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당신은 나를 미치게 만듭니다2022.03.29.
꽉 잠긴 목소리에 리오넬의 영혼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아델이 이불에서 다리를 빼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리오넬.”
별에 물체가 끌려가듯 리오넬은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고작 몇 걸음이었으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리오넬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아델을 올려다보았다. 매끈하고 단아한 얼굴이 꿈결 같았다. 아델도 엉망으로 흐트러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자 날카롭게 벼려진 눈매가 일그러지며 눈동자가 혼탁하게 물들고,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매가 살짝 벌어졌다. 아델은 좀 더 대담하게 손끝으로 일그러진 눈매를 살살 쓸다가 입술 끝을 지분거렸다. 손끝에서 뜨겁고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우악스러운 마수 앞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던 남자가 가느다란 손길에 흐트러지고 뜨거워지는 모습에, 기이한 고양감이 들었다. 손끝이 단단한 치열에 닿으니 반쯤 벌어졌던 입술이 다물렸다. 리오넬이 새하얀 손끝을 입에 물고 그녀를 올려다보자, 희롱하듯 그의 입술을 지분거리던 아델은 온몸이 저릿해지는 감각에 입술을 짓씹으며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투명하게 젖어 번들거리는 손으로 리오넬의 뺨을 감싸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델.”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제 이름을 속삭였다. 그러고는 그의 이성을 포말처럼 갈아 버릴 말을 주문처럼 내뱉었다.
“내 이름을 줄 테니, 그대의 밤을 내게 주면 안 될까.”
이 사람은 악마고, 마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뇌가 곤죽이 된 것처럼 녹아내리게 만들 수 있을까. 리오넬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했다.
“아델.”
귓가를 파고드는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담자, 수천 마리의 나비가 심장 언저리에서 날갯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공허하여 술렁이던 가슴이 꽉 메워진 것만 같은 충족감이 들었다. 아델은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다시.”
리오넬은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는 심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아델, 아델, 아델…….”
상처 입은 짐승의 신음 같은 남자의 목소리에 아델은 더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여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그의 굵은 목덜미를 휘감자, 리오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올렸다. 얇은 침의 사이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에 손끝이 녹아 달라붙는 것 같았다.
어느새 침대 위로 쏟아지듯 넘어지자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간질이며 어깨 위로 드리워졌다. 숨이 모자란 듯 아델이 다급히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 거리를 벌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흐트러진 남자의 목울대가 목을 뚫을 듯 거칠게 불거져 있었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성난 듯 뾰족한 그것을 천천히 쓸었다. 그의 목에서 펄떡이는 맥박과 깊은 울림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리오넬은 일그러진 얼굴로 아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이지…… 나를 미치게 만듭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겹쳐졌다. 옷 너머의 체온이 용광로처럼 뜨겁다.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쇳물처럼 완전히 녹아 스며들고 싶다. 부옇게 성에가 낀 침대 맡 유리창에 달빛이 부드럽게 갈려 은은하게 두 사람 위를 비추었다.
“아델…….”
“리오넬, 리오넬…….”
서로의 이름을 속삭이는 밤이 깊어 갔다. * * * 먼동이 희붐하게 밝아 왔다. 밤새 창을 두드리던 거센 비도 어느새 멈췄다. 리오넬은 달빛처럼 보얀 아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느린 숨을 몰아쉬다가, 몸을 조금 일으켜 제 팔을 베고 잠든 그녀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섬세한 속눈썹 아래 곱게 감긴 눈매, 볼록한 이마에서 코끝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 살짝 벌어진 도톰하고 붉은 입술, 둥근 귓바퀴, 티 하나 없는 맑고 흰 피부. 리오넬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관자놀이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내내 그의 이름을 속삭이던 그녀는 어느 순간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여린 숨소리가 사랑스러워서, 품에 안긴 그녀가 믿기질 않아서, 리오넬은 밤새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다시 돌아온 그녀를 마주한 그 광야에서부터 기실 모든 것이 그에게서 밀려났다. 아델라이드, 그녀만을 제외하고. 리오넬은 아델의 어깨에 도로 얼굴을 묻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매만지고, 탐하고, 늘어졌다가 다시 웃고.
“리오넬.”
막 잠에서 깬 듯 몽롱한 목소리에 리오넬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팔을 베고 모로 누워 잠을 자던 아델이 정면으로 돌아눕자, 리오넬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델.”
나직한 부름에 아델은 목을 움츠리며 가늘게 떨었다. 밤새 격정에 못 이겨 그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떠오른 탓이었다.
“아델.”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에 아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웃었다. 몸을 돌려 그의 너른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단단한 근육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게선 사향 냄새가 났다. 그녀가 야성이 섞인 듯한 그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시는 동안 리오넬은 그녀의 날씬한 등허리를 매만졌다. 늘 반듯하게 빛나던 금빛 눈동자가 달무리처럼 우아하게 흐려진 모습에 리오넬의 본능이 거칠게 출렁였다. 이윽고 희미하던 빛이 선명해지며 사물의 윤곽이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 달과 바다는 몇 번이나 더 겹쳐졌다. 아델은 물끄러미 그를 마주 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고트로프에 다녀올게.”
“…….”
“최소한 황제께 직접 말씀을 드려야 해. 그러고 다시 올게.”
리오넬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아델은 그의 반응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간밤, 그녀는 충족감에 몸부림치며 환희했다. 이 방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리오넬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만을 오롯이 담고 있는 검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델은 그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리오넬은 그 어느 순간에도 그녀를 이길 수 없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쉬움이 가득 묻은 얼굴로 아델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춘 다음 마지못해 일어났다.
“혹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연락 주십시오. 제가 가면 됩니다.”
“응.”
“……당신은, 제가 어떤 마음인지 모르실 겁니다.”
애끓는 목소리에 아델은 그의 귓바퀴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우람한 어깨가 바싹 굳는 것이 느껴졌다. 아델은 그의 귓가에 조그마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탄탄한 근육이 바짝 조여지며 남자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랑해.”
아델이 새처럼 바스락거리며 그의 품에 몸을 묻자 리오넬은 거친 숨을 토하며 그녀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역시나 위험할 만큼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 사랑스러우며, 사랑스러운 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여자다. 이렇게 해 놓고 가 버리는 것은, 고문 아닌가?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사랑합니다. 제 목숨보다 더.”
* * * 완전히 날이 밝자 홀연히 나타난 긱스 부인이 늘 그랬듯 아델의 짐을 손수 꾸리며 이것저것 잔소리를 했다. 아델은 늘 그랬듯 노부인의 잔소리를 묵묵히 들어 주었다. 아델이 말에 오르려는데, 돌연 후작저 입구가 소란해지더니 엘리자베타가 불쑥 나타났다. 엘리자베타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아델을 향해 달려왔다. 아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정중히 예를 갖췄다. 엘리자베타는 아델의 손을 꽉 움켜쥐며 품에서 두툼한 문서 하나를 꺼내 아델에게 안겨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돌아오시오. 꼭 돌아와야 하오. 에흐몬트는 그대가 필요하니.”
아델은 고개를 갸웃하며 엘리자베타가 내민 서류를 넘겨보았다. 그것은 데스포네 공작의 소유였던 작위와 막대한 봉토를 아델라이드에게 양도한다는 문서였다.
“!!”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을 본 엘리자베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땅의 주인이 없어졌소. 그러니 그 땅을 대신 맡아 주시오. 더불어, 나는 그대에게 에흐몬트에도 고트로프처럼 탑 대항본부를 창설해 달라고 청하고 싶소.”
아델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와야 하오.”
“예, 그러겠습니다.”
엘리자베타는 아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엘리자베타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뒤, 아델은 더 미련이 남기 전에 떠났다. 리오넬은 성곽에 서서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부는 바람이 한없이 차가웠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쯤 그녀가 올까.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혹독한 겨울이 될 것 같다. * * * 아델이 떠난 뒤, 엘리자베타는 즉위식을 거쳐 황좌에 올랐다. 카를의 죽음으로 제1 계승권자인 그녀가 황좌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라가 도탄에 빠진 만큼 즉위식은 단출하게 거행되었다. 황위에 오른 엘리자베타는 이전 아델라이드 황후가 그리했듯 즉위식에 사용할 예산 대부분을 빈민 구제 기금으로 돌렸다. 한때 데스포네 공작의 편에 섰던 지방의 귀족 세력들도 그녀에게 달려와 충성을 맹세했다. 공작이 죽어 버렸으니,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고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타는 선대 황제 카를의 폭정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에흐몬트 곳곳을 재건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부단장으로 임명된 브룬힐 알렉사는 마법사단을 재편성하여 긴급 구호에 나섰다. 푸아티에 남매가 착복했던 상당량의 재산이 슬럼 재건 사업으로 쓰였다. 마법사단 단장의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었는데,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델라이드가 돌아올 것이란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위식 이후에도 리오넬 헤르베르트는 잠시라도 쉬면 병이 나는 사람처럼 종횡무진 움직였다. 마법사단과 함께 마수 토벌에 나서기를 한참, 보다 못한 테세우스가 인제 그만하라고 타박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올 사람은 오게 돼 있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즉위식 자리에서 폐하께 다시 결혼해 달라 청한 형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
한마디로 형의 입을 막아 버린 리오넬은 습관처럼 성곽으로 나가 광야를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대지 위로 눈송이가 솜이불처럼 쌓였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질 정도로 차가운 날씨였다. 지금쯤 고트로프에 도착하셨을까. 리오넬의 시선이 먼 곳을 더듬었다. 이대로 잠들어 그녀가 오는 날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 * 리오넬의 예상대로, 그 무렵 아델은 고트로프에 도착했다. 그녀보다 일주일 먼저 도착했다는 기벨린이 황소처럼 그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테오도르 시니악을 비롯한 많은 친우가 달려 나와 눈물을 쏟아냈다.
“황녀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에흐몬트, 이 잡것들을 제가 당장 가서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황녀님 얼굴 상하신 거 봐요, 으허헝…….”
“아, 이건 여정에 지쳐서 그런 거야.”
아델은 몰려드는 동료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렇게 떠나 보낸 카인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을 귀신같이 눈치챈 기벨린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 녀석, 잠시 녹스 본가로 돌아간 탓에 오지 못했습니다.”
아델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친우들의 어깨너머로 금안의 청년이 나타났다. 아델에게 이리저리 엉겨 붙어 있던 이들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자리를 비켜 주자, 아델은 옷차림을 가다듬고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루시오는 오랜만에 만나는 누이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갔다. 한참 만에 만난 누이는 조금 여윈 듯했으나, 어쩐지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루시오는 누이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떠나기 전, 이미 아델보다 덩치가 컸던 루시오는 못 보던 사이 더 자란 것 같았다. 아델은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마주 안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속삭이는 목소리에 고트로프 황제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치밀었다.
“그렇게 잔인하게 가시면 어찌합니까?”
더 잔인한 말을 꺼내야 하는 아델은 입술을 물며 동생의 어깨를 안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 * * 황제의 집무실로 돌아온 남매는 마주 앉았다. 아델이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동안, 루시오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묵묵히 경청했다. 이윽고 아델이 말을 끝마쳤을 때, 루시오는 이렇게 물었다.
“그것이 누이가 진정 원하는 길입니까?”
그의 물음에 아델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언젠가, 내가 이 길을 후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가 보지 않고 하는 후회가 더 클 것 같아.”
“그를 사랑하세요?”
“응.”
망설임 없이 나오는 대답에 루시오는 비로소 눈을 휘며 웃었다.
“누님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니…… 저도 꼭 만나 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