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서로의 빛
(110/127)
110화. 서로의 빛
(110/127)
110화. 서로의 빛
2022.04.19.
리오넬은 일전 태후가 후작저를 방문하였을 때처럼 만사를 제쳐두고 루시오를 살폈다. 아니,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태후와는 달리 루시오는 리오넬의 시중을 오히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표범처럼, 루시오는 일정 범위 너머로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사내였다.
보이지 않는 그 선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람은 누이 아델라이드나 함께 온 기벨린 루한 정도가 다였다.
음…… 사실 기벨린 루한도 썩 달가워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기벨린 쪽이 너무 아랑곳하지 않아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리오넬은 루시오의 성향을 재빠르게 눈치챘고, 나른하게 기대어 앉은 표범이 충분히 주변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배했다.
루시오는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움직이는 리오넬을 일별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헤르베르트 후작.”
“예, 폐하.”
“누님은 무얼 좋아하시오?”
루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틀에 몸을 기대고 내려다보자 봄꽃이 만발한 정원의 풍경이 명화처럼 펼쳐졌다.
“정말로 나는 잘 몰라서 묻는 거요. 고트로프에서 누님은 늘 바쁘셨소. 잠깐씩 얼굴을 뵙는 것이 다였지.”
그러자 리오넬도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루시오가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눈에 담았다.
봄이 완연한 명화 속에 그들이 사랑하는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기벨린!! 아래를 좀 잘 확인하고 다녀!! 그거 밟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어이쿠, 이런! 죄송합니다! 어이쿠! 여기 왜 이렇게 길이 좁아요?”
“길이 좁은 게 아니라, ……너 나가.”
아델은 환하게 웃다가 기어이 꽃밭을 망쳐 놓는 기벨린에게 성을 내고 있었다. 기벨린은 우람한 어깨를 말고 풀이 죽어 꽃밭에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리오넬이 입을 열었다.
“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동물들도 좋아하시고, 앙증맞게 귀여운 것도 좋아하시더군요. 말 타는 것이 최고라 말씀하실 정도로 승마를 즐기시고, 또…….”
웃음을 머금은 채 창밖을 응시하던 루시오가 말끝을 흐리는 리오넬을 돌아보았다.
리오넬은 찬란한 금안을 마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를 무척 좋아하십니다.”
찰나였으나,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냉소적인 소년 황제의 얼굴이 그제야 또래처럼 변했다.
아델은 아니라고 했지만, 루시오는 늘 제가 누이의 발목을 잡는 족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이가 진정 행복할지, 언제나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그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고 그녀가 황제가 되었더라면 행복했을까?
아델은 그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루시오는 보지 않았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이 루시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루시오는 단정한 리오넬의 얼굴을 가슴에 아로새기듯 찬찬히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고맙소.”
리오넬 역시 아델과 꼭 닮은 황제에게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 * *
루시오는 흐드러진 등나무꽃을 올려다보았다. 주렁주렁 늘어진 꽃그늘 아래에서 있자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그는 목젖이 튀어나올 만큼 고개를 뒤로 젖히고 향기로운 꽃을 감상했다.
아델은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며 쿡쿡 웃었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쳐다보니?”
“예뻐서 말입니다.”
루시오는 고개를 바로 하더니 정원 곳곳 만개한 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틈에 선 누이는 마치 풍경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며칠 뒤 있을 결혼식에서 아델은 정원에 핀 꽃으로 부케를 만들고 싶어 했다. 긱스 부인은 이꽃 저꽃이 섞여 자칫 난잡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으나, 아델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루시오는 또다시 고개를 젖혀 등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마침 원하는 꽃을 모두 고른 아델이 시녀를 물리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차가운 음료로 입을 가시자 루시오도 그녀를 따라 음료를 마셨다.
루시오는 후작저에 머무는 내내 아델의 곁을 맴돌았다. 때때로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누이를 바라보기만 할 때도 있었다. 그저 그녀를 눈에 담아 아로새기기 위해 온 사람처럼.
“왜 말없이 살펴보기만 해?”
“…….”
“루시오.”
아델이 부드럽게 그를 부르자 루시오는 그제야 씩 웃었다. 오동통한 뺨을 끌어올려 웃던 어린 소년의 얼굴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다.
“누님.”
“응?”
“…….”
불러 놓고 말이 없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델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천천히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깨를 늘어트리고 온몸에 힘을 뺀 뒤 루시오가 했던 것처럼 등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꽃그늘이 주는 향긋한 평온함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아델이 속삭였다.
“나는 지금 행복해, 루시오.”
그때였다.
“아델!”
그녀의 뒤편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 마음을 담아 부르면 저런 느낌이 들까 싶을 정도로 녹을 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누이의 표정이 순간 확 달라졌다.
살짝 치켜 올라가 있던 눈매가 아래로 휘며 광대가 솟고 입술 끝이 위로 향했다. 눈동자가 어찌나 반짝이는지 마치 곱게 간 금가루를 뿌려 놓은 것만 같았다.
“리오넬!”
등 뒤로 고개를 돌려 그를 부르는 목소리 또한, 그녀를 부르던 음색처럼 달콤했다.
루시오는 아델에게 맞췄던 초점을 좀 더 넓게 두고 전체를 아울러 보았다.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풍경에서, 어느 하나 아델을 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앉은 테이블, 의자, 머리 위로 드리운 보랏빛 꽃그늘, 창문을 열면 어디서든 불어오는 꽃향기, 시간 차를 두고 피는 꽃들의 향연. 이곳의 모든 것이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채워져 있었다.
아델에게 뭔가를 묻기 위해 온 것인지, 리오넬은 루시오에게 인사를 건넨 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도로 멀어졌다.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눈에 담고, 서로의 이름을 입에 머금으며 그 어떤 꽃보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루시오의 입술이 서서히 위로 치솟았다.
아델이 도로 그에게 눈길을 돌렸을 때, 루시오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얗게 반짝이는 치아가 보였다.
“루시오?”
“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웃어?”
그러자 그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못지않게 냉소적인 구석이 있는 동생의 천진한 웃음에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오는 손으로 턱을 괴면서 머리 위의 흐드러진 꽃을 올려다보았다.
“예뻐서요.”
동생에게서 처음 보는 티 없는 웃음에 아델도 따라 웃어 버렸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남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며칠 뒤, 헤르베르트 후작과 위버링겐 백작의 결혼식이 그들의 의사에 따라 조용하게(?) 치러졌다.
수도의 중앙 도로를 가득 메운 엄청난 수레 행렬도 그들의 의사가 아니었으니, 차치하자.
그들을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대신전 앞에 운집한 수만 명의 군중도 그들의 의사가 아니었으니, 차치하자.
에므혼트와 고트로프 황제의 참석 또한 차치……할 수가 없으니, 아델과 리오넬의 결혼식은 결국 그 어느 결혼보다 성대해졌다.
“후작님!!! 축하드려요!!!”
“백작님!!! 축하드려요오!!”
등 뒤로 쏟아지는 백성들의 환성이 젊은 부부의 등을 떠밀었다.
리오넬은 아델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짙은 검은 정장을 입은 그는 늘 그랬듯 근사했다. 리오넬의 눈길이 그녀의 손끝에서 어깨로, 목선을 지나 눈동자로 이어졌다.
상앗빛 드레스를 입고 리오넬이 정원에 심은 꽃으로 엮은 부케를 든 아델은 마주한 것만으로 넋을 놓을 만큼 아름다웠다.
무엇을 들고 입어서가 아니라, 그녀여서 그랬다.
등 뒤로 쏟아지는 환성, 붉은 버진로드도 리오넬에겐 어떤 의미도 안겨 주지 못했다. 오롯이 아델만이 그의 세상에 가득했다.
그것은 아델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혼식 자체가 소박하든 말든 관계없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서로이기 때문이다.
“가자.”
아델이 그의 손을 작게 흔들며 정면을 바라보자, 리오넬도 숨을 가다듬으며 눈길을 돌렸다. 거센 맥동이 손끝까지 전해져 잘게 떨렸다.
초대받은 기사들이 그들의 걸음에 정중히 경례했고, 한쪽에선 마법사들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귀빈석에 앉은 엘리자베타 부부와 루시오도 두 사람이 다가오자 짙게 웃으며 그들을 축복했다. 기벨린은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연신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가슴에 물결이 일었다.
이윽고 새로 부임한 대신관 앞에 두 사람이 서자, 장내엔 엄숙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신관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리오넬을 보며 몰래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노련하고 여유로울 것 같던 아델라이드 역시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웃음을 감추며 식을 이끌었다.
예식의 처음과 끝은 오로지 대신관의 몫이었다.
경전을 장황하게 읊거나 혹은 두 사람을 향한 축복의 말을 길게 늘어놓으면 예식 시간이 매우 늘어지기 마련이지만, 대신관은 여전히 꼭 맞잡고 있는 신랑 신부의 손을 일별하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함께, 행복하게 등의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하나.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한데 저렇듯 꼭 맞잡은 손 앞에 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대신관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간결하게 경전을 읊은 뒤, 두 사람에게 물었다.
“리오넬 헤르베르트. 그대는 아델라이드 고트로프 위버링겐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그의 물음에 리오넬은 강렬한 눈빛과 함께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신상이 흔들릴 지경이었고,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 잔물결처럼 웃음이 번졌다.
대신관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이번엔 아델을 향해 물었다.
“아델라이드 고트로프 위버링겐. 그대는 리오넬 헤르베르트를 배우자로 맞이하여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그에 아델은 신관을 향해 씩 웃었다.
“물론입니다.”
그런 둘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대신관이 큰 소리로 성혼을 선언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쏟아졌다.
아델과 리오넬은 손을 맞잡은 채 반 바퀴를 돌아 그들을 축복하는 이들을 마주했다. 대신전의 색유리를 통과한 알록달록한 빛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성혼을 알리는 신전의 종이 맑게 울리자 신전 밖에서 거대한 함성의 물결이 밀려들어 건물 벽에 부딪혔다.
아름다운 부부의 탄생을 축하하는 인파 틈에 한 남자가 있었다. 바싹 마르고 주름진 얼굴로, 그는 당당히 버진로드를 걷는 아델라이드를 지켜보았다.
그녀를 향해 깊숙하게 허리를 구부렸다 펴는 남자는 칼뱅 백작이었다.
* * *
결혼식이 끝나자, 루시오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오며 가는데 시간이 워낙 소요되는 터라,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는 떠나기 전 아델을 꼭 끌어안았다.
“누님.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아델도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도 마찬가지야.”
남매는 서로의 얼굴을 한참 마주 보다가 거리를 벌렸다.
루시오는 잠시 리오넬을 보며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아델이나 기벨린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리오넬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부드럽게 팔을 둘러 그를 마주 안았다.
루시오는 쑥스러운 듯 낯을 굳히며 한 걸음 물러났다.
“언제든 고트로프에 오시오. 늘 환영하겠소.”
“고맙습니다. 폐하께서도 언제든 오십시오.”
“아, 그건 좀 어려울 수도 있소.”
진지하게 받아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제 누이였다.
루시오가 몸을 돌리자, 고트로프의 무인들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기벨린은 아델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눈물 콧물을 쏙쏙 빼다가 황제에게 넌지시 말했다.
“폐하. 저랑도 방금처럼 다정하게 인사를 나눠 보는 것은 어떠십니까?”
“…….”
“폐하?”
“…….”
루시오는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타 버렸고, 기벨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얼른 말에 올랐다.
“전하! 또 뵙겠습니다! 헤르베르트 후, 또 봅시다!”
루시오의 행렬이 수도 밖 광야를 가로질러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아델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켰다.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는 크고 단단한 손이 든든했다. 아델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기둥처럼 굳건히 그녀의 옆을 지키고 선 리오넬의 가슴에 몸을 묻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루시오의 행렬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아델은 리오넬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예기치 못한 손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모든 예식이 끝나고 그녀를 찾아온 칼뱅 백작은 연신 고개를 떨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백작.”
보다 못한 아델이 그를 부르자, 노신사는 숨을 멈추고 입술을 꾹 물었다가 시선을 들었다. 주름진 눈가가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불규칙적인 숨을 몰아쉬며 자꾸만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델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칼뱅 백작이 결심한 듯 제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제법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가만 보니 백작과 이목구비가 꼭 닮은 이였다. 아델이 빤히 응시하자 상자를 한쪽에 놓은 남자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에릭 칼뱅이라 합니다.”
“백작님. 제 아들입니다.”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소.”
두 사람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자 칼뱅 백작은 몸을 수그려 직접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속에 든 것은 검붉은 빛깔이 탐스러운 작은 과실이었다.
에릭 칼뱅이 상자를 아델의 발치로 공손히 밀었다. 칼뱅 백작은 과실보다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음 같아선 이보다 훨씬 값진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지금 제 처지에는 이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잘게 갈라져 떨리는 노신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델의 시선이 발치에 닿은 고운 열매에 머물렀다.
이제야 그가 어찌하여 청첩장에 답을 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도저히 선물을 마련할 여력이 없어서 노신사는 청첩장을 받은 날부터 노심초사하였을 것이다. 이것을 들고 수도로 와서 그녀에게 내미는 순간까지도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이겨 내야 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축하하고자 했다.
아델은 허리를 숙여 그가 내민 열매를 집어 들었다. 서슴없이 한 알을 입에 넣어 씹으니 달콤새콤한 과즙과 함께 풍요로운 향기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칼뱅 백작은 그녀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목이 졸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은 칼뱅 영지의 특산품입니다. 칼뱅 베리라고도 불리며 이맘때가 철이지요.”
아델은 또 하나를 입에 넣고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달고 맛있소. 고맙소. 내, 종종 연락하여 사 먹어야겠는걸.”
백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언제든 보내 드리겠습니다. 영지를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파괴되어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이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날 전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그에 아델은 씹던 열매를 꿀꺽 삼키며 웃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오.”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어려우시면, 제가 이어받아 갚을 것입니다.”
딱 그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다짐하는 에릭 칼뱅을 보며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 고맙소. 아주 값진 선물을 받았군.”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 분 모두 며칠 저택에서 머물다 돌아가시오.”
그러자 칼뱅 백작이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곧게 편 뒤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백작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왔으나, 제게는 또 다른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델이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작이 싱긋 웃었다.
“영주가 무능한 탓으로 슬럼을 전전하던 칼뱅의 영지민들을 데리러 왔습니다.”
단단한 노백작의 말에, 아델의 얼굴도 그 어떤 보물을 받은 것보다 환하게 빛났다.
* * *
한순간 고향을 잃었던 칼뱅 영지의 사람들은 그들을 데리러 온 영주를 보고 목놓아 울었다.
“어서 돌아가세. 돌아가서, 우리의 고향을 재건하세.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엘리자베타의 명령으로 그들이 돌아가는 데 드는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기로 했다. 황제는 수많은 수레와 말을 무상으로 대여해 주었고, 영지를 재건하는 비용의 일부 역시 국가가 부담하기로 했다.
아델은 니아바라 강의 다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그때처럼 리오넬이 함께였다.
짐을 싣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아이들도 부모를 도와 짐을 나르고,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자, 집으로 가자!”
어디선가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곳곳에서 큰 화답이 이어졌다.
아델은 다리 아래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물은 여전히 더럽고, 시선을 들자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슬럼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래도 오늘 이만큼 줄어들었다.
또 다른 곳의 탑을 파괴한다면 다시 얼마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날, 제게 하셨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곁에서 들려오는 낮은 음성에 아델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마치 캄캄한 동굴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난 것만 같았습니다.”
리오넬은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고백했다.
그날, 당신 곁에 선 사람이 내가 아니란 사실이 어찌나 사무치던지.
그리고 지금, 당신 곁에 선 사람이 나라는 것이 어찌나 가슴이 벅찬지.
“내게 무엇을 하든 돕겠다고 했었지. 나 또한 그 말이 한 줄기 빛이었어, 리오넬.”
아델도 그날을 떠올리며 고백했다.
우린 서로의 빛이었네.
여전히 악취가 흐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들이켜는 숨이 달게 느껴졌다.
그때, 어디선가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좇아 다리 아래를 살피다가, 아델은 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짐을 한 아름 안은 채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년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한참이나 소년을 바라보던 아델은 이내 그를 기억해 냈다.
양아치처럼 위세를 떨던 아이.
소년은 한참이나 아델을 바라보다가 이내 짐을 들고 멀어졌다.
“가자, 집으로 가자!”
소년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다리 위에 앉았던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무거운 짐을 들고도 소년의 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어깨를 씰룩이며 걸어가는 모습에선 딱 그 또래의 천진함마저 묻어났다.
아델은 말머리를 돌리며 리오넬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집으로 가자, 리오넬.”
마주 웃는 부부의 머리 위로 찬연한 햇살이 쏟아졌다.
-<황후 자리를 버리겠습니다> 본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