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고트로프 태후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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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고트로프 태후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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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고트로프 태후의 방문
2022.04.09.
“각하!”
“무슨 일 있는가?”
의아해하며 묻는 리오넬에게 집사는 씩 웃으며 따라오라는 듯 몸을 돌렸다.
새로 단장한 근사한 계단을 올라 크림색으로 화사해진 복도를 가로지르던 리오넬은 집사가 향하는 곳이 응접실임을 알아챘다.
응접실이라면, 손님이 왔다는 의미 아닌가.
리오넬은 집사를 앞질러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다가 결국 달렸다. 응접실 앞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들이 얼른 문을 열자, 며칠 내내 그를 애태우던 여자가 싱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리오넬은 아델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야수처럼 달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집사가 연인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자, 아델도 리오넬의 어깨를 마주 안았다. 거칠게 들썩이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그간 누적된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보고 싶어서 왔는데, 오길 잘했군.”
솔직한 그녀의 말에 리오넬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델이 그를 올려다보며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보고 싶었는데, 쏟아지는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어. 설마 돌아온 다음 날 작위를 수여 받을 줄이야. 데스포네 공작령에, 반역에 연루된 가신들의 봉토까지…….”
조급하게 맞붙는 입술에, 아델은 말끝을 흐리다 눈을 감았다.
뜨겁게 얽어 오는 감촉이 세상을 밀어냈다. 발 디딘 모든 것이 멀어지며, 맞닿은 체온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리오넬은 범람하는 강물 같아서 아델은 그의 호흡을 따라가느라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곧은 목선을 유려하게 매만지던 그의 손가락이 예민한 귓가를 건드렸고, 아델이 움츠리니 날개뼈를 살살 매만지며 그녀를 달랬다.
입술에 쏠려 있던 신경이 그의 손길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아델을 매만질 때마다 그녀는 버들가지처럼 휘어졌다.
“내가 머물렀던 방을 직접 꾸몄다던데, 궁금해.”
꽉 잠긴 아델의 목소리에 리오넬이 고개를 들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낸 듯 잔뜩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던 그녀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극적이지, 리오넬의 심장이 끝도 없이 거칠게 맥동했다.
리오넬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델을 내려다보며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 어떻게 가려고?!”
깜짝 놀란 아델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새된 음성을 내질렀지만, 리오넬은 거침없이 방으로 향했다.
집사가 눈치 좋게 사용인들을 모두 물린 덕분에 아무런 방해 없이 방에 들어선 리오넬은 방문이 닫히기 무섭게 아델의 입술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제가 매일 밤 얼마나 미칠 것같이 당신을 그리워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럴 리가.”
“아뇨. 모르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오넬은 아델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저를 버려두고 황궁에만 계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자 아델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그의 단단한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아니, 들어 봐. 내가 그동안 못 온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니까?”
“결혼해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청혼이었다.
말문이 막힌 아델은 흔들림도 없이 저를 안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춘 뒤, 생각에 잠긴 듯 굵은 목을 손가락으로 휘감아 어루만졌다.
리오넬에게는 영원같이 느껴진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응.”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리오넬은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가 그녀를 앉힌 뒤, 금고에서 작고 묵직한 붉은 상자를 가져왔다. 그 안에는 지난 겨우내 그가 수백 번 고민했던 선물이 담겨 있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화이트골드 링 상단에는 거친 바다의 출렁임을 형상화한 듯한 세밀한 발이 아델의 눈동자를 닮은 강렬한 옐로 다이아몬드를 쥐고 있었다.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은 리오넬이 조심스럽게 아델의 손을 쥐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내리깔고 반지를 보던 아델이 그를 마주 보자, 리오넬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뭐 해, 어서 끼워 주지 않고.”
그녀가 해사한 웃음을 터트리자 긴장이 풀어진 리오넬이 마주 웃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아델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밀어 넣었다.
혹시라도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가 준비한 반지는 아델의 손가락에 딱 들어맞았다.
리오넬은 반지가 끼워진 그녀의 손가락에 경건하게 입을 맞춘 뒤 아델을 오롯이 눈에 담았다.
“아델.”
“응.”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미사여구 없이 솔직하고도 담백한 그의 청혼에 아델은 먹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감격한 리오넬이 몸을 일으키자 아델은 침대로 밀려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갈급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서늘했던 방이 벽난로 없이도 뜨겁게 데워졌다.
* * *
리오넬은 당장이라도 아델과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안달했으나, 세상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이루어지던가?
아델이 에흐몬트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통의 서신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고트로프 황제와 태후였다.
루시오는 누이를 그렇게 보내고도 결국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짧고 간결한 편지의 골자는, 하나였다.
[누님, 이번에는 꼭 누님의 결혼식을 챙겨 드리고 싶습니다. 리오넬 헤르베르트와의 결혼을 반년 뒤로 미뤄 주십시오.]
태후의 편지 내용도 루시오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무리 재혼이라고 해도, 고트로프 황녀의 결혼식을 허름하게 치르는 것은 황가의 위신에도 누를 끼치는 일이다. 루시오가 곧 방문할 터이니, 그때까지는 결혼식을 미루도록 해라.]
그런데 ‘허름하게’라고 하기엔 손가락에서 번쩍이는 다이아몬드의 알이 너무 굵지 않나?
편지를 읽다 말고 심각한 표정으로 제 손가락을 들여다보는 아델에게 다가온 리오넬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델은 편지를 도로 접어 넣으며 그를 마주 보고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꺼냈다.
“우리 결혼을 좀 미뤄야겠는데.”
“……!! 그게 무슨…….”
리오넬은 목이 졸린 듯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델은 이러다 울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달래듯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루시오.”
“…….”
“내 동생이자 고트로프의 황제께서, 이번엔 꼭 내 결혼을 직접 챙기고 싶다 하시네.”
그녀의 말에 리오넬은 입매를 굳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물을 실은 마차와 수레 외에는 시녀 한 명 대동하지 못한 채 홀로 마차를 타고 에흐몬트로 온 그녀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누이를 위하겠다는 동생의 제안을 어찌 거부할 것인가?
아델은 쓴웃음을 지으며, 잔뜩 시무룩해진 그의 너른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 * *
결혼이 미뤄진 것도 서글픈데, 리오넬에게는 더 가혹하게도 아델은 무척이나 바빠졌다.
연일 해일처럼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그녀는 며칠째 마법사단 관저에 틀어박혔고, 그나마 밖에 나설 때는 무장한 채 인근의 탑을 파괴하러 떠났다.
새카만 망토를 입고 긴 흑검을 등 뒤에 매단 채 거대한 군마에 오른 그녀는 전쟁의 화신처럼 위엄 넘치고, 밤의 화신처럼 매혹적이었다.
“헤르베르트 후. 돌아오면 봅시다.”
근 며칠 간은 아델을 품에 안아 보기는커녕 긴 대화조차 하지 못했던 리오넬은 아쉬움과 먹먹함을 뒤로한 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그녀와 함께 떠나고 싶으나, 근위대장이자 국방부 장관, 그리고 혁명의 핵심 세력으로서 그가 짊어진 책무 또한 아델 못지않았다.
마법사와 기사들로 이루어진 탑 대항 본부를 이끌고 드넓은 광야로 달려 나가는 아델의 모습을 바라보는 리오넬의 눈이 애달팠다.
이 여정이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리오넬은 성루에서 서서 길고 긴 숨을 내쉬다 거칠게 얼굴을 훑어내렸다.
“위버링겐 백작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장관님 심기를 거스르지 마.”
“……이제 떠나셨는데요.”
“……그러게.”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앙리 자칼의 목소리가 화창한 여름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로부터 약 두어 달 뒤.
2년이면 제국 전역의 탑을 파괴할 수 있다고 했던 아델의 말은 진실이었다.
아델라이드를 주축으로 한 탑 대항 본부는 잠시도 쉬지 않고 종횡무진 움직였다.
그녀가 오기 전엔 우왕좌왕했던 마법사단도 에흐몬트 탑 대항 본부라는 유기적인 조직을 중심으로 각자 맡은 바 역할을 훌륭히 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사람들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파괴되어 가는 탑을 보며 감탄을 넘어 경외마저 느꼈다. 엘리자베타 황제와 더불어 위버링겐 백작의 인기는 연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뜨겁고 치열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완연했다.
저 멀리 수도 관문이 보이자 아델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이미 질주하고 있는 말을 몇 번이나 채근하자 뒤따르던 마법사들이 앓는 소리를 했다.
“아이고, 단장니이임! 제발, 좀 천천히 가세요!!”
“단장님!!”
아델은 뒤를 휙 돌아보며 하얗게 질린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는 천천히 와!! 나 먼저 간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멀어졌다. 함께한 기사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승마 실력이었다.
“아니 왜 저렇게 서두르시는 거래요?!”
누군가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자 기사 한 사람이 아델을 대변하듯 말해 주었다.
“못 들었소? 어제 고트로프 태후께서 수도에 도착하셨다지 않소?”
“네에?! 태, 태후께서요?!”
기사는 화들짝 놀라는 마법사를 다소 한심하다는 듯 흘겨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곧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시니 오신 것 아니겠소?”
“아이고, 국방부 장관께서 꽤 어려우셨겠네요.”
“그렇겠어. 장모님이 태후라니, 어휴 생각만 해도 오싹하군.”
기혼자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호들갑을 떨었다.
* * *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리오넬을 염려한 사람이 또 있었으니,
“장관이 애 좀 먹겠는데?”
바로 엘리자베타 황제였다. 테세우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트로프 태후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마차에서 생활했을 텐데도 빳빳하게 목을 감싼 화려한 목깃 장식과 주름 없이 우아하게 물결치는 치맛자락은 당장 연회에 참석해도 무방할 정도로 완벽했다.
반듯하게 편 어깨와 허리는 노년에 접어드는 여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곧았고, 마치 왕관처럼 생긴 독특한 고트로프 식 모자엔 커다란 진주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물 흐르듯 유려하고 위엄이 절로 넘쳐흐르는 움직임에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모두 넋을 놓고 태후를 바라볼 정도였다.
엘리자베타는 만면에 다정한 웃음을 가득 띤 채 정중히 그녀를 반겼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에흐몬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대하게 환영해 주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과연 ‘그’ 아델라이드의 어머니다운 모습에 엘리자베타는 배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자, 들어가시지요.”
엘리자베타는 고트로프 태후에게 성대한 정찬을 대접했고, 태후는 완벽한 에흐몬트식 예절을 구사하며 엘리자베타와의 식사를 이어 갔다.
한데 그때까지도 태후는 리오넬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분명 그가 제 딸과 결혼할 사내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물론 리오넬 쪽도 만만치는 않았다.
태후가 저를 대놓고 무시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간헐적으로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평온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재킷 안 셔츠는 이미 땀으로 축축했다.
왜 아니겠는가? 아델이 출정을 떠나기 전 고트로프 황제 루시오가 방문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지만, 태후의 방문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고트로프의 태후는 제국을 움켜쥔 여제였다. 아델라이드를 혈혈단신 에흐몬트로 보내 버린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비록 다정한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애초에 그녀는 어머니이기 이전에 지배자였다.
아델은 제 어머니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으나, 리오넬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후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늘 어딘지 외로워 보이던 그녀에게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을 선물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침없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태후는 얼음장 같은 냉기를 폴폴 흘리며 리오넬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태후와 열심히 눈을 맞추려 애쓰는 리오넬의 등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