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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 (4) (114/127)


114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 (4)
2022.05.03.


아델이 국혼을 위해 에흐몬트로 떠난 후,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카인을 깨운 것은 황제 루시오의 명이었다.

황제는 제 누이가 그곳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어떠한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고라도 그녀를 고트로프로 도로 데려오라 단언했다.

기벨린과 함께 황제의 명을 수행하러 에흐몬트로 향하는 내내, 카인은 아델을 다시 만날 생각에 설레었다가, 제 안의 악마를 마주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했다.

카인은 아델이 에흐몬트에서 잘 적응하여 황후로 존중받으며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가 아는 아델은 고작 제 행복을 위해 고트로프에 누를 끼칠 일은 결단코 하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그의 가슴 한편에 똬리를 튼 악마는 간악하게 속살거렸다.

그녀가 다른 남자 품에서 행복한 모습을, 진정 바라느냐고.

그렇게 번뇌의 굴레 속에서 도착한 에흐몬트의 수도에서, 카인이 맞이한 현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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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시오. 나는 이 저택의 주인인 리오넬 헤르베르트 후작이라 하오.”

한눈에 보기에도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단정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에흐몬트 황제의 눈 밖에 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폐위된 아델을 보호하고 있는 이이니만큼 고마움이 앞서야 하건만,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만큼 본능적인 위기감이 카인을 엄습했다.

카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은 충성스러운 신하이기 이전에 한 여인을 깊이 연모하고 있는 사내로서 느끼는 위협이었다.

카인은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며 그에게 마주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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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시각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시오. 나는 고트로프의 카인 녹스요.”

기벨린과 인사를 주고받는 리오넬을 가만히 바라보며 들끓는 불안을 애써 가라앉힌 것도 잠시. 아델이 응접실의 문을 열고 나타나자 카인의 머릿속은 하얗게 표백되고 말았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금빛 눈동자, 끝이 살짝 올라간 듯한 눈매, 굳게 다문 입술.

모진 풍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무같이 꼿꼿한 모습이 그녀다우면서도 사무칠 만큼 애잔해서 카인은 누군가 심장을 얇게 저며 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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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음성.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던 고운 얼굴.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고만 싶은 욕심이 불쑥 범람하고, 카인의 가슴 속 악마가 간악한 웃음을 흘리며 속삭여 댔다.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그녀를, 이렇게라도 고트로프로 모셔갈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고트로프로 돌아오시면 그 누구도 그녀를 다치게 하지 못하도록 녹스의 이름으로 비호할 것이다. 평생 그녀를 숭배하며 살아가리라.

그러나 놀라운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미 황후 자리에서 폐위된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아델라이드가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인 것이다.

믿을 수 없이 낯선 그녀의 모습에 불안해진 카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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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남을 생각이십니까?”

카인이 아는 아델라이드는 황족답게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여 늘 세상을 굽어보는 이였다. 옳고 그름이 명확했고, 제 감정을 표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언제나 강인하고 태양처럼 빛났다.

아델의 얼굴을 하고 저렇게 연약한 일면을 보이는 여자가 누구인지, 카인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카인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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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잃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정말 이곳에서 죽기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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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직설적인 언사에 기벨린이 성을 냈지만, 카인은 물러나지 않고 아델을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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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늘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인 것처럼 행동하십니까? 고트로프로 돌아가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니요, 고국의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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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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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잖아요?”

결국 그는 눈가가 붉어진 채 덜덜 떨리는 입술로 간절하게 말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리오넬 헤르베르트의 모습을 밀어내며, 부디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가 그 남자가 아니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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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요, 전하. 우리의 나라로. 전하께서 그토록 사랑했던 울창한 산림으로.”

결국, 카인이 내세운 것은 그녀가 무엇보다 사랑했던 고국이었다. 그가 아는 한, 그것만이 유일하게 그녀를 잡을 수 있는 끈이었으므로.

더할 나위 없이 비겁하게도.

* * *

헤르베르트 후작이 제공한 방으로 돌아와서도, 카인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했다. 가슴 속에 지펴진 불씨가 지옥의 유황불처럼 그를 활활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방 안에서 서성이던 카인은 결국 아델을 찾아갔다. 몇 계단을 오르고 층계참을 지나려는데,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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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간절함이 가득 묻은 절절한 목소리. 그 안에 출렁이는 해일 같은 애정.

카인은 발밑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충격에 벽을 짚고 떨었다. 그리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이어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발, 제발,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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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폐후요.”

한참 만에야 간신히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카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오랫동안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본 만큼, 카일은 그녀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의 고뇌와 아픔 또한, 카인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비수처럼 잔인하게 카인의 심장을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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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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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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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의 모든 것을 가져 주십시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손에 쥐고, 늘 그러셨던 것처럼 당신께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마음껏 하십시오. 저를 도구로 사용하셔도 좋고, 발판으로, 때로는 방패막이로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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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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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저의 모든 것을 가져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사내의 절절한 고백에도 그녀는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인은 무너지듯 눈을 감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사내가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을, 카인은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오래도록 같은 마음을 품어 왔기에.

그리고 애정으로 지켜본 세월만큼, 카인은 침묵하는 그녀의 마음 역시 읽어 낼 수 있었다.

눈물이 뺨을 가로질러 툭툭 발치를 적셨다. 가슴이 문드러지고 문드러져서 차라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 *

그리고 그 감정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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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기벨린이 비명을 지르듯 아델을 부르며 다가왔고, 카인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빼곡하게 새겨진 고귀한 문양. 그녀가 카인에게 내민 것은 잔인하게도 그녀의 고트로프 신분패였다.

카인은 다시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며 지독하게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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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왜 제게 내미시는 겁니까?”

아델의 황금색 눈동자가 결심으로 단단해졌다. 고집스러운 그의 주군은, 저런 눈빛을 할 때면 결코 제 마음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카인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아델을 바라보는 사이, 결국 그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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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녹스. 그대에게 내리는 나의 마지막 명이다.”

참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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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델라이드 고트로프는 고트로프 황녀로서의 모든 지위와 권한을 내려놓으니, 그대는 나의 의지를 황제께 전하라.”

당신은 정말 잔인하다. 내 감정을 안다면, 결코 내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텐데.

내가 어떻게 당신의 신분패를 들고 가라고. 당신 손으로 버린 고트로프의 당신을 들고 가라고.

아델은 결국 시선을 돌리더니 기벨린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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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벨린 루한.”

기벨린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 감추며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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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전하.”

아델은 신분패와 더불어 자신의 의지가 적힌 문서를 품에서 꺼내 기벨린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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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한다.”

기벨린은 치미는 울음을 내리누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아델을 올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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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전하라면 절대 하시지 않을 선택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택하심은, 진정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벨린은 울면서 억지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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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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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카인은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시선을 떨구었다.

깊고 깊은 물에 잠긴 듯,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간신히 들이마신 공기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폐부를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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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미안하다.”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카인은 안다.

그것은 작별을 고하는 인사였다. 언젠가의 만남조차 기대할 수 없는, 다신 볼 수 없음을 염두에 둔 작별.

그토록 사랑하던 고국마저 등지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리오넬 헤르베르트였다.

그것이 더없이 슬프다가도, 그녀의 사랑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하는 제 좁아터진 애정이 부끄럽고 서러웠다.

잔인할 만큼 냉정하고 단호하게 돌아선 그녀가 원망스러우면서도, 결국엔 원망마저 제대로 할 수 없음이 서글펐다.

멀어지는 발굽 소리에 카인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그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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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자, 카인. 그게 전하께서 원하시는 거야.”

기벨린의 말에 카인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차라리 이 고통이 덜어질까.

카인은 산산조각 난 가슴을 끌어안고 거친 울음을 토했다.

왜, 나는 아니었을까.

당신에게 왜 나는 남자일 수 없었을까.

* * *

어떻게 고트로프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카인은 고국에 도착하자마자 그 길로 녹스의 대나무숲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기벨린에게서 사정을 전해 들은 테오도르가 숲으로 찾아왔을 때, 카인은 쪼개진 바위 위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던 달이, 태양이 떠나 빛을 잃었다.

바싹 말라 죽어 가는 카인을 바라보던 테오도르가 불쑥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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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그만 놓아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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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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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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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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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사랑이야.”

그제야 카인이 메마른 시선을 틀어 그를 마주 보았다. 테오도르는 며칠 사이에 말라 버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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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죽을 생각일랑 마. 아델라이드 전하 머릿속에 천하의 멍청이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지? 전하의 연인이 아니어도, 너는 여전히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친우이고 전하께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니 일어나라, 카인 녹스.”

소중한 사람.

그 한마디에 꺼멓게 죽어 있던 녹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테오도르가 떠나고도 카인은 한참 동안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델라이드가 루시오 황제를 만나기 위해 고트로프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나, 카인은 차마 그녀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벨린과 테오도르가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카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절망을 채 지우지 못한 못난 제 모습이 행여나 에흐몬트로 돌아갈 그녀에게 티끌만 한 짐이라도 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였다.

카인은 오늘도 대나무숲 쪼개진 바위를 찾았다.

바람이 불자, 대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울었다. 듬성듬성 쪼개진 빛 조각이 그의 뺨에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었다.

카인은 고개를 들어 청량한 녹음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이곳에서 시작된 마음이었다.

아델은 알을 깨고 나온 그가 가장 먼저 마주한 사람이었다. 아니, 그의 알을 서슴없이 깨고 죽어 가던 그를 꺼내 준 은인이었다.

카인은 문득, 헤르바르트 후작저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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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는 찾으셨습니까?’

떠보듯 물어본 주제에 긴장하여 가슴이 술렁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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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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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 순간, 얼마나 떨었던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리오넬 헤르베르트, 그자의 이름이 나올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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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라이드.’

 
카인은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조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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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라이드.”

그러자 차오를 새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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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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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우리 전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보신 적이 있냐? 난, 처음 봤다. 리오넬 헤르베르트를 선택하신 건, 그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전하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어.’

 
눈물 젖은 기벨린의 목소리 위로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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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 드려. 그것도 사랑이야.’

 
카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일으켰다.

그때, 누군가가 대나무숲을 가로질러 그에게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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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기벨린이 거친 숨을 씨근대며, 눈물에 젖어 있는 그에게 손수건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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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멍청한 자식! 빨리 항구로 달려가!! 전하께 마지막 인사도 안 드릴 거야?!”

그녀가 떠난다.

그 한마디에 눈물도 고뇌도,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얗게 사라졌다. 카인은 거한의 가슴팍에 손수건을 도로 던진 뒤, 빠르게 숲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을 더 빠르게 채근하며 항구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는 동안, 뺨을 가로지르는 차갑고 서늘한 공기가 절망에 깊게 잠겨 있던 그를 깨웠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항구에 도착했을 때, 배는 이미 드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늦었나. 인사도 드리지 못했는데.

카인이 낙심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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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제야 그녀가 보였다. 선미에 서서 그를 향해 팔을 흔드는, 그의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이 될 사랑이.

당당함과 오만함이 절묘하게 뒤섞인 표정, 건성으로 묶어 올린 검은 머리카락, 적당히 높은 콧대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그림처럼 녹아들고, 예쁜 입매는 보는 것만을 설레었다.

카인은 떨리는 숨과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뒤, 그녀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에흐몬트에서 그렇게 못난 모습으로 마지막을 남겼다는 것을 내내 후회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의연하게 그녀를 보내리라. 그녀가 걸음걸이도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당신은 알까요?

제가 그날 대나무숲에서 얼마나 설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밤새 열병을 앓았는지.

갑자기 울타리 밖 세상이 궁금해졌던 이유는, 오직 하나.

당신이 내게 주신 ‘너와 내가 함께 가꾸어 갈 세상’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 말을 한 것조차 잊어버리셨겠지만, 저는 그날의 온도, 냄새, 당신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던 햇살 조각 하나까지도 잊지 못합니다.

아델라이드.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 당신의 이름은 음절마다 쪼개지고 부서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그리움을 담아 수천수만 번 되뇌었으니까요.

그러니 진정으로 바랍니다.

부디, 영원토록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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