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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허무의 권좌 (100/127)

100화. 허무의 권좌202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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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의 명령에 성곽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마법사 일부마저 술렁였고, 성벽 위의 기사들은 탄식했다.

1655330379257.jpg“뭣들 하느냐?! 당장 저 반역자들을 포박하지 않고!!!!”

16553303792576.jpg“제정신입니까?!!!”

테세우스가 핏대를 세우며 공작에게 소리쳤으나, 공작은 막무가내였다. 갑자기 돌아온 아델라이드라는 변수로 인해 아무런 소득도 없이 탑이 파괴되었다. 반황제파의 기를 꺾어 놓기는커녕, 믿고 있던 마법사단마저 반토막으로 양분이 난 것이다. 탑이 파괴되어도 잠시뿐이지만 탑이 남긴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이미 여자에게 미쳐 황제가 제정신이 아닌 이상 명분과 대의는 저들에게 있으니, 마력이 잔존하는 이때 머릿수로라도 저들을 짓밟아 놓아야 했다.

1655330379257.jpg“반역자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성곽에 서 있던 일부 병사들과 휘하의 마법사들이 데스포네 공작의 성화에 못 이겨 아델과 마법사들에게 주춤주춤 다가왔다. 광야에 서서 냉철하게 상황을 살피던 리오넬이 떨리는 숨을 가다듬다가, 결심한 듯 커다랗게 외쳤다.

16553303792587.jpg“마법사들을 보호해라!!”

황제를 등에 업은 데스포네 공작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압도적인 탑의 등장만큼이나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모두가 멍해진 사이, 리오넬이 다시 한번 소리를 높였다.

16553303792587.jpg“제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탑을 파괴한 마법사들이 어찌 반역자인가?! 근위대!! 마법사들을 보호하라!!”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두 눈을 매섭게 빛내며 검을 치켜들고 일사불란하게 아델과 마법사들을 감싸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황실 근위대가 황제가 아닌 리오넬 헤르베르트의 명령에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것은 내일로 계획된 거사를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테세우스는 엘리자베타가 안전하다는 것을 몰래 확인한 뒤, 지척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반황제파 귀족들이 그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근위대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눈을 치떴다. 놀라기는 데스포네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공작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공작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섰던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돌려 공작과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근위대를 향해 분노하여 외쳤다.

16553303792594.jpg“근위대!!! 황제의 명령이다!! 지금 당장 반역자 리오넬 헤르베르트와 마법사들을 체포하라!!! 그렇게 한다면, 그대들의 죄는 용서해 주겠다!!”

황제의 커다란 목소리가 정적이 찾아온 수도에 울려 퍼졌다. 성벽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과 기사들은 황당해하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귀를 기울이던 백성들도 수군거렸다.

16553303792598.jpg“지금, 탑을 파괴한 영웅들을 반역죄로 체포하라는 거야?”

16553303792598.jpg“탑을 파괴한 것이 왜 반역이야?”

16553303792598.jpg“소문 못 들었어? 폐하께선 탑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하신다잖아? 자기 권력을 위해서 말이야!”

사람들의 시선에 해묵은 울분이 섞여들었다. 수도 곳곳이 어두운 분노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명령에도 근위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데스포네 공작이 성벽을 힘껏 내리치며 버럭 성을 냈다.

1655330379257.jpg“저런 무도한 것들을 보았나!!! 네 이놈들!! 반역이니라!!”

16553303792576.jpg“그게 어찌 반역입니까?”

1655330379257.jpg“뭐라?!”

테세우스가 황제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목숨을 내놓은 무모한 행동이었으나, 누군가는 모두가 보는 앞에 황제와 공작의 만행을 낱낱이 밝혀 공론화시켜야 했다. 테세우스는 카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했다. 부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16553303792576.jpg“사사로운 권력을 위해 제국의 모든 사람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는 자야말로 반역자가 아닙니까!”

커다란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1655330379257.jpg“네, 이놈!!!”

데스포네 공작이 광분하여 테세우스에게 달려들었지만, 가까이에 있던 발드르 휘하 기사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16553303792576.jpg“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제국 전역에 탑을 세우고자 하는 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손 놓고 방관하는 자야말로 진정 무도한 반역자가 아닙니까!!”

테세우스의 거친 포효에 데스포네 공작이 성벽 아래를 향해 소리 질렀다.

1655330379257.jpg“레녹스 푸아티에, 무엇 하느냐!! 당장 반역자들을 찢어 죽이지 않고!!!”

황제 역시 성벽을 내리치며 레녹스에게 고함을 질렀다.

16553303792594.jpg“레녹스!! 헤르베르트 후작부터 죽여 버려라!!!”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지척에 있어 신중을 기하던 레녹스가 그 명령에 기다렸다는 듯 증폭기 머리를 광야로 돌렸다. 그에 맞서 아델라이드 역시 기사들을 헤치고 나와 새카만 흑검을 들어 올렸다.

16553303812804.jpg“브룬힐. 성벽 위로 방어벽을 구축해라.”

짧고 묵직한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철 가루가 자석에 끌려가듯 마력이 그녀 쪽으로 쏠려 들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던 레녹스 푸아티에에게도 만만치 않은 양의 거대한 마력이 흘러들었다. 최상위 스트라이커가 정면으로 맞붙자 마치 창과 창의 싸움을 보는 것만 같았다. 레녹스는 마력이 엄청난 압력으로 아델라이드에게 빨려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단번에 상대를 절명시키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 제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마력을 끌어모아 기습적으로 아델을 향해 쏘았다.

16553303792587.jpg“아델!!!”

어디선가 들려오는 처절한 외침과 동시에 눈이 멀 듯 강렬한 빛이 광야에 번졌다. 모두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에도 아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증폭기를 거세게 휘둘렀다. 그러자 금빛 채찍 같은 마력 줄기가 날아들며 무섭게 달려오던 레녹스의 마력을 휘감아 땅으로 내리꽂았다. 쩌정!!!!! 하늘이 쪼개지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가 대지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천지가 요동치는 것 같은 엄청난 진동과 울림에 수도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마력은 대지에 커다란 상흔을 만들어 내며 함께 소멸했다.

16553303844267.jpg“헉, 헉.”

급격히 마력을 털어 쓴 레녹스가 땅에 증폭기를 처박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뿌연 연기 너머를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감았던 데스포네 공작 역시 재빨리 눈을 떠 성벽에 매달렸다. 레녹스는 머저리 같은 놈이지만, 마력 하나만큼은 에흐몬트에서 당해 낼 자가 없을 만큼 강력했다. 이번에야말로 눈엣가시 같던 아델라이드와 리오넬, 그리고 마법사단의 배신자들을 한꺼번에 쓸어 버렸으리라. 희열에 찬 데스포네 공작이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흉흉하게 뒤집힌 대지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희뿌연 먼지 너머, 굳건하게 대지를 딛고 선 아델라이드와 리오넬이 보였다.

16553303792598.jpg“레녹스 푸아티에의 마력을 이겨 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며 끔찍한 현실을 일깨웠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기진맥진한 레녹스와, 오연하게 증폭기를 붙들고 서 있는 아델라이드. 그것만으로도 승패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판가름 났다. 데스포네 공작은 망연자실하여 다리가 후들거렸다. 레녹스를 꺾은 이상, 아델라이드에게 대항할 수 있는 마법사는 에흐몬트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곧 잔존한 마력마저 모두 증발해 버리면 리오넬 헤르베르트가 이끄는 기사단 앞에 마력 없는 마법사들은 그저 허수아비나 다름없으리라.

16553303792594.jpg“안 돼…….”

카를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이미 그를 향해 칼을 빼든 무리가 눈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칼을 든 기사들 뒤에서 흘러나왔다.

16553303844284.jpg“아우구스 울리히 데스포네. 카를 울리히. 권좌를 내려놓고 물러나라.”

번쩍이는 칼끝이 일제히 갈라지며, 후드를 벗은 엘리자베타가 테세우스를 지나 걸어 나왔다.

16553303792576.jpg“모두 그랜드 공을 지켜라.”

그녀의 등장에 테세우스가 기사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고, 기사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재빨리 위치를 점검했다. 엘리자베타가 카를과 데스포네 공작을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16553303844284.jpg“카를 울리히. 에흐몬트의 황제로서 그 어떤 본분도 다하지 않은 그대는 황좌에 앉을 권리가 없다! 아우구스 울리히 데스포네! 그대야말로 진정한 에흐몬트의 반역자다!!”

에흐몬트 황실의 적통 계승권자인 그녀의 외침에 지금껏 힘에 굴복하여 숨어 있었던 사람들의 심장이 술렁였다.

1655330379257.jpg“이런 무도한 것!!”

16553303844284.jpg“더 들어라, 아우구스 울리히!! 제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마력이란 무위를 앞세워 폭정을 저지른 지난날의 죄를 그대에게 물을 것이니, 투항하여 죗값을 받아라!”

황제가 이를 갈며 엘리자베타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그녀를 둘러싼 기사들에게 곧장 가로막혔다.

16553303792594.jpg“지금 감히 나에게 황좌에서 내려오라 했어?!”

16553303844284.jpg“그대는 황제로서의 권위를 모두 잃었어.”

16553303792594.jpg“내가! 에흐몬트의 황제다!! 내 권위는 나 그 자체야! 그런데 내가 황제의 권위를 잃다니?!!”

카를의 분노에 엘리자베타 옆에 서 있던 테세우스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16553303792576.jpg“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카를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황제의 눈동자가 된서리를 맞은 듯 급격히 얼어붙었다. 화가 치달아 일그러진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사라졌다. 그를 향한 싸늘한 경멸과 뜨거운 분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에흐몬트 제국민 모두의 날 선 시선이 화살처럼 그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적개심이 가득한 눈동자에는 한 줌의 존경도 묻어 있지 않았다. 데스포네 공작은 위기감에 몸서리치며 카를의 팔을 잡아 뒤로 끌었다. 현 상황은 그들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지금으로서는 무력으로도, 명분으로도 저들을 꺾을 수 없다. 하지만 아직 에흐몬트의 황제는 카를 울리히다. 일단 황제를 확보한 다음, 또다시 수도 인근에 탑이 내려올 때까지 버티며 데스포네 공작령의 사병들을 끌어와야 했다.

1655330379257.jpg“폐하를 보호하라, 어서!!!”

공작이 카를의 앞을 가로막으며 핏대를 세우자, 친 황제파 귀족들과 그들의 병사 일부가 얼른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의 주위를 둘러쌌다. 엘리자베타는 황제의 주변에 선 귀족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며 경고했다.

16553303844284.jpg“지금이라도 침몰하는 배에서 내린다면, 선처할 것이니 잘 생각하시오.”

16553303792594.jpg“입 닥쳐, 엘리자베타!!!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자, 어서!!! 마법사들도 모조리 끌고 와라, 모조리!!”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는 친 황제파가 확보한 퇴로로 재빨리 몸을 빼낸 그때, 저 어디선가 누군가 소리쳤다.

16553303792598.jpg“황제는 물러나라!!!”

순간 사람들 머리 위로 시체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살얼음처럼 위태로운 정적이었다. 힘껏 달리던 황제와 공작마저 얼어붙어 멈추고 말았다. 데스포네 공작마저 이것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버벅거리는데, 또다시 누군가가 소리쳤다.

16553303792598.jpg“황제는 물러나라!!!”

그것은 끓을 대로 끓어오른 기름에 가져다 댄 불씨였다. 집과 가족을 잃은 분노가 드디어 향할 곳을 찾았다.

16553303862507.jpg“황제는 물러나라!!!!”

군중의 성난 함성이 성벽을 부숴 버릴 듯한 기세로 몰아쳤고, 광야마저 뒤흔들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휘청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황제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급히 성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655330379257.jpg“레녹스!!!”

공작의 찢어질 듯한 외침에 레녹스는 도망치는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에게 달려갔다.

1655330379257.jpg“다른 마법사들은 어쩌고 너만 와?!!”

데스포네 공작이 쉰 목소리로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공을 들여 키워 낸 마법사단은 가장 먼저 침몰하는 배를 탈출할 요량인지 묵묵히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16553303844267.jpg“일단 가셔야 합니다!”

가까이 있던 귀족이 외쳤다.

16553303862507.jpg“황제는 물러나라!!!”

대해처럼 넘실거리는 분노가 노도처럼 달려들어 황제와 공작을 강타했다. 카를은 귀를 틀어막으며 미친 듯이 달렸다. 황제로서의 위엄과 체면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마지막까지도 비겁한 모습이었다.

16553303862507.jpg“물러나라!!!”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을 비롯한 일부 귀족들은 그렇게 백성들의 함성에 떠밀려 황궁으로 도망쳐 궁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갔다. * * * 붉은 하늘이 밀려가고 음울한 겨울 하늘에 찬연한 햇살이 섞여들자 냉기 가득했던 바람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꽁지 빠지게 도망치고 난 뒤, 엘리자베타와 테세우스는 귀족들을 모아 당장 공성전을 준비했다. 그동안 브룬힐 알렉사가 흩어져 있던 마법사단을 모았다. 놀랍게도 레녹스 푸아티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황제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델은 홀로 광야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달려온 길이라서일까, 그녀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 별안간 세상이 어두워지며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녀를 삼켰다. 아델이 고개를 들자 빛에 휩싸인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 술렁이며 출렁이던 가슴 속 바다가 잔잔하게 변했다.

16553303812804.jpg“리오넬.”

그가 아름다운 눈을 길게 휘어 웃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16553303792587.jpg“제가 걱정되어 오신 겁니까?”

리오넬은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며, 귓바퀴가 붉어지겠지. 그러나 아델은 그의 예상을 깨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답했다.

16553303812804.jpg“응.”

그녀의 가벼운 대답에 리오넬의 입가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아델은 그를 향해 담담히 마음을 전했다.

16553303812804.jpg“그래서 왔어.”

태양같이 찬란하고 매끄러운 금빛 눈동자 가득 그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리오넬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아 붉은 입술을 삼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눅진하게 끓어올라 쏟아지는 용광로의 쇳물처럼, 온몸이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 같은 환희가 휘몰아쳤다. 리오넬은 아델을 향해 뜨거운 숨을 토해 내듯 물었다.

16553303792587.jpg“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고트로프, 에흐몬트, 제삼국, 혹은 산야. 어디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당신이 정한 길이 곧 나의 길이고, 당신이 머물고자 하는 곳이 곧 나의 집이니. 그때, 열린 성문으로 엘리자베타가 달려 나왔다. 기사들이 양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만들었고, 아델과 리오넬도 달려오는 그녀를 향해 정중히 예를 갖췄다. 엘리자베타는 제 삶에 섬광 같은 깨달음을 선사한 이방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델라이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직전 나타난 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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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깜짝 놀란 아델이 눈을 치뜬 채 얼떨떨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그녀의 등을 끌어안은 엘리자베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6553303844284.jpg“가지 마시오.”

엘리자베타는 손을 풀어 몸을 뒤로 물리며 아델의 눈을 바라보았다.

16553303844284.jpg“무리한 부탁인 줄 알지만, 이곳에 남아 주시오. 나는, 황궁에 숨은 반역자들을 벌하고 황좌에 앉을 것이오. 그러니 나를 좀 도와주시오. 그대는 나의 은인이자, 에흐몬트의 은인이오.”

햇살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따사롭게 비췄다. 엘리자베타의 단단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델이 부드럽게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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