인근에 탑이 세워지길 바라고 있다 한들, 이렇게 지척에 세워진 탑은 데스포네 공작도 원하지 않는 바일 터. 게다가 모두가 보는 앞에 대놓고 위해를 가할 명분이 저들에게는 없으니, 오늘은 여느 때처럼 이를 악물고 버텨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1655330347838.jpg‘죽지 마.’

드넓은 평야의 어느 한 곳, 아델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리오넬은 몇 번이나 다짐했다. 반드시 살아남아 그녀 곁에 설 것이라고. 우르릉 쾅쾅!! 천지를 찢을 듯 요란한 천둥이 내려치고 섬광이 번뜩였다. 강한 상승기류가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리오넬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16553303558215.jpg“가자!!”

그의 명령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마치 죽음을 향해 달리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모두의 불안감이 극에 치달은 와중에도 황제 옆에 선 데스포네 무척이나 가뿐한 얼굴로 줄곧 싱글거리고 있었다.

16553303478363.jpg“마법사들은 언제…….”

조심스럽게 마법사들의 출정을 요구하려는 누군가의 말을 손을 휘저어 막으며, 공작은 느긋하게 뒷짐을 졌다.

16553303537727.jpg“걱정 말게. 우린 늘 그랬듯 적당한 시기에 달려 나갈 것이니.”

  * * * 리오넬은 탑이 내려올 위치에 서서 침착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멓게 내려오는 형체는 한눈에도 직경이 어마어마한 대형 탑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 싸운 기사들 역시 리오넬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제 위치를 찾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날카롭게 치솟는 상승기류에 말들이 불안한 울음소리를 내며 자꾸만 뒷걸음쳤다. 모두의 예상대로, 성곽의 마법사들은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상승기류가 좀 더 거세진다 싶더니 시뻘건 하늘이 더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검은 재앙이 빠르게 몸집을 불리며 그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16553303478363.jpg“오, 온다!!”

16553303478363.jpg“물러나지 마라, 자리를 지켜!!”

기사들이 말을 다독이며 상승기류에 대항하는 그때, 발드르 공작을 대동하고 성루에 막 도착한 엘리자베타가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황제를 향해 간곡한 어조로 소리쳤다.

16553303558189.jpg“폐하. 대형 탑을 기사들만으로 막는 것은 무리입니다! 부디 마법사들을 출전시키십시오.”

희열에 찬 눈으로 정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황제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16553303537736.jpg“왜? 저기에 누이가 필요한 세력이 다 있어서 그러오?”

하늘에서 섬광 한 줄기가 내려꽂힌 순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얗게 점멸하는 세상 속에서 똑같은 색채의 눈동자가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번뜩였다. 다시 번쩍, 섬광이 시야를 하얗게 메웠다.

16553303478363.jpg“탑이, 내려온다!!!!”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오자, 두 사람은 동시에 정면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입을 벌리며 기사들의 머리 위로 내달리는 검은 재앙이 두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성곽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브룬힐의 온몸도 마력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까이 있던 동료들이 크게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엄청난 마력이다. 마력의 바다가 눈앞으로 쏟아지는 환상마저 보일 지경이었다.

16553303579006.jpg“크아아아아악!”

기괴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기사들이 타고 있던 말이 더 심하게 동요했다. 무너지는 대열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기사들의 모습이 처절했다. 브룬힐은 당장이라도 레녹스에게 달려가 간청하고 싶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레녹스 푸아티에가 지옥을 눈앞에 둔 악귀처럼 웃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브룬힐도 뛰어난 스트라이커였지만, 안타깝게도 레녹스에게 맞서기엔 무리였다. 심지어 이렇게 마력이 범람하고 있는 상황에서야!

16553303478363.jpg‘이제 어떡해야 하지? 어떻게 행동해야…….’

원래 계획대로라면 내일 거사에서 이 간악한 자의 목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탑이라는 변수가 너무나도 일찍 도래하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탑이 있는 한, 마법사단을 장악한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이렇게 또다시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 눈 감으며,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아델라이드 황후를 만나기 전처럼 그렇게? 이제 탑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대지에 발을 디디려 하고 있었다. 리오넬은 탑의 직경을 다시 한번 가늠하며 기사들을 몇 걸음 뒤로 물렸다.

16553303558215.jpg“모두 검을 뽑아라!! 물러나지 말고, 자기 위치를 지킨다!!”

기사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 불안과 긴장이 최고조로 다다른 그 순간, 날카로운 상승기류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한 줄기 묻어나는가 싶더니, 무서운 속도로 땅에 내려오던 탑이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16553303478363.jpg“키퍼?”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성벽의 마법사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시끄러운 바람 소리를 가르며 지축을 울리는 한 무리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리오넬이 눈을 크게 뜬 채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16553303558215.jpg“!!”

검푸른 눈동자에 격정이 몰아쳤다. 고개를 돌린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지평선 끝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탑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여인이 칠흑 같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새카만 칼을 높게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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