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안녕, 내 사랑2022.03.22.
작은 병에서 투명한 액체가 쪼르륵, 술잔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이미 만취한 데다가 소파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카를은 이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목이 타는지 의심 없이 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디안은 그의 목울대가 꿀렁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카를의 손에서 미끄러진 술잔이 융단 카펫 위로 떨어졌다. 카를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으르렁거렸다.
“리오넬 헤르베르트. 그자를 네 눈앞에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너도 내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았겠지.”
이토록 한심한 남자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하고 악의에 차 있을 뿐, 디안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눈앞에서 그만을 바라보고 사랑을 구걸하고 있었는데도. 한참 동안 황제를 바라보던 디안이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음산하게 낮은 웃음소리가 빗소리보다 커지자 카를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 웃던 디안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죄송해요. 근데, 제가 바쳤던 사랑이…… 참 허무해서 웃음이 났어요. 아, 내가 이렇게 등신 같은 놈의 사랑을 그렇게 갈구했구나, 싶으니까 우스워서요.”
“너-!”
그녀에게서 처음 듣는 무례한 말에 격분한 카를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이상하게도 목덜미가 뻣뻣했다. 술에 취해서인가 싶었으나, 이내 이것이 술기운이 아님을 깨달았다. 카를은 놀란 얼굴로 손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몸뚱어리가 뭔가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리는데도 목구멍으로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카를을 향해 디안이 잔인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왜, 몸이 말을 안 들어?”
“아, 아…….”
카를은 있는 힘껏 발악했으나, 그의 육신은 의지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디안은 턱을 손으로 괴며 속삭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그 독이 근육을 마비시킨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래도 보고 듣는 것은 가능할 테니 들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내 말에 귀 기울인 적 없었잖아요.”
디안은 허공을 가만가만 바라보았다. 더는 쥐어짤 눈물이 없을 텐데, 눈물이 또 흐른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참 좋더라고요. 당신 곁에 있으면 언젠가 황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
“처음부터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백번을 되돌아가도 나는 아마 당신을 따라왔을 거예요. 당신도, 이곳도 반짝반짝 참 예뻤거든.”
“…….”
디안은 계속 울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참…… 당신 사랑했는데, 되돌이켜 보니 그게 당신에 대한 것인지 나에 대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 근데…… 그게 뭐든, ……당신이 용서가 안 돼.”
“……컥.”
“네까짓 것이 무슨 용서냐고 되묻고 싶지? 그래도 사람을 쓰레기통 취급했으면, 최소한 미안한 감정이 조금은 남아 있어야지, 안 그래?”
“우, 으, 으……!”
디안은 시시각각 고통에 신음하는 카를을 향해 악귀처럼 속삭였다.
“아델라이드, 그 여자가 왜 당신 곁을 못 견뎠는지 알려 줄까?”
카를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고, 디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하게 웃었다.
“너는 지독하게 이기적이라, 세상에서 네가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하거든. 그 여자가 똑똑했어. 당신은 늪 같은 인간이라, 곁에 있으면 누구든 그 구렁텅이에 빠져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지. 그 여자는 그걸 단박에 알아차렸던 거야. 나도 그녀처럼 현명했다면, 너 같은 놈 옆에 있지 않았을 텐데.”
디안은 바닥에 떨어진 술잔을 주워 들고 술을 따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타는 듯한 열기가 치밀었다. 디안은 빙긋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서히 죽어 가는 카를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안녕, 카를. 내 사랑. 너랑 나는 똑같이 지옥에 가겠지. 우리 둘 다 인생을 참 잘못 살았잖아.”
“…….”
“근데 거기서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디안은 황제에게 담요를 가져다 덮어 준 뒤, 문밖에서 보면 잠든 것처럼 보이도록 그의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돌려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황제는 이대로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죽어 갈 것이다.
“폐하께서 주무시네요. 담요를 덮어 드렸으니 그대로 두세요.”
황제궁을 빠져나오자 몸이 덜덜 떨려 왔다. 한편으로는 뭔가를 털어 버린 것처럼 온몸이 가볍기도 했다. 디안은 축축하게 젖은 치맛단을 꽉 움켜쥔 채 희뿌연 겨울비 사이를 가로질러 황궁의 첨탑으로 향했다. 성벽을 지킬 병사들도 모자란 시국인지라 첨탑을 지키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디안은 첨탑의 계단을 오르고 올라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거대한 종과 연결된 밧줄을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그래도 잘 당겨지지 않아 온몸의 무게를 실어야 했다. 마침내 줄과 연결된 종이 묵직하게 흔들리며 추를 진동시켰다. 뎅-. 갑작스러운 울림에 첨탑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새들이 놀라 빗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디안은 다시 밧줄을 온몸으로 끌어당겼다. 빳빳한 밧줄에 손이 까져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아픈지도 몰랐다. 뎅-. 묵직한 소리가 어찌나 슬픈지 디안은 소리 내어 울었다. 뎅- 뎅- 뎅-. 그녀는 기어이 카를의 나이만큼 종을 울리고 난 뒤 쓰러졌다. 주변이 소란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황제의 서거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제 곧 이곳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치리라. 디안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품에서 약병을 꺼내 망설임 없이 입안에 털어 넣었다. 독주로 달궈졌던 목구멍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그녀는 카를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만큼, 그녀 자신 또한 용서할 수가 없었다. 흐려지는 의식 속, 저 멀리 엄마 아빠가 보이는 것 같았다.
“……엄마…….”
그리고 왜인지 아델라이드,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디안은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나도…… 다음 생에는, 당신처럼 살아 보면 좋겠는데…….”
그날, 겨울비가 요란하게 쏟아지던 날. 한때 에흐몬트의 황제 카를 에흐몬트 울리히의 총애를 받았던 정부, 디안 푸아티에가 수도에서 가장 높은 첨탑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 * *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아델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눈을 번쩍 들었다.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숨을 죽이고 있자니, 또다시 묵직한 종소리가 세찬 빗소리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자 곧장 비바람이 들이쳤다. 세차게 내리치는 빗줄기 사이로 서글프게 들리는 울림이 느리고 묵직하게 흩어졌다. 아델은 허망한 표정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카를 울리히…….”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저것은 황제의 서거를 애도하는 소리였다. 악에 받쳐 그녀를 갈구하던 카를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말 그자가 죽었단 말인가? 아델은 이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리오넬이 이끄는 정예 기사들이 벌써 황궁을 기습한 걸까? 혹은 카를 울리히가 모종의 이유로 황궁 내부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결코 저 종이 울릴 일은 없다. 엘리자베타는 혼란한 시국인 만큼 최대한 적법한 절차를 밟아 황위를 넘겨받고자 했다. 그러니 되도록 황제를 생포하려 했을 것이고, 설령 그 과정에서 그가 죽었다 해도 혼란이 수습될 때까지는 함부로 종을 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혁명 세력이 들이닥치기 전 카를이 황궁 내부에서 모종의 이유로 숨을 거두었다면, 데스포네 공작 입장에선 최대한 그의 죽음을 숨기고 싶을 테니 종을 울릴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왜?
“디안 푸아티에…….”
깜짝 놀랄 만큼 바싹 말라 버려 안광만 형형하던 여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델은 눈을 내리깐 채 묵직한 종소리를 한참이나 들었다. 종은 카를 울리히의 나이를 기어이 채우고 나서야 멈췄다. 아델은 깊고 긴 숨을 천천히 내쉬며 창문을 닫았다. 창문 너머로 온 수도가 소란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델은 그 모든 소음에서 홀로 유리된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전하!’
‘아델라이드!’
가슴 한편에 새겨진 목소리가 세차게 내리치는 빗줄기처럼 그녀를 두드려 대었으나, 아델은 냉정하게 그 모든 것을 밀어냈다.
“리오넬.”
그가 보고 싶었다. 아델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단정한 얼굴을 휘어 웃으면, 그녀의 삶에도 봄이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사람.
“리오넬,”
그를 떠올리자 먹먹하게 사위를 채우던 빗소리가 멀어지며 거친 맥동 소리만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오늘은 이름을 버린 날이다. 과거의 인연을 끊어 낸 날이며, 동시에 새로운 인연을 그녀의 손으로 이어 붙일 날이다. 그는 반드시 모든 것을 이룩한 뒤 그녀에게 돌아올 것이다. * * * 리오넬은 거센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황궁 북쪽에 위치한 좁은 철문 너머에 서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로 했단 것이 거짓은 아니어야 할 거요.”
그의 서늘한 음성에 헨리 윙필더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찬 빗줄기에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얼굴을 훑어 내며 말했다.
“제가 이곳에서부터 모시겠다 약조했으니, 잠시 뒤면 데스포네 공작이 황제와 함께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
“대신, 제 말이 사실이면 윙필더 가문의 안전은 반드시 보장해 주셔야 합니다.”
리오넬이 그를 힐끔 일별하던 순간이었다. 뎅-. 묵직한 종이 울렸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여 하늘만 올려다보는 사이, 홀로 냉정을 찾은 리오넬이 명령을 내렸다. 두 번째 종이 울리기도 전이었다.
“황궁 정문에서 총공격을 감행하라 전해라.”
그의 명령을 받은 기사가 달려감과 동시에 종이 또다시 울렸다. 리오넬은 냉혹한 얼굴로 철문을 바라보며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도적이, 곧 모습을 드러내리라. * * *
“이게 무슨 소리야?”
황궁의 보물이 가득 찬 궤를 실은 마차를 확인하며 떠날 채비를 끝내던 데스포네 공작이 놀라 숨을 멈췄다. 뎅-.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가 빗줄기를 가로질러 그를 뒤흔들었다.
“첨탑의 종입니다!”
레녹스가 첨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공작은 오한이 밀려들어 떨리는 손으로 인근에 서 있던 병사의 등을 떠밀었다.
“너, 가서 황제 폐하를 모셔와라. 어서!!”
“예? 네!!”
“만약, 만약…… 승하하셨다면, ……시신이라도 업고 와. 어서!!”
인두겁을 쓴 짐승이 이러할까. 병사는 희게 질린 얼굴로 얼른 몸을 돌려 빗속을 가로질러 달렸다. 때아닌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텅 비다시피 한 황궁 안이 급격히 어수선해졌다. 황제를 지키고자 성벽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과 소수의 귀족도 크게 동요하며 우왕좌왕했다.
“폐하께서 승하하셨대!”
불안한 고함 소리가 어딘가에서 터져 나오기 무섭게, 황궁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가 지축을 울려 댔다. 어둠에 휩싸인 황궁 안과는 대조적으로 성벽 너머가 불야성처럼 환해졌다.
“공작 전하, 일단 움직여야 합니다! 황궁 문이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레녹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디안, 이 미련한 것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디안을 데려오라 보냈던 시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디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황제도,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 알려진 디안도 사라졌다. 황가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마저 사라진 절망적인 상황.
“황궁 문을 열어라!!!”
황궁 밖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에 데스포네 공작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이, 일단 가자. 앞장서거라!!”
공작과 레녹스는 마차마저 버리고 궤를 든 시종 몇 명과 호위 병사 몇 명을 대동한 채 황궁의 은밀한 샛길로 피신했다. 헨리 윙필더가 이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약조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데스포네 공작은 이를 갈았다. 반드시 이 원한을 되갚고 말리라! 감히 그를 배신한 귀족들과 마법사들에게도 엄벌을 내리리라!
“이 나라가 누구의 것인데. 누가 이만큼 키웠는데!”
울분이 터져 나왔다. 좁고 질척한 진흙으로 엉망인 길을 한참이나 가로지르자, 말단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스포네 공작은 급한 마음에 철문을 여는 병사 뒤로 바짝 붙어 섰다. 이음새가 맞지 않아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 순간, 데스포네 공작 일행을 맞이한 건 절망적이게도 헨리 윙필더가 아니었다. 비를 맞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리오넬 헤르베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