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봄
(105/127)
105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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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봄
2022.04.02.
“기회가 있을 거야.”
아델이 빙긋 웃으며 답하자, 루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랍에서 붉은 주머니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 들었지만, 아델은 열어 보지 않고도 그것의 존재를 눈치챘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감각이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 고트로프에 도착한 기벨린 루한은 황제에게 이것을 내밀며 무릎을 꿇었다.
‘단 한순간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본 적 없으신 황녀께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부디 그분의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 폐하.’
루시오는 아델이 그를 만나러 돌아올 것임을 알았다. 그런 누이였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간, 그는 매 순간 그녀의 신분패를 손에 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답은 하나였다.
“누님. 어디에 계시든 누님은 고트로프의 황녀이며, 제 누님입니다. 그러니 가져가세요.”
“아니다, 루시오.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어. 고트로프의 황녀로서 본분을 다하지 않…….”
“무슨 본분이요? 이미 누님의 평생을 바쳤는데, 또 무엇이 남았단 말입니까?”
“…….”
“가져가세요. 그리고 제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바로 달려갈 테니.”
그녀와 똑 닮은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루시오는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어느새 굳건히 자라 그녀를 받쳐 주겠다 말하는 동생의 믿음직한 모습에, 아델 역시 결국 웃고 말았다.
* * *
아델이 머무는 사흘 내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친우들이 죄다 몰려든 통에 고트로프 황궁은 조용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태후는 한 번도 딸을 찾아오지 않았고, 아델도 어머니를 찾아가지 않았다.
루시오는 아델에게 봄이 되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냐 제안했지만,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던 서늘한 방의 감촉과 야성 섞인 체취가 밤만 되면 아델을 괴롭혔다. 하루라도 빨리 에흐몬트로, 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흘째 되는 날, 아델은 에흐몬트로 떠날 채비를 끝냈다.
루시오는 아델에게 국혼에 버금가는 준비를 해 주겠다 성화였으나, 아델은 그 모든 것을 정중히 거절했다.
고트로프에 그녀 명의로 남아 있던 토지와 재산도 모두 황실에 반납했다. 아델은 가볍게 왔던 것처럼 가볍게 떠나고 싶어 했다.
그녀가 떠나는 날, 황제 루시오를 비롯한 신료들과 친우들이 몰려나와 그녀를 배웅했다.
아델이 에흐몬트로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지만, 황제의 강건한 의사가 변함이 없자 곧 수그러들었다.
태후가 문제를 제기했다면 논쟁이 제법 길어졌겠으나, 의외로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태후는 마지막까지도 딸을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
아델과 호위들이 황궁의 외곽을 지날 무렵, 길가에서 홀연히 누군가가 나타났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고아한 자태의 여인은, 아델과 지극히 닮아 있었다. 끝내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던 태후였다.
이를 발견한 아델은 고삐를 잡아당겨 멈춰 선 뒤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태후는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회할 텐데.”
“아뇨.”
“리오넬 헤르베르트라 했니?”
“네.”
“발드르 가문의 후손이라지. 그 가문은 들어 봤다.”
“맞아요.”
태후는 딸의 뒤를 따르고 있는 호위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마차는커녕 시중들 시녀 한 사람 없는 단출한 일행. 에흐몬트 황제와의 국혼을 위하여 유배 보내지듯 혈혈단신으로 떠났을 때보다도 더 보잘것없는 모습을 본 태후의 낯이 차갑게 굳었다.
“너는 고트로프의 황녀다. 차라리 정식으로 다시 국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니.”
태후의 고아한 음성에 아델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뭐?”
“한시라도 빨리, 그 사람 옆으로 가고 싶어서 그래요.”
제 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태후는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아델라이드 황녀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에흐몬트 황후가 되기 위해 떠났을 때는 도자기 인형처럼 잔뜩 굳어 있던 딸의 얼굴이, 지금은 한 줌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온통 생기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델은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마 어머니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리라.
“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아델이 무릎을 구부리며 예를 갖추자, 그제야 정신이 든 태후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래.”
잘 살라는 말 한마디 없는 냉담한 모후의 태도에도 아델은 그러려니 했다. 그녀가 아는 어머니는 원래 그런 분이셨으니까.
“용서하세요. 건강하시고요.”
딸의 마지막 인사에 태후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고트로프 황가의 번영을 위해, 그리고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루시오를 위해 버리듯 보냈던 딸이다.
누구보다 태후 자신을 닮았기에 그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그만큼 경계 되었던 딸. 탑에 대한 의견이 갈리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사이였지만…….
아델이 말에 오르는 순간, 태후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다급히 물었다.
“그것은 버렸니?”
아델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태후는 숨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네가 가지고 갔던, 그 약병들 말이다.”
그에 아델은 옅게 웃었다.
“알고 계셨어요?”
“…….”
“버렸어요.”
태후는 작은 한숨을 내쉰 뒤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러고는 이내 어깨를 반듯하게 펴며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그럼 됐다. 가거라.”
모녀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안녕을 고했다.
태후는 멀어지는 아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왜인지 눈물이 치밀었다.
황실의 권위를 위협하는 딸을 황태녀 자리에서 끌어내리면서도, 생면부지 낯선 땅에 황후가 되어라 홀로 딸을 보내면서도, 그리고 그 딸의 짐꾸러미 속에 극약을 발견하고서도 눈물 흘린 적이 없건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진 딸의 얼굴만이 오래오래 잔상처럼 남았다.
* * *
축축하고 서늘한 고트로프의 겨울을 가로질러 항구에 도착한 아델은 에흐몬트로 향하는 배에 미련 없이 몸을 실었다. 처음 떠나던 날처럼 짠 바다 냄새가 물씬 났다.
깊은 울림을 내는 고동 소리와 함께 배가 출항하자 아델은 난간에 서서 고트로프를 바라보았다. 깊고 울창한 산림이 배웅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고트로프의 항구와 산야를 가슴에 새기듯 천천히 바라보던 아델의 시선이 다급히 달려오는 한 사람에게 닿았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며 소리쳤다.
“카인!!!!”
카인은 깊고 넓은 바다에 가로막혀 멈춰 선 채 가슴을 들썩이며, 멀어지는 아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인할 만큼 냉정하게 고트로프에서의 모든 것을 잘라 낸 그녀가 원망스럽고도 서러웠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항구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강렬하고 날카로운 첫사랑이었다. 평생을 가져갈 아픔을 주었으나, 잊지 못할 설렘과 행복도 알려 준 사람이었다.
그녀가 떠나가고 있었다.
카인은 울음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옷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이를 본 아델 역시 슬픔이 어린 얼굴로 난간 밖으로 내밀었던 몸을 바로 하며 손을 흔들었다.
육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꾸만 배를 밀어냈다. 출렁이는 겨울 바다 위로 반짝이는 윤슬이 아름다웠다.
온몸으로 만끽했던 녹음, 흙 묻은 얼굴을 마주 보며 웃던 친우들이 점점 멀어진다. 화려하게 허무했으나, 그럼에도 찬란했던 그녀의 시간이 반짝이며 안녕을 고했다.
“안녕, 카인. 안녕, 고트로프.”
눈물이 흐를 새도 없이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다.
아델은 카인과 고트로프가 작은 점처럼 변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 *
그해 겨울, 에흐몬트엔 한파가 몰아쳤다.
브룬힐 알렉사를 중심으로 한 마법사단은 생각보다 많은 애를 먹고 있었다. 아델이 오기 전까지 파괴하리라 마음먹었던 탑의 개수를 절반도 처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엘리자베타의 명령에 의해 가장 가까운 칼뱅 백작령의 탑을 처리하는 데만도 꽤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다.
엘리자베타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한시라도 빨리 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델을 기다리는 것은 비단 엘리자베타뿐만이 아니었다.
리오넬은 아예 아델이 머물렀던 방으로 침실을 옮겼다. 그는 늘 아침 일찍 출근하여 저녁 늦게나 집에 돌아왔는데, 하루가 다르게 표정이 사라졌다.
보다 못한 헤르베르트 집사가 발드르 공저로 달려가 테세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 이유로 현재 후작님께서는 매일같이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는 듯합니다. 상사병이 아닌가 걱정이 됩…….”
하지만 사실 테세우스도 크게 속앓이를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황제가 그의 청혼을 에둘러 거절했기 때문이다.
‘황족의 배우자에 대한 법안이 여전히 건재하오. 그리고 작금의 나는 발드르 공작의 힘이 필요하지.’
그렇게 답하는 엘리자베타에게 테세우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그는 거무죽죽한 얼굴로 헤르베르트 집사를 돌려보내 버렸다.
한동안 소리 없이 죽어 가던 리오넬의 정신을 깨운 것은 저택이 좀 음산해서 무섭다는 사용인들의 중얼거림이었다.
헤르베르트 후작저는 기본적으로 훌륭한 저택이었으나, 워낙에 역사가 오래된 데다 아델을 지원하기 위해 리오넬이 급하게 작위 승계 후 거처를 옮기면서 대규모 단장은 과감히 생략한 탓에 전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모습 그대로였다.
고급 가구에나 사용할 법한 다갈색 마호가니와 흑단을 아낌없이 사용한 실내 인테리어는, 좋게 말하면 중후했고 나쁘게 말하면 고루하고 음침했다.
인테리어도 유행을 타는 법! 리오넬은 당장 저택 내부공사에 돌입했다.
그 무렵 엘리자베타와의 지지부진한 관계로 인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테세우스는 “그분이 돌아오셔서 이곳에 머문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며 이죽거렸으나, 리오넬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무시했다.
아무래도 사내의 안목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리오넬은 긱스 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황궁 총관리인으로 복귀한 노부인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공사를 진두지휘했고, 덕분에 저택은 날로 화려하고 아늑하게 변해 가는 중이었다.
리오넬은 평생 관심도 없던 조경부터, 샹들리에, 하다못해 작은 오브제까지 신경을 썼다.
후작저 꼭대기 층의 방 세 개를 터서 넓은 가족실을 만들었고, 찬장엔 그녀가 좋아하는 밀주를 가득가득 쌓아 놓았다.
심지어 황궁의 문턱이 닳도록 긱스 부인을 찾아가 조르다시피 하여 아델의 드레스들도 준비하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자베타가 실소할 정도였다.
“내가 알던 장관이 맞나 싶은데?”
황제가 황당해하든 말든 노부인과 리오넬은 진지하게 드레스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디자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는 편이지만, 허리와 가슴을 과하게 조이는 것은 싫어하셨습니다.”
“그럼 둘 중 어느 것이 낫단 말인가?”
“음…… 이쪽이 낫겠군요. 제가 의상실에 연락하여 후작저에 방문하라 이르겠습니다. 늘 거래하던 곳이니 알아서 잘해 줄 겁니다.”
“아, 그럼 혹시 구두는…….”
우람한 체격의 후작이 자그마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카탈로그를 어색하게 넘기며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긱스 부인에게 자문을 구하는 진풍경이 매일 이어졌다.
긱스 부인의 엄한 눈초리에 곧 사라지기는 했지만, 궁의 사용인들까지 몰려나와 그 모습을 훔쳐볼 정도였다.
부인은 아델의 일이라면 열 일을 제쳐 두고 적극적으로 임했고, 덕분에 겨우내 이런 모습을 궁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 * *
겨울이 완연한 어느 날, 간밤 내린 눈에 말도 사람도 꼼짝할 수가 없게 되자 리오넬은 아주 오랜만에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리오넬은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의 창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따뜻한 실내 온도에 성에가 잔뜩 낀 유리창을 보자니, 그날 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때의 냄새, 온도, 숨결 하나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늘 성가시다 생각했던 빗소리조차 지금 떠올리니 설렐 뿐이었다.
리오넬은 아델의 베개를 끌어안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태양처럼 강렬하던 그녀가 달무리처럼 우아하게 흐려지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차라리 그 밤을 함께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았을까?
하지만 그녀가 내민 손을 그가 감히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아델, 아델…… 아델.”
리오넬은 습관처럼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들이치며 눈송이가 뺨에 달라붙었으나, 뜨겁게 달궈진 체온에 오히려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침실 아래 펼쳐진 정원엔 봄꽃이 유난히 아름답다는 정원수를 가득 심은 참이다.
하얀 눈이 녹아 사라지고 따사로운 계절이 돌아오면, 그녀가 올까? 봄을 좋아한다고 하셨으니, 아름답게 꽃이 피면 함께 봄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녀의 하얀 손을 소중히 잡은 채 정원을 거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 가득 충만함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리오넬은 눈으로 가득한 정원을 내려다보며 오래도록 서 있다가 창문을 닫았다.
* * *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도 시간이란 놈이 끌고 가 버리자, 파르라니 여린 것들이 가지 끝에서 빼꼼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긴 겨울 동안, 테세우스는 끝내 구애에 성공했고, 에흐몬트는 엘리자베타의 치세 아래 빠르게 안정화되고 있었다.
그간 데스포네 공작이 저지른 비리는 파고 파고 또 파도 끊임없이 쏟아졌다. 재정청의 부정부패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유골에라도 화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데스포네 이 개 같은 자식!!”
엘리자베타는 끝도 없이 드러나는 데스포네 공작의 악행에 치를 떨었다.
그녀는 탑 파괴뿐 아니라 슬럼 문제 해결에도 박차를 가했다.
물론 오랜 기간 곳곳에 형성된 거대 슬럼의 고질적인 문제를 한 계절에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델의 지시로 시작된 수도 공사는 겨우내 해결되었다.
엘리자베타는 거기에 더불어 학교와 병원을 지었는데, 공사 비용은 회수한 푸아티에 백작가의 돈으로 충당되었다.
헤르베르트 후작저의 정원사는 옮겨 심은 나무들이 싹을 틔울 것인지 노심초사했으나, 다행히 모두 여린 싹을 틔워 냈다.
긱스 부인은 틈만 나면 후작저로 찾아가 직접 아델의 방을 꾸며 주었고, 후작에게 은근히 언제 결혼식을 올릴 것인지에 대해 묻곤 했다.
그렇게 모두가 에흐몬트의 봄을 만끽하는 가운데, 딱 한 사람만이 홀로 겨울을 헤매고 있었다.
구애에 성공하여 심적 여유가 생긴 테세우스가 그제야 동생을 챙기려 하였으나, 그를 겨울에서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겨울눈을 뚫고 고개를 내민 잎사귀들이 몸을 펴기 시작할 무렵, 봄의 시작을 알리는 목련이 하얀 꽃망울을 터뜨렸다.
하얀 목련이 피었으니 이제 오실까.
리오넬은 종종 성곽에 서서 항구 방향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곤 했지만, 아델은 하얀 목련이 툭툭 떨어질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 * *
잎사귀들은 조금 더 색이 짙어지고, 뒤이어 봄꽃들이 하나둘씩 작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색색의 봄꽃들이 제 색을 드러내니 겨우내 푸르름을 간직했던 사철나무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것 같았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성곽 밖 광야의 들꽃마저 만발한 어느 날, 리오넬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관저에서 업무를 보던 리오넬은 그 편지를 받아 들자마자 황궁을 뛰쳐나갔다.
“무슨 편지길래?”
막 결재를 받기 위해 관저에 들어오던 앙리 자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지나가던 기사 하나가 대꾸했다.
“무슨 편지겠습니까? 다 제쳐 두고 달려 나가시잖아요.”
그에 앙리의 눈이 길게 휘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리오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결재판을 등 뒤로 숨겼다.
“뭐…… 급한 것도 아니니, 한 일주일쯤 뒤에 와야겠네.”
한편,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 성문을 박차고 나간 리오넬이 향한 곳은 에흐몬트 성곽이었다.
온화한 바람에 일렁이는 들꽃 무리가 따뜻한 감동을 일으킬 법도 하건만, 리오넬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거세게 뜀뛰었다.
기다림의 한 계절이 평생처럼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편지에서 아델은 오늘 도착할지 내일 도착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고작 하루쯤은 이 자리에 서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리쬐는 태양이 검푸른 머리 꼭대기에 닿았다가 서서히 서쪽으로 미끄러졌다. 가없는 대지의 끝자락을 태양의 붉은 발꿈치가 내딛자, 세상은 연한 핑크빛과 금빛이 뒤섞여 아름답게 빛났다.
드러누운 빛에 들꽃들이 제 키보다 더 큰 그림자를 만들어 낼 무렵이었다. 성벽에 기대 있던 리오넬이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태양이 발을 디딘 지평선의 끝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성곽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려 리오넬은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람의 손길이 들풀의 머리를 매만지는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코끝을 건드리던 완연한 봄꽃 향내도 사라지고, 휘날리는 국기의 펄럭임도 사라졌다.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말을 달리는 여자의 모습에 리오넬은 압도당했다.
그의 세상을 사로잡은 그녀가, 그에게로 온다.
* * *
아델은 성문 밖에서 서성이는 이가 리오넬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하루 중 태양이 가장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 그는 태양보다 강렬하게 나타나 아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호위들이 따라붙지 못할 속도로 말을 몰던 아델은 별안간 말을 멈추고 만발한 들녘에 내렸다.
문득, 그 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델은 허리를 숙인 채 석양에 붉게 물든 사랑스러운 들꽃들을 툭툭 꺾어 들었다.
한 손 가득 들꽃을 꺾어 든 아델이 허리를 폈을 때, 부드럽게 물결치는 들녘의 파도를 헤치며 그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델은 달려오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노도처럼 밀려오는 행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 아름의 들꽃, 여정에 주름진 치마, 잡초가 무성한 흙밭.
꿈속에서 본 소박하기 그지없는 풍경 속에, 그녀와 그가 있었다.
그 어느 순간조차 느껴본 적 없는 따뜻한 충만감과 포만감이 밀려들었다.
나무의 뿌리가 힘차게 물을 빨아들여 작은 잎사귀 구석구석까지 양분을 보내듯, 들녘의 포근함이 아델의 두 다리를 통해 온몸 구석구석까지 번져 나갔다.
물을 흠뻑 먹은 싱그러운 꽃잎처럼,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 생명력이 가득했다. 늘 창백하던 얼굴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고, 날이 서 있던 눈매는 부드럽게 휘었다.
리오넬은 석양 속에서 홀로 빛나는 아델의 매혹적인 모습에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델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있는 힘껏 그를 불렀다.
“리오넬!!!”
수천수만 번 들었던 이름이건만, 황량한 회색빛 겨울을 걷고 있던 리오넬의 세상이 그녀의 부름에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색채로 물드는 풍경을 만끽하며 리오넬은 수천수만 번 홀로 되뇌었던 이름을 있는 힘껏 불렀다.
“아델!!!”
아델이 그를 향해 달렸다.
뺨을 스치는 온화한 바람, 두 사람을 끌어안는 강렬한 석양, 온 세상을 가득 메운 달콤한 향기가 그녀의 시간에 스며들었다.
그에게 점점 가까워질수록, 화려하게 허무했던 그녀의 계절이 드디어 흐르기 시작했다.
황금빛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투명하게 비쳐드는 순간, 아델이 있는 힘껏 리오넬을 끌어안았다.
그 역시 압도적인 힘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맞닿은 탄탄한 가슴에선 누구의 떨림인지 모를 떨림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아델은 꽃망울처럼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황량한 겨울이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도래했다.
리오넬.
간절히 소망하던 나의 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