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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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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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 (1)
2022.04.23.
고트로프에서 녹스 공작 가문의 명성은 황가 못지않았다.
‘지나온 길로 나를 증명한다’라는 녹스의 정신은 노숙인들도 알고 있을 만큼 유서 깊었으며,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위인의 태반이 이 가문 출신이었다. 유난히 미인이 많다는 점도 녹스의 명성을 드높였다.
녹스 공작가의 인장엔 난초가 새겨져 있었는데, 영지가 난과 대나무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저택을 지을 때, 야트막한 단층 주택 주위로 화단 대신 대나무숲을 가꾸고 곳곳에 난을 심었다.
곳곳에 신비로운 난이 피어 있는 대나무숲을 거니는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들.
그야말로 동화의 한 자락 같은 이야기 아닌가? 녹스가 고트로프 사람들의 동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완벽해 보이는 이들에게도 대대로 고민거리는 있었으니, 바로 손이 귀하다는 것이었다.
고트로프에는 적장자 우선 상속법이 없었다. 그러니 굳이 사내아이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딸이든 아들이든 일단 잉태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현 녹스 공작 부부 또한 선대들이 겪었던 고통을 답습하고 있었다.
공작 부부는 임신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좋다는 약은 물론, 음식의 온도 하나까지 신경 썼다.
음주가 임신을 어렵게 만든다는 이야기에 황제가 권하는 술도 정중히 거절하기도 했다.
황제도 충성스러운 신하의 오랜 고민을 아는지라 기분 나빠하는 대신 임신에 도움이 되는 약재를 사방에서 구해 주었다.
그 정성이 통했던 것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녹스 공작 부인은 임신에 성공했다. 어렵게 찾아온 귀한 아기를 위해 녹스 가문 사람들 모두가 유난스러울 만큼 태교와 안정에 신경을 썼다.
모두의 축복 아래 아이는 어머니 배 속에서 무탈하게 자라 예정일에 딱 맞춰 태어났다. 아버지의 눈부신 은발과 어머니의 녹색 눈동자를 물려받은 아름다운 사내아이였다.
공작 부부는 크게 기뻐하며 수도 빈민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아들의 탄생을 축하했다. 금지옥엽 같은 소공자의 이름은 카인이었다.
그리고 카인이 태어난 다음 해, 황가에도 경사가 있었다. 바로 황제의 첫 아이인 황녀가 탄생한 것이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녹스에 질 새라 빈민들에게 더 많은 음식을 베풀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 칭송받는 선조의 이름을 황녀에게 주었다.
아델라이드. 새카만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와 근사하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우스갯소리로 훗날 두 아이를 혼인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 묻는 황제에게 녹스 공작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 * *
녹스 공작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았으나, 카인이 태어난 뒤로도 좀처럼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카인을 잉태했던 때를 떠올리며 몇 곱절 신경을 썼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카인은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고운 얼굴은 소년을 한층 더 병약해 보이게 했다.
녹스 공가의 모두가 하나뿐인 소공자가 혹여 감기라도 걸리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특히나 아들에 대한 공작 부인의 걱정은 정말이지 유난스러웠다. 그녀는 늘 ‘만에 하나라도 카인이 잘못되면’이라는 강박에 휩싸인 사람 같았고, 카인 혼자서는 제대로 된 외출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아 그것참. 자네가 나서서 공작 부인께 저건 좀 아니라고 명확히 이야기하게. 카인이 스무 살이 된들 부모 눈엔 아이일 텐데, 저 과한 걱정에 기약이 있다고 보는가?”
루시드 시니악 백작이 홀로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카인을 가리키며 말하자 곁에 있던 루한 후작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암암, 루시드 말이 맞네! 우리 기벨린을 좀 보게! 내가 저놈을 얼마나 강하게 키우는지 공작 부인이 보면 놀라실 거네! 우리 기벨린은 이시도르 땅굴에 데려다 놔도 너끈히 살아남을걸!”
“그건 자네가 무식한 거고.”
시니악 백작이 질렸다는 얼굴로 면박을 주자 발끈한 루안 후작이 제 교육 방식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작은 건장한 후작의 가슴팍을 세게 두드려 말을 멈추게 한 뒤, 콕 집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세 아이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기벨린 루한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날뛰며 카인 녹스의 주의를 끌어 보려 애를 쓰는 가운데, 테오도르 시니악은 같이 온 친구가 창피한지 멀찍이 떨어져서 모른 척하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카인이 기벨린을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책을 들고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떠나 버렸다.
“야야, 어디가?!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게에!!!”
울창한 대나무숲에 기벨린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
“…….”
시니악 백작이 거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리자 루한 후작이 머쓱한 듯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목을 자라처럼 집어넣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침묵하고 있던 녹스 공작이 씁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 걱정이 뭔지 나도 아네. 하…….”
깊고 긴 한숨에서 공작의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고뇌에 찬 친우의 모습에 시니악 백작과 루한 후작도 더 이상 공작가의 후계 교육에 대해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다른 가문에서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었다.
시니악 백작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탑과 마수 때문에 제국 전역이 난리야. 그렇게 기묘하고 포악스러운 것들 여기저기서 활개를 치고 다니니…….”
“일단 마법사들의 마력에는 반응하는 모양이니, 하루라도 빨리 탑을 없앨 방도를 찾아봐야지. 폐하께서도 이 때문에 시름이 깊으시다네.”
진지한 얼굴로 말을 나누던 세 사람은 필연적으로 한 소녀를 떠올렸다.
이제 고작 11살.
아델라이드 황태녀는 어린 나이에도 어찌나 총명하고 기백이 남다른지, 그야말로 타고난 제왕 감이었다.
중신 회의에 참석해 공부한 내용을 또박또박 잘 읊기만 해도 칭찬받을 나이이건만, 지금 누구보다 탑의 출몰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고 있기도 했다.
“열한 살에 그 정도의 기세와 행동력이라니. 마력 또한 자유자재로 운용하신다더군. 게다가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갸륵한 마음씨는 또 어떻고. 나도 그 또래 아들을 키워 봤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아델라이드 황태녀는 그 작은 몸으로 어른들 틈에 섞여 탑의 제거를 위해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강행군을 떠났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황후가 황제에게 달려와 온갖 비난을 퍼부었으나, 이미 떠난 딸을 다시 불러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성가신 불청객들이 사라지자 카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홀로 대나무숲으로 향했다.
공작 부인은 아들이 수행인 하나 없이 숲을 거니는 것조차 못마땅해했지만, 다행히 공작이 카인을 두둔해 주어 자유롭게 대나무숲을 드나들 수 있었다.
카인이 대나무숲에 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 가슴 속에서 휘몰아치는 기묘한 힘을 발산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카인만의 비밀로, 제 안의 마력을 깨달은 후로 카인은 매일 대나무숲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마력 운용을 연습했다.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헤맸지만, 몇 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기가 목을 가누고 걸음마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카인은 마력 운용에 있어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력을 운용할 때마다 카인은 시원한 물줄기가 의지에 따라 온몸 구석구석을 유영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욱신거리며 아팠던 것이 사라지고, 통증이 사라진 부분에 활기가 들어찼다.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쾌감이었다.
마력 운용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할수록 카인은 점차 건강해졌다. 더 이상 잔병치레를 하지 않게 되었고, 얼굴 가득 싱그러운 혈색이 돌고 대나무처럼 키도 쑥쑥 자라났다.
그렇게 약 2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녹스 공작은 이제 대나무숲의 정령처럼 아름답고 건강해진 아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 강인하게 키워야 한다며 아내를 설득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공작 부인의 반대도 반대였지만, 카인 역시 좀처럼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인은 마력 운용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학문이나 다른 모든 것에 뛰어난 성취를 보였지만, 소공자를 과보호하는 녹스 공작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주 앓으며 침대를 지키던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조용하고 내성적인 소년으로 자라났다.
건강해진 뒤로도 성별의 경계를 허물 만큼 섬세하고 미려한 외모 때문에 여자라고 오해받는 일이 되풀이되자 낯가림은 더욱 심해졌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 이름을 소개하듯 자기 성별을 먼저 말해 주는 것도 성가셨고, 그때마다 박장대소를 해 대며 복장을 긁는 기벨린도 거슬렸다.
카인에겐 울창한 대나무숲이 세상의 전부였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벗어나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기력이 카인을 좀먹었다. 인간은 사회적이고 시각적인 동물이라,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보이는 결과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정교사에게 늘 칭찬을 들어도 홀로 배우는 공부는 비교 대상이 없으니 얼마나 늘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교양으로 배우는 악기는 취향에 맞지 않아 지루하기만 했다.
카인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홀로 조용히 침잠해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지루하니 자주 우울감에 시달렸고, 성격도 자연스레 냉소적으로 변해 갔다.
* *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카인은 홀로 대나무숲에서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발산된 마력이 휘몰아치자 빳빳한 대나무 잎들이 일제히 부딪히며 비라도 오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길고 곧은 대나무들이 이리저리 휘청이는 통에 내리쬐는 여름 햇살이 숲 깊숙이 들어와 밝은 조각을 만들어 내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하루가 다르게 마력의 운용 범위는 더 넓어지고, 운용량도 확실히 늘었다. 그가 유일하게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홀로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력을 운용하며 무언가 막힌 듯 막막해질 때가 많았는데,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아진 카인이 삐딱하게 입술을 끌어 올릴 때였다.
“처음엔 키퍼인 줄 알았더니, 스트라이커였네?”
어디선가 날아든 미성에 카인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놀란 눈으로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자, 널따란 바위 위에 소녀 하나가 고아한 자태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비록 말투가 다소 거리낌 없긴 했지만, 소녀는 좀처럼 녹스 공작령을 벗어나지 않는 카인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존재였다.
녹스 공가의 후계자로서 참석한 공식 행사에서 소녀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울창한 밀림을 활보하는 맹수같이 강렬한 금빛 눈동자. 짙은 밤처럼 검고 윤기나는 머리카락과 당당하고 곧은 자세.
그것은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하고도 고고한 지배자의 모습이었다.
카인은 저보다 한참 몸집이 작은 소녀의 눈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카인은 얼른 몸가짐을 바로 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갑작스러운 황녀의 등장에 놀라서일까, 아니면 마력을 운용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들켰기 때문일까?
카인의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