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구원인 줄 알았던 아름다운 파괴자2022.03.19.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은 황궁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공성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후작가와 발드르 공가를 중심으로 한 기사 대다수가 엘리자베타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기실 공성전이라기보단 숨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데스포네 공작은 텅텅 빈 황궁 성벽을 보며 까마득해지려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았다. 그간 발드르 공가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 마법사단을 내세워 기사들을 핍박한 탓에, 기사들에게 데스포네 공작은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이전에는 언제 탑이 내려올지 모른다는 공포와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기사들을 통제했으나, 지금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에게 남은 것은 황제의 인장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데스포네 공작의 핵심 세력인 마법사단마저 와해되어 버린 상황. 이대로라면 다시 탑이 내려온다고 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더 없어?”
공작은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이게 다야?! 록펠러는? 작센은?! 이 개 같은 자식들은 모두 어디로 갔어?!”
“황궁 내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랜드 공작 진영에 붙은 것 같습니다.”
그나마 사병들을 운용할 수 있는 가문의 수장들마저 대다수 빠져나가 버렸다. 이대로라면 지금 당장 리오넬 헤르베르트가 황궁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 해도 막아 내기 어려우리라. 데스포네 공작을 따라 황궁으로 들어온 가문의 수장들도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일이 잘못된다면 그들뿐 아니라 황궁 밖 저택에 있는 그들의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할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지휘해야 할 이때,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사람처럼 제 방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기 시작한 황제의 모습은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들썩이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차라리 그랜드 공작에게…….”
손을 내밀어 보자 말하려던 귀족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이미 추가 기울 대로 기운 상황이었다. 그들에게는 엘리자베타의 세력과 협상할 만한 패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데스포네 공작이 제 앞에 선 귀족을 바라보았다.
“헨리 윙필더.”
“예.”
“탑은, 반드시 다시 내려올 거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어.”
그 집착 어린 말에 헨리 윙필더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마법사단에서 데스포네 공작을 따라 황궁에 들어온 이는 레녹스 푸아티에뿐이었다. 심지어 탑 아래에서 당할 자가 없다던 레녹스가 폐후 앞에 무릎 꿇은 것을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직 내겐 데스포네 공작령의 병사들과 수도 밖 귀족들의 연합 세력이 남았네. 자네는 은밀히 황궁을 빠져나가 지원군을 데려와 주게.”
“시일이 걸릴 일입니다. 그때까지 이 넓은 황궁을 어찌 수호하고 계시렵니까?”
“…….”
“공작님, 차라리 폐하를 모시고 은밀히 데스포네 공작령으로 가시지요. 그곳에서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공작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울분에 몸을 떨었다. 권력의 핵심이자 황제의 상징인 황궁을 버리고 데스포네 공작령으로 간다라……. 데스포네 공작은 침묵 속에서 한참이나 고뇌했다. 창자를 도려내는 것처럼 속이 아팠다. 마법사단만이라도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든 탑이 내려오길 기다리며 공성전을 해 보았을 터인데! 헨리 윙필더의 말처럼 당장은 황궁을 지켜 낼 여력이 없었다. 거칠게 얼굴을 훑어 낸 공작은 어느새 침착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좋다. 그럼 오늘 밤, 우리는 황궁을 빠져나가 데스포네 공작령으로 향할 것이다. 준비해.”
“알겠습니다. 제가 은밀히 궁을 빠져나가 경로를 확보해 두겠습니다.”
* * * 데스포네 공작은 곧장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을 지키고 있어야 할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사용인들은 서슬 퍼런 공작의 기세를 당해 내지 못했다. 집무실에 들어선 공작은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황제의 인장을 꺼내어 품에 갈무리했다. 황제의 전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이 인장과 카를이 데스포네 공작의 수중에 있는 한, 엘리자베타가 황궁을 차지한다 해도 쉽사리 황위에 오를 수는 없을 것이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그다음으로 황궁의 보고로 달려가 보물을 챙겼다. 급박하게 나갈 것을 생각하여 작지만 값나가는 것들만 골랐는데도 몇 궤나 되었다. 시종들은 공작의 명령으로 이것들을 쓸어 담으며 미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영락없이 집을 터는 좀도둑 같은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데스포네 공작이 가장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황제의 침실이었다.
“폐하께선 여태 침실에 계시느냐?!”
“예.”
침실 한편에 웅크리고 있는 카를은 정말 한심한 몰골이었다. 공작은 굴러다니는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그의 곁에 앉았다.
“폐하.”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폐하!!”
“……아델라이드를 데려와.”
“이런 미친놈!!!”
“이 자리를 줄 테니, 그 여자만 데려오라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황제의 눈빛은 백치처럼 공허했다. 공작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차라리 인사불성인 편이 낫겠구나. 짐짝처럼 짐꾼들에게 실려 가면 조용하기라도 할 것이니.”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을 박차고 나갔다.
* * * 황궁 밖 수도는 한여름 태양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엘리자베타를 필두로 테세우스와 리오넬, 아델,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관문을 통과하자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다. 백성들은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을 몰아내고 새로운 시대를 펼칠 엘리자베타의 이름을 열성적으로 연호했다. 비록 황제에 의해 황후 자리에서 끌어내려졌으나, 에흐몬트를 버리지 않고 절체절명의 순간 달려와 준 아델에게도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에흐몬트는 또다시 탑이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 굴복했으리라. 그러나 아직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고, 리오넬 앞에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아델은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에게 속삭였다.
“다녀와.”
리오넬은 그녀의 모습을 망막에 아로새기려는 듯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고 섰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녀올 테니 후작저에서 쉬고 계십시오.”
리오넬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한참을 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어깨너머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델이 보였다. 그녀가 그의 보금자리에서 그를 기다릴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충만해졌다. 기쁨과 기대로 술렁이는 수도의 물결도,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을 완전히 몰아내고 혁명을 마무리 짓기 위해 해야 할 수많은 일도 그에 비하면 하찮게 느껴졌다. 예민하게 곤두선 그의 온 신경이 끊임없이 후작저로 향했다.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꾸역꾸역 참으며 리오넬은 어둠에 잠겨 가는 거대한 황궁을 바라보았다. 황궁 근위대장이자 국방부 장관인 리오넬은 누구보다 황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리오넬은 침착하고 냉정한 얼굴로 엘리자베타에게 설명했다.
“기사들 대부분이 돌아선 이상, 지금 저들에게는 황궁을 방어할 여력이 없습니다. 필시 데스포네 공작령으로 도망쳐 후일을 도모하려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자칫 내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리오넬의 설명에 엘리자베타가 시선을 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찌하면 좋겠는가?”
“오늘 밤, 반드시 공작과 황제를 생포해야 합니다.”
리오넬은 황궁 내부 지도의 몇 군데를 손으로 짚었다.
“출입구를 봉쇄하고 동시에 기습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명령을 내려주시면, 오늘 자정 무렵 황궁을 쳐서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을 잡아들이겠습니다.”
선명하게 빛나는 검푸른 눈빛에서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엘리자베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결하게 명령했다.
“헤르베르트 후. 오늘 밤 황궁을 탈환하고 카를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을 생포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리오넬은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근위대를 주축으로 한 주요 병력으로 황궁을 에워싼 뒤, 황궁의 모든 샛길에 정예들을 배치했다.
“오늘 밤은 굴사냥이다. 그들은 분명 은밀히 움직일 테니, 샛길 하나도 절대로 놓치지 마라.”
어둠과 함께 몰려온 먹구름이 기어이 비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 * * 황궁은 망국의 한 자락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죽은 듯 누워 있던 디안이 몸을 일으켰다. 벽난로도 꺼진 지 오래라 차갑게 식은 방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데, 거칠게 문이 열렸다. 레녹스가 엉망이 된 얼굴로 다가왔다.
“디안! 오늘 밤 폐하를 모시고 황궁을 나가 데스포네 공작령으로 갈 거다. 이따가 내가 직접 데리러 오든 아니면 병사를 보내든 할 테니, 복대 착용하는 거 잊지 말고 따라와, 알겠어?”
디안은 기묘하게 차분한 눈으로 오라비를 바라보다가 그가 원하는 답을 건넸다.
“응, 알았어.”
레녹스는 고분고분한 누이의 대답이 영 미덥잖았으나, 지금은 한시가 급할 때였다.
“언제 출발해야 할지 모르니까 지금 당장 복대부터 착용하도록 해.”
디안은 고개를 돌려 빗방울이 맺히는 창을 바라보며 건성으로 답했다.
“그럴게.”
지척에서 들리던 레녹스의 숨소리가 어느새 사라졌다. 식음을 전폐하니 가장 먼저 감각이 둔해졌다. 디안은 멍하니 시선을 들어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비싸고도 화려한 물건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아름다운 샹들리에를 보고 싶어서, 막대한 값을 주고 지겨울 만큼 긴 시간을 기다려 저것을 얻어 냈지. 한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게도, 얻을 때는 그렇게 공을 들여 놓고 막상 수중에 있으니 눈길이 안 가는 것이 아닌가? 디안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난 저것만도 못하지.”
디안은 긴 숨을 몰아쉬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레녹스가 비를 뚫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레녹스와 데스포네 공작의 말로도 그녀와 다를 것이 없으리라. 디안은 샹들리에를 마지막으로 다시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안녕.”
그러고는 비척비척 일어나 함에서 자그마한 약병 두 개를 꺼내 들고 미련 없이 상아궁을 나섰다. 늘 그녀를 설레게 했던, 구원인 줄 알았던 아름다운 파괴자를 향해. 거칠게 내려치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 * * 세찬 빗방울이 디안의 뺨을 아프게 때렸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늘 사용인들로 붐비던 황제궁은 텅 비어 음산했다. 축축하게 젖은 낙엽이 바람에 날아와 바닥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있고, 웅장하게 넓은 홀에 울려 퍼지는 빗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디안은 축축하게 젖은 로브를 벗어 버리고, 추적추적 걸음을 옮겼다. 젖은 신발이 검은 자국을 만들어 냈으나, 디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익숙한 복도에 다다르자, 데스포네 공작이 남겨 둔 병사 몇이 방 앞을 지키듯 서 있었다.
“잠시 폐하와 둘이 이야기를 나누려 해요.”
레녹스의 누이이자 황제의 정부인 디안의 요구에 병사들은 의심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독한 술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디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파에 주저앉아 독한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고 있는 카를의 맞은편에 다가가 앉았다. 마지막으로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이런 순간조차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비에 젖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이던 디안이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임신한 것이 아니었어요.”
고백하듯 내뱉은 말에 왈칵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디안은 달궈진 눈으로 카를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해 봐.
“…….”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델, 라이드. 그 나쁜 여자가, 나를 이렇게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어.”
그저 괴로운 듯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을 뿐. 거친 숨길에 묻은 술 냄새가 진동했다. 디안은 울면서 말했다.
“제 말, 들으셨어요? 제가…… 임신한 것이 아니었다고요. 정말로 아이를 가지고 싶었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요.”
눈앞에 있는 남자의 멱살이라도 쥐고 소리 지르고 싶었으나, 밖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들어오면 곤란했기에 애써 참았다. 카를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쓸더니 중얼거렸다.
“그랬겠지. 아닐 줄 알았어.”
무성의한 대답에,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디안의 손에 힘이 실렸다.
“왜요? 피임하고 있었으니까? 나 같은 비천한 여자에게서 자식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시끄러워.”
이를 악문 채 악에 받친 눈으로 카를을 노려보던 디안이 이윽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