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뜻밖의 경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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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뜻밖의 경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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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뜻밖의 경쟁자
2022.04.05.
아델이 수도 관문을 통과했다는 말에 엘리자베타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 나왔다. 그 소식을 전한 긱스 부인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마법사단 관저에서 단장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던 브룬힐도 반색하며 뛰쳐나왔는데, 왜냐하면 꽤 많은 일이 ‘아델라이드가 돌아오면’이라는 가정하에 미결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리오넬은 저 먼 곳에서부터 황제를 필두로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는 무리를 보며 미간을 굳혔다.
이미 해는 기울었고, 오래간만에 재회한 아델과 한시라도 빨리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한데 저들은 왜 저렇게 반가워 마지않는 표정으로, 지금 당장 아델을 데려갈 것처럼 오고 있는지!
아니나 다를까, 엘리자베타는 리오넬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왜 이리 오래 걸렸소?!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오?!”
리오넬은 몇 년 만에 만난 연인처럼 절절하게 아델에게 매달리는 황제를 불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브룬힐이 어느새 그와 아델 사이로 끼어들며 아델의 로브를 슬그머니 잡아 쥔 것이다.
“다시 뵈니 정말 반갑습니다.”
순식간에 아델에게서 더 멀리 밀려난 리오넬의 검고 짙은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하는 수 없이 아델의 등 뒤로 돌아 상대적으로 비어 있는 왼편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그곳을 선점한 사람이 있었으니, 은백발을 꼼꼼하게 틀어 묶은 노부인이었다.
“여정이 길었지요? 많이 여위셨네요.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황궁 요리사에게 언질을 준 참이니, 어서 가서 저녁을 드시지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완전히 뒤로 밀려나 버린 리오넬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저, 부인. 일단은 후작저로 모실 생각이…….”
리오넬이 다급하게 중얼거렸지만, 노부인은 엄격하고 깐깐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
그 서슬이 시퍼런 눈빛에 리오넬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고, 노부인은 위엄있는 표정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아델라이드 황녀님께서 귀빈이심에도 한때 후작저에 머무신 것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었지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예법에 맞게 황궁에 계실 곳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반박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옳은 말이었다.
궁지에 몰린 리오넬이 다급하게 아델을 바라보았으나, 예법에 익숙한 황녀님께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야속하게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엘리자베타는 망연자실한 리오넬의 표정을 관망하며 아델의 팔을 꼭 끌어안듯 붙잡았다.
“하염없이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떠나기 전 약속했던 작위와 봉토, 그리고 수도에서 지낼 저택까지 빠짐없이 마련해 두었소. 작위 수여를 마치고 나면 내가 준비한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고, 오늘은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가지.”
황제의 유혹에 리오넬은 침음을 삼켰다.
겨우내 아델을 기다리며 후작저를 새로 단장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준비했지만, 황제가 아델에게 하사하겠다는 작위와 봉토, 대저택에 비하면 밀려도 한참 밀리는 것 같았다.
아델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이끌며 걷기 시작하는 황제를 마주 보며 옅게 웃었다.
“데스포네 공작이 소유했던 작위와 봉토라면 그 규모가 엄청날 텐데, 반발이 심하지는 않았습니까?”
“하하, 다들 어서 그대를 모시고 오라 난리였소. 아, 당장 내일부터 마법사단장으로 일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실은 하루가 급한지라.”
“맞습니다, 꼭 내일부터 나와 주십시오. 모시러 가겠습니다.”
브룬힐이 아델의 뒤를 따르며 말을 덧붙였고, 긱스 부인은 구겨진 아델의 로브를 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에게 떠밀리듯 걸음을 옮기던 아델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세 여자에게 아델을 빼앗긴 리오넬이 꼭 받은 선물을 뺏긴 아이처럼 불만스러운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델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리오넬.”
웃음기 섞인 부름에 리오넬도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자베타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은 나와 함께 마음껏 회포를 풀어 보도록 하지!”
* * *
두 여자의 저녁 식사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테세우스와 리오넬은 엘리자베타와 아델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빠르게 사라지는 술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심지어 그녀들은 술 취향마저 비슷했다.
“이 좋은 것을 희석해서야 되느냔 말이지!”
독한 밀주 원액을 호쾌하게 들이켜는 두 여자를 보며 동석한 형제는 당장이라도 이 술자리를 끝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들의 힘만으론 역부족이었다.
“인제 그만 드시지요.”
“테세우스, 좋은 자리에서 잔소리는 그쯤 하지.”
“너무 독합니다.”
“리오넬, 이렇게 좋은 것은 그대로 즐겨야 한다니까.”
결국, 리오넬과 테세우스는 이 자리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지원군을 데려왔다. 긱스 부인은 진동하는 술 냄새에 쌍심지를 켰다.
“아니, 지금 이렇게 독한 술을 희석도 하지 않고 마시고 계시단 말입니까?! 그러다 속이라도 상하면 어쩌시려고요?”
그 서릿발 같은 기세에 찔끔한 황제와 아델은 눈을 껌뻑이다가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부릅뜬 노부인을 피해 각자의 방으로 곱게 흩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깬 아델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으으…….”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깨질 듯한 두통에 신음하며 도로 누워 나른하게 늘어진 채로 화려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유려한 선이 돋보이는 샹들리에가 천장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곳은 한때 엘리자베타가 머물던 궁으로, 현재는 귀빈 접대를 위한 곳이었다. 아델은 하릴없이 방 안을 둘러보다가 자꾸만 빗방울이 부딪히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창했던 어제 날씨가 무색하리만치 비구름이 잔뜩 끼어 어둑어둑했다.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니 날씨도 쌀쌀하리라.
그때,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더니 긱스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과 수건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부인은 아델이 깬 것을 발견하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아, 부인……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난 것은 아니오?”
“적당한 시각에 눈을 뜨셨군요.”
긱스 부인은 한편에 마련된 트롤리에 가져온 것을 내려놓은 뒤, 콘솔 위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들어 컵에 대고 기울였다.
“딱 드시기 좋게 식었군요.”
“차인가? 아니, 찻잔이 아닌 걸 보니 차는 아닌 것 같은데.”
노부인은 눈썹을 까딱이며 작은 받침에 컵을 올려 아델에게 가져왔다.
“한 번에 쭉 들이켜세요.”
긱스 부인이 코앞에 내민 것은 거무죽죽한 색의 액체였다. 딱 보기에도 몸에는 좋지만 맛은 끔찍할 듯해서 영 내키지 않았다.
입매를 굳히며 엉거주춤 컵을 받아 드는 아델에게 노부인이 다정하지만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다 마실 때까지 절대 물러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입술을 컵에 가져다 대는데, 냄새가 어찌나 쓰고 고약한지 아델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뭘 달였기에 냄새가 이런지…….”
“황제 폐하께서는 두 번에 나누어 드셨는데, 저는 한 번에 드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입을 떼는 순간, 마시는 데 시간이 두 배로 걸리니까요.”
그러니까 황제에게도 다 먹였으니, 잔말 말고 다 마시라 이거였다.
아델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커다란 눈을 몇 번이나 껌뻑이다가 결국 약을 쭉 들이켰다.
색과 냄새부터가 심상치 않던 약은 역시나 맛도 엄청나게 고약했다. 알고 있는 어떤 단어를 가져와도 이 맛을 설명할 길이 없으리라.
아델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약을 끝까지 들이켜자 긱스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속에 동그란 사탕을 굴려 넣어 주었다.
달콤새콤한 사탕으로 입안 곳곳의 쓴맛을 밀어내는 아델에게 노부인이 엄격한 얼굴로 나무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 분 다 그렇게 드시면 어찌합니까?”
분명 황제 역시 노부인에게 똑같은 잔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델은 머쓱한 얼굴로 사탕을 우물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헤르베르트 후작께서 입궁하시어 전하께서 괜찮으신지 확인하고 가셨습니다.”
“그랬소?”
노부인은 아델의 단장을 손수 해 주며 속삭였다.
“전하께서 고트로프에 가 계신 동안 어찌나 열심히 전하를 맞을 준비를 하던지요. 후작저를 싹 다 단장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고, 전하의 드레스는 물론 작은 브로치 하나도 직접 고르셨습니다.”
“…….”
“새로운 것이 보이면 그것이 작든 크든 모두 전하를 위한 것이니 알은체해 주세요.”
긱스 부인이 전해 주는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하고, 어쩐지 배 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델의 뺨에 발그레한 홍조가 이는 것을 본 노부인의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 * *
놀랍게도 그날 정오 무렵, 아델라이드의 작위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엘리자베타가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일이 진행될 줄 몰랐던 아델은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심지어 에흐몬트에서 작위를 받기 위해 아델이 필수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국적 변경 서류에 필요한 고트로프 황제의 증명까지 확보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준비했냐는 아델의 물음에, 엘리자베타는 은밀히 고트로프 황제에게 사절을 보냈다고 실토했다.
기동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예병을 보낸 덕분에 아델보다 하루 늦게 출발했지만 에흐몬트에는 하루 먼저 도착했다고도 덧붙였다.
루시오가 생각보다 순순히 아델을 보내 준 데에는 엘리자베타가 보낸 사절의 영향도 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타는 말 그대로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처럼 아델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엘리자베타는 아델에게 데스포네 공작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주고 싶어 했지만, 황제가 봉신에게 수여할 수 있는 것은 백작위가 한계였다.
엘리자베타는 이 사실에 몹시 불만스러워하며 아델을 위버링겐 백작으로 임명했다.
위버링겐은 데스포네 공작령을 관통하는 긴 강의 이름으로, 아델에게 주인 잃은 공작령을 수여하겠다는 황제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역시나 엘리자베타는 지도에서 ‘데스포네’라는 지명을 삭제하고 데스포네 공작령의 모든 토지뿐 아니라 수도에서 공작이 사용하던 대저택까지 통째로 아델에게 넘겼다.
그러니까 말이 백작일 뿐, 사실상 공작의 권위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하사한 셈이었다.
작위 수여식이 끝나자 귀족들이 몰려와 일제히 아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인사에 일일이 응대하던 아델은 한쪽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리오넬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다정한 표정으로 웃었지만, 아델은 그의 얼굴에 묻은 진한 아쉬움을 알아챘다.
그러나 두 연인은 제대로 된 해후는커녕 대화조차 할 틈이 없었다.
엘리자베타가 아델에게 이렇게 급박하게 공작에 버금가는 권한을 넘겨준 이유는 오직 하나. 아델이 에흐몬트 정식 귀족으로서 해 줘야만 할 일들이 ‘긴급’이란 이름으로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라의 귀빈을 부려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엘리자베타는 위버링겐 백작의 임명장에 채 잉크도 마르기 전에 막대한 서류를 아델에게 이관했다.
“……제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아델이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엘리자베타는 씩 웃으며 리오넬 쪽을 눈짓했다.
“리오넬 헤르베르트를 보내서라도 데려오려고 했지. 그러게 좀 일찍 오지 그랬소?”
아델이 고트로프에서 머문 시간은 고작 나흘이었으니, 순 억지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아델은 제 앞으로 쏟아지는 막대한 양의 서류를 훑어보고 밀려드는 마법사들을 상대하느라 숨 고를 틈조차 없었다.
아직 에흐몬트 제국 곳곳엔 탑이 수없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아델이 당장이라도 마법사들을 데리고 원정을 떠나야 함을 의미했다.
아델은 며칠 내내 먹고 자는 시간까지 할애하여 일에 매달렸다.
그리움에 못 이긴 리오넬이 틈틈이 그녀를 찾아왔지만, 너무나 바쁜 그녀의 모습에 차마 말조차 붙이지 못한 채 하염없이 아델의 얼굴만 바라보다 돌아가기 일쑤였다.
아쉽기는 아델도 마찬가지였다. 리오넬이 제 집무실에 들어온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그가 나가고 난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닫고 얼른 밖으로 뛰쳐나가기를 몇 번. 그러나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오늘도 리오넬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터덜터덜 후작저로 향했다.
아델이 얼마나 바쁠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트로프로 떠난 그녀를 기약 없이 기다리던 겨울보다 에흐몬트에 함께 있는 요즘이 더 힘든 것 같았다.
겨우내 그녀를 기다리며, 반지 하나 끼워 보내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하고 또 후회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가 돌아왔으니 어서 정식으로 청혼하고 싶은데, 서류 더미에 파묻힌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겠는가?
듣자 하니 곧 마법사단과 기사들을 이끌고 탑을 파괴하러 갈 모양이던데, 그럼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그녀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그를 맞이한 것은 평소와는 확연히 달라진 후작저였다.
뭔가 어수선한 것 같기도 하고, 들뜬 것 같기도 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집사가 반색하며 리오넬에게 달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