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광야2022.03.12.
광야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서운 기세로 치솟는 바람 소리도, 기괴한 마수의 울음소리도 모두의 귓가에서 멀어졌다. 검을 쥐고 있던 누군가의 손이 잘게 떨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이들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이국의 황녀를 바라보았다. 리오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려오는 아델을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같던 충격도 잠시, 그녀가 자칫 곤란한 일을 겪을까 걱정스러운 마음과 다시 돌아온 그녀가 반가운 모순적인 마음이 엉망으로 뒤섞여 그를 강타했다. 성벽 위에 서 있던 이들도 광야를 가로질러 홀연히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여자를 단박에 알아봤다. 카를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델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델라이드!”
다시는 황제의 옆에 서지 않겠노라 선언했던 그녀가 돌아왔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겠는가? 황제는 핏발 선 눈으로 리오넬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자도 달려오고 있는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재앙이 바로 제 머리 위에 있는데도, 세상에 중요한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녀밖에는 없는 양. 검고 질척한 질투가 카를의 마음을 잠식했다. 그는 주먹으로 성벽을 내리치며 다짐했다. 리오넬 헤르베르트는 오늘 이 광야에서 죽을 것이다. 설령 탑이라는 저 재앙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그리고 아델라이드, 그 건방진 여자는 그제야 비로소 피눈물을 흘리며 깨달으리라. 감히 에흐몬트의 황제를 이렇게 비참하게 한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 * * 한편, 광야를 가로질러 무섭게 질주하는 아델의 시선은 거대한 탑에 고정되어 있었다.
‘2급 상위, 혹은 1급.’
셀 수 없이 탑을 부수었던 아델의 간담마저 서늘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탑 아래에는 마법사 하나 없이 기사들만이 진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이 세찬 바람을 뚫고 아델에게까지 전해졌다. 불안한 얼굴들 사이로 홀로 차분한 검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자 술렁이던 마음이 담담히 가라앉았다. 늦지 않아 다행이다. 아델은 검을 더욱 단단히 쥐며 말을 좀 더 채근했다. 그때, 간신히 붙잡았던 탑이 아델의 마력을 뚫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압력이 등을 짓눌렀다. 아델은 자꾸만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고 이를 악물며 기사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얼른 그녀가 탑으로 갈 수 있도록 조금씩 자리를 비켜 주는 기사들을 지나 리오넬이 서 있는 탑의 중앙을 향해 달려갔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녀의 몸을 끝도 없는 하늘로 날려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이리저리 채찍질하고, 거대한 탑의 그림자가 그녀를 짓밟아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아델은 서둘러 말에서 뛰어내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일정한 방향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이 길을 잃은 듯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할 무렵,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금빛 실타래들이 탑의 주위를 붙잡기 시작했다. 손을 대면 끊어질 것처럼 가늘기 짝이 없었으나, 놀랍게도 탑의 움직임이 잠시나마 정지했다. 리오넬은 초조한 마음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탑은 그녀 혼자서는 절대 파괴할 수 없다. 반드시 도움이 필요했다. 아델은 증폭기를 바닥에 힘껏 박아 넣은 뒤 거칠게 고개를 돌려 성곽에 서 있는 마법사들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방관자처럼 서 있는 그들을 보자 가슴이 들끓었다. 그녀는 마법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던 표정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할 무렵, 아델은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들이 얼마나 비밀스럽게 일을 준비해 왔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당장 나와!!!!”
아델의 포효가 브룬힐의 가슴에 칼날처럼 날아와 박혔다. 숨이 막혀 얼어붙은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을 때, 아델이 다시 한번 그들을 향해 외쳤다.
“어서!!!!”
데스포네 공작은 코웃음을 치며 마법사단을 향해 외쳤다.
“모두 제자리를 지켜라!!!!”
“데스포네 공!!!!”
분노한 엘리자베타가 거세게 소리쳤으나, 데스포네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법사단에게 다시 한번 명했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마라!!!”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던지더니 아델을 향해 있는 힘껏 내달렸다.
“브룬힐 알렉사!!! 멈추지 못할까!!!”
이를 발견한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 푸아티에가 분개하여 그녀의 이름을 불러 댔으나, 브룬힐은 이를 악물며 힘껏 다리를 놀렸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으나 동시에 알을 깨고 나온 듯 온몸이 가뿐했다. 브룬힐의 이탈은 임계였다. 물이 수증기가 되기 위한 마지막 온도였으며, 아슬아슬하던 물잔의 물이 결국 흘러넘치게 만드는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 차오를 대로 차오른 분노를 터트릴 작은 바늘이었다. 브룬힐이 달려 나가자 함께 서 있던 마법사들의 가슴도 일제히 들썩였다.
“그래. 까짓것 죽기밖에 더하겠어?!”
또 한 사람이 망토를 벗어 던지고 달려나가자, 옆에 있던 다른 이도 뛰쳐나갔다.
“뭐 하는 거야, 돌아와!!!!”
동료들이 갑작스레 이탈하자 레녹스를 비롯한 마법사단은 술렁였다.
“폐하의 명 없이 움직이는 것은 반역이다!!!”
비명 같은 외침이 머리 위로 떨어졌으나,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저것이 어째서 반역인가? 엘리자베타의 곁을 지키던 테세우스가 혼란한 상황을 지켜보다가 그녀를 제 뒤로 감추며 속삭였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리고 인근에서 대기 중이던 발드르 소속 기사에게 눈짓하여 엘리자베타를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의 시야에서 가렸다. 아델라이드의 폐위 이후 황제가 보이는 비정상적인 행보에, 데스포네 공작의 경계심도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이었다. 저들이 내일 계획한 거사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해도 이 혼란을 틈타 엘리자베타에 위해를 가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전통성과 당위성을 가지고 황제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 자는 현 에흐몬트 제국에서 그녀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엘리자베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안전해야 했다. 한편, 돌아오라는 레녹스의 외침에도 브룬힐과 마법사들은 아델 곁에 속속 도착했다.
“키퍼!”
아델의 간결한 명령에 키퍼인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손을 치켜들었다. 아델은 그들 중 일부를 가리키며 탑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나머지 일부에게 소리쳤다.
“떨어지는 스트라이커들을 받아 내라!”
의아한 명령이었으나 지금은 자세한 연유를 물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봐.”
스트라이커들을 향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델라이드가 바닥에 꽂아 넣은 증폭기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단박에 증폭기를 뽑아 들고 뒤로 물러났다가 탑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상승기류가 극에 치달은 지점에서 발을 굴러 몸을 띄우자,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에 높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저, 저걸 어떻게 하라고…….”
놀라서 정신을 못 차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두 눈을 부릅뜨고 아델의 모습을 살피는 이도 있었다. 브룬힐 역시 아델이 탑의 핵에 마력을 쏟아 넣는 광경을 똑똑히 관찰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상위 탑의 핵은 워낙 단단하여 곧바로 깨지지 않는다. 탑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아델도 순식간에 튕겨 나오며 기류에서 벗어나 버렸다.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는 키퍼들을 향해 브룬힐이 날카롭게 외쳤다.
“키퍼, 받아 내!”
동시에 아래쪽에서 대기하던 기사들도 얼른 말에서 내려 아델이 떨어질 것을 대비해 주위로 몰려들었다. 다행히 키퍼들이 얼른 아델을 받아 안전하게 땅에 내려 주었고, 상황을 파악한 리오넬도 기사들을 모아 떨어지는 마법사들을 안전하게 받을 수 있도록 진을 다시 구축했다. 다시 탑을 향해 달려갈 준비를 하는 아델과 똑같이 브룬힐을 비롯한 몇몇 마법사들도 심호흡을 하며 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제히 아델 뒤를 따라 탑으로 돌진했다. 몇몇은 핵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낙하했고, 또 몇몇은 기류를 타고 핵에 미약하게나마 마력을 쏟아 냈다.
“받아!!”
키퍼들이 채 받아 내지 못한 마법사들을 향해 기사들이 달려갔다. 간신히 마력으로 속도를 줄인 마법사를 기사들이 몸으로 받아 내자, 한데 엉켜 바닥을 굴렀다.
“괜찮소?!”
먼저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서둘러 마법사를 끌어안아 일으켰다. 흙투성이가 된 마법사도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기사들을 바라보며 감사를 전했다.
“고맙소.”
“떨어져도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오!”
확신에 찬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탑을 향해 달려갔다. 키퍼들이 탑을 붙잡고 있는 틈에 스트라이커들은 끊임없이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가 핵을 파괴했다. 거대한 탑의 단단한 핵도 끊임없는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델은 흘러내린 땀을 손으로 훑어 닦고 다시 한번 탑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치솟는 바람에 있는 힘껏 몸을 날린 뒤 마력이 쏠리는 핵을 향해 증폭기를 찔러넣었다. 탑의 내부는 시공간을 초월한 통로다. 거센 바람도, 소리도 없는 차원에는 오직 마력만이 가득했다. 단단한 핵에 있는 힘껏 마력을 응집시킨 그 순간, 증폭기를 통해 뭔가가 부서지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달되었다. 손끝에서 시작한 전율이 정수리를 강타하자 짜릿한 희열이 느껴졌다. 탑의 핵이 부서졌다.
“안 돼!!!!”
이성을 놓은 데스포네 공작의 절규가 광야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 * * 거세게 치솟던 바람의 흐름이 잠잠해졌다. 뽑힐 듯 흔들리던 마른 들풀이 힘없이 늘어지고, 귀가 멀 듯 시끄럽던 소리도 사라졌다. 기사들과 함께 마법사들을 지원하던 리오넬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에 하얀 불길이 일렁였다. 점점 거세지는 불꽃이 소리도 없이 탑을 휘감기 시작했다. 광야에 정적이 찾아왔다. 땀 범벅이 된 마법사들과 기사들 모두 고개를 치켜들고 불타오르는 거대한 재앙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탑이 파괴됐다!!!”
누군가의 외침이 광야에 울려 퍼지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환호의 물결 틈에서 리오넬만이 침묵하며 뚫어져라 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탑이 끝단부터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할 무렵, 재빨리 탑 아래로 달려 나간 그가 하늘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분홍빛으로 옅어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뒤로하고, 그녀가 빠르게 낙하하고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다. 다만, 그날과는 달리 그녀 역시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세상에 나타난 그녀는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누군가는 어리석게도 그 기적을 제 손으로 흘려보냈으나, 그는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리오넬은 강림하듯 땅으로 내려온 아델의 손을 굳세게 움켜쥐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그 순간, 벼락같은 노성이 성벽에서 터져 나왔다.
“아델라이드!!!!!”
날카로운 외침에 아델은 리오넬의 손을 놓고 성벽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성벽을 붙잡고 쏟아질 것처럼 몸을 내밀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동시에 황제의 옆에 있던 데스포네 공작이 벼락같이 외쳤다.
“지금 당장, 폐하의 허락 없이 단독으로 움직인 마법사들을 포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