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외전2.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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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외전2.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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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외전2.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 (1)
2022.05.07.
“별 같잖고 못돼 처먹은 영감을 다 보겠어. 물잔에 코를 박고 죽었으면.”
“…….”
“아니지. 생각해 보니 그건 너무 관대해. 길을 가다 똥을 밟고 뒤로 넘어져 뒈졌으면. 시궁창을 헤매다가 본인에게 딱 어울리는 말로를 맞이하길.”
성호를 그어 가며 쏟아내는 말들이 하나같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그 대상이 다름 아닌 그녀의 숙부이니,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간 패륜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익히 보아 왔던 광경인지 그녀 곁의 두 남자는 얼굴색 하나 변함이 없었다.
“신을 안 믿으시잖습니까?”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 정도가 다였다.
“테세우스. 난 아우구스 데스포네 한정으로 신을 믿어.”
테세우스는 물론이거니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리오넬마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타는 화려한 자안을 번뜩이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런 놈이 자식까지 낳아 대대손손 악행을 저지를까 봐 신께서 얼마나 위대한 안배를 하셨나? 고자라니. 아주 내 속이 다 시원하지.”
“크흠흠.”
어찌하여 부끄러움은 두 남자의 몫인가. 테세우스는 물론이거니와 리오넬도 낯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둘 다 입가가 씰룩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거참, 장관!”
“?”
리오넬이 퍼뜩 고개를 들자 그의 형수가 어딘지 고약한 기색이 서린 얼굴로 씩 웃었다.
“그냥 대놓고 웃어. 그래야 속이 풀리니까.”
“그럴 수는 없지요, 형수님.”
으레 이런 말을 들으면 정색하는 테세우스와 달리, 리오넬은 은근히 장단을 맞춰 왔다.
어린 시절 영악하게 사고를 쳐서 선대 공작 부인의 속을 끓였다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모습이었다.
“흠. 그럼 두고두고 생각나면 몰래 웃든지.”
“그리하겠습니다.”
아내와 동생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힐끔 바라보던 테세우스 역시 결국 피식 웃는 것을, 엘리자베타는 놓치지 않았다.
짧게 자른 검푸른 머리카락과 온화한 눈동자.
사람들은 테세우스와 리오넬이 무척 닮았다고 입을 모으지만, 엘리자베타는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엘리자베타에게 테세우스와 같은 남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므로.
선대 황제는 아버지로서도, 남편으로서도, 군주로서도 딱 아우구스 데스포네의 형다운 사람이었다. 엘리자베타는 데스포네 공작을 세상 누구보다도 경멸하니, 한마디로 최악이라는 뜻이었다.
밖에서 데려온 아들을 아내에게 당당하게 던져 줄 만큼 이기적이고 뻔뻔했던 그가 엘리자베타에게 아비로서 잘해 준 것이 있다면 딱 하나, 결혼이었다.
물론 그것조차 그녀를 위함은 아니었다.
선대 황제는 저와 꼭 닮은 제 동생을 ‘나라 말아먹을 놈’이라 헐뜯으며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런데 평생 방임했던 아들이, 어느 날 보니 그놈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이를 눈치챈 황제는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발드르 공작가와 엘리자베타뿐이라는 판단하에 정략적으로 딸의 결혼을 추진했다.
두 사람은 발드르의 후계자와 황녀로서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보아 온 사이였다. 서로에 대한 풍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테세우스 발드르는 어린 시절부터 영민하기로 유명했고 용모 또한 기품 있고 수려해서, 그에게 연정을 품지 않은 영애가 없다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모두가 엘리자베타에게 부럽다 속삭였지만, 그즈음 선황에 대한 악감정이 극에 치달아 있던 엘리자베타에게는 그저 웃기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녀의 주변엔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개 같은’ 남자들뿐이었다. 아비인 선황제, 데스포네 공작을 포함한 숙부들, 배다른 형제인 황제까지.
겉보기엔 모두 미끈하게 잘생기고 완벽한 예법을 구사하는 신사 중의 신사였지만, 알맹이는 하나같이 조악하고 비루했다. 그러니 보이는 것, 들리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 남자라고 뭐가 다를까 하는 자포자기한 심정에 더해, 장기 말처럼 시집온 제 처지도 우스웠다.
혼인 첫날 밤. 엘리자베타는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채 화려하고도 위엄 넘치는 드레스 차림으로 가슴 속에 켜켜이 쌓아 두었던 악감정을 새신랑에게 모두 쏟아냈다.
정작 그는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악에 받친 표정으로 노려보는 제 신부를 물끄러미 눈에 담던 테세우스는 긴 숨을 한 번 몰아쉰 뒤, 늘 착용하고 다니던 안경을 벗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경계하는 그녀를 존중한다는 듯 몇 걸음 밖에 멈춰 선 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이 왜 결혼하였는지, 그리고 그가 왜 이 결혼을 받아들였는지.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 끝에 그는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황녀님의 배우자로서 오늘 신 앞에 맹세한 것을 죽는 날까지 지킬 것입니다. 당신을 강제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편히 쉬시지요.’
그리고 마치 고백하듯, 혹은 신 앞에 기도하는 듯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방을 나가 버렸다.
그랬던 남자였다. 수도자처럼 금욕적인 얼굴처럼, 엘리자베타가 가끔씩 저 남자에겐 욕망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할 정도로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엘리자베타가 그에게 마음을 여는 날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고, 그녀의 허락이 없다면 함부로 접촉하려 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한 침대를 쓰는 날에도 몇 번이나 괜찮겠는지를 물어 왔던가.
그러나 마침내 몸을 겹친 순간, 엘리자베타는 제 남편이 지금껏 그녀를 위해 본인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이 열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열렸으나 자존심에 인정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엘리자베타는 마차에서 먼저 내려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 중신 회의는 난장 그 자체였다.
탑이라는 끔찍한 재앙을 두고 발드르와 데스포네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발드르를 필두로 한 귀족들은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탑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마법사단을 이끄는 데스포네 공작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며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테세우스 발드르는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가 던지는 온갖 모욕을 참아 냈다. 곁에 앉아 있던 그녀조차 살이 떨릴 정도였는데, 정작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 자리의 누구보다 귀족적이며, 진흙밭에 데려다 놓아도 홀로 고고할 사내였다.
엘리자베타는 남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힐끔 그를 일별하자, 투명한 외알 안경 너머 검푸른 눈동자가 조금 둥그렇게 커져 있었다. 그녀가 내심 가장 좋아하는 그의 표정이었다.
엘리자베타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남편에게 입을 맞췄다. 그가 숨을 살짝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넓은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에게 몸을 맞대자 그가 낮은 소리를 내며 함께 입을 맞춰 왔다.
엘리자베타가 그의 넓고 곧은 등을 어르듯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닌 척하고 있어도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어깨와 등 근육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서서히 이완되어 갔다.
등 뒤로 쏟아지는 나른함 감각을 느끼며 테세우스 역시 강인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빈틈없이 겹쳐져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손을 들어 테세우스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맞췄던 입술을 뒤로 물리며 그를 올려다보자, 고요하던 검푸른 눈동자가 거칠게 출렁였다.
이지적인 그의 눈매와 베일 듯 예리하면서도 섬세한 얼굴선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엘리자베타가 속삭였다.
“그 자식들은 단명할 거다, 테세우스.”
결국, 그의 표정이 무너졌다. 테세우스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채 큭큭 웃었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가슴을 자꾸만 간지럽혔다. 엘리자베타는 그가 웃는 것이 좋아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그의 등을 다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미안해.”
“당신이 왜 미안합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래도, 내가 울리히라 미안해. 그런 거지 같은 자식들과 같은 피를 나눈 사람이라, 미안해.”
테세우스가 그녀의 턱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려 눈을 맞췄다. 늘 따뜻하고 온화하던 그의 눈빛이 이런 순간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했다.
검푸른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 채, 그가 단언했다.
“당신이 미안할 일 아닙니다. 다시는 제게 그 일로 사과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해 줄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위로를 받는지 그는 알까. 엘리자베타는 먹먹한 감정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웃음소리가 들렸다.
언뜻 들으면 중성적인, 낮고 허스키한 음색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슬쩍 시선을 들자, 그의 비서 마이클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는 그녀가 보였다.
화려한 금발을 틀어 올린 그녀가 그만큼 화려한 자안을 반짝이며 다시 한번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 테세우스는 물끄러미 제 아내를 눈에 담았다.
엘리자베타 울리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직 어린 소녀인데도 어쩜 저리 완고할까 싶을 만큼 고집스러웠지만, 당시 역시 소년에 불과했던 그의 눈에는 그저 범접하기 힘들어 보이던 소녀는 제가 가진 분위기만큼이나 화려하고 압도적이었다.
주변이 환해질 만큼 화려하고 눈부신 금발,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자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길쭉길쭉한 팔다리까지. 하지만 그녀를 빛나게 하는 것은 비단 아름다운 외양뿐 아니라 늘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였다.
소녀가 그 모습 그대로 자라나 여인이 될 때까지도, 엘리자베타 울리히는 테세우스 발드르에게 그런 존재였다.
닿을 리 없을 인연이었다. 선대 황제는 늘 입바른 소리를 서슴지 않는 발드르 공가를 눈엣가시로 여겼고, 선대 발드르 공작 역시 울리히 황가라면 치를 떨었으므로.
그러나 우습게도 바로 그 때문에 부부의 연으로 이어졌으니, 사람 일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리라.
첫날 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드레스가 마치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처럼 느껴져서 얼마나 속이 쓰렸던가.
그러나 테세우스는 고귀하고 자존심 강한 엘리자베타의 무엇도 강제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오랫동안 먼발치에서 남몰래 연모해 온 그녀는 그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은 부부이니 앞으로 긴 시간을 함께할 테고, 테세우스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다가가며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그녀는 마침내 제 마음의 빗장을 열어 주었다. 그는 아직도 그날 밤을 떠올리면 입이 마르고 속이 뜨거워졌다.
엘리자베타는 테세우스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탑이 내려온 이래 마법사단을 내세운 데스포네 공작은 끊임없이 세를 불렸고, 반대로 기사 가문을 이끄는 발드르 공가의 입지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아버지인 선대 공작이 그러했듯, 테세우스는 발드르 공가를 대표해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의 횡포에 맞서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속이 들끓어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된 날이면, 그의 아내는 누구보다 빨리 이를 알아채고 그를 어루만져 주었다.
부드러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 손길에 몸을 맡기면 놀랍게도 긴장이 풀렸다. 그녀의 나긋한 몸을 끌어안고 온기를 나눌 때야 비로소 쉬는 것 같았다.
그때,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그를 응시했다. 테세우스는 얼른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끌어당겼다.
소년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며 자꾸만 귓가가 달아오를 것 같았다. 새삼스럽게, 이상하게도.
또 웃음소리가 들렸다.
테세우스도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 * *
그러던 어느 날, 황제 카를과 데스포네 공작이 기습적으로 법안 하나를 발의했다.
황족의 배우자에 대한 정치적 권한 제한법.
혼맥으로 황족을 디딤돌 삼는 무분별한 정치 간섭을 차단하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오로지 테세우스 발드르를 견제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다.
이 법이 실행된다면 테세우스는 황녀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중신 회의조차 참석할 수 없게 될 터였다.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 연합의 유일한 대항마인 발드르 공가의 발목이 묶일 테고, 공가를 따르는 수많은 가문 역시 안위를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탑이라는 재앙을 반석 삼아 쌓아 올린 데스포네 공작의 위세는 그토록 끝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그를 제지할 사람이 강림하듯 나타나지 않는 이상, 에흐몬트에서 황제를 등에 업은 데스포네 공작의 폭정을 막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평소 같으면 온갖 욕설과 저주를 짓씹으며 화를 냈을 텐데, 마차에 탄 엘리자베타는 기이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테세우스는 그녀의 침묵이 못 견디게 두려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기에 저리도 차분하고 고요한지.
“리즈.”
테세우스는 그녀의 애칭을 입에 담았다. 드문 일이었다. 보통 그는 그녀를 ‘부인’ 혹은 ‘황녀님’이라 칭했으니. 그렇게라도 그녀의 고요를 깨고 싶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테세우스의 두려움이 실체를 드러냈다.
“……이게 뭡니까?”
“이혼하자.”
엘리자베타는 늘 그랬듯 완고한 표정으로 마치 명령을 내리듯 테세우스에게 이혼장을 내밀었다. 그를 담고 있는 그녀의 자안 역시 한 줌의 미련도 남지 않은 듯 맑고 단단하기만 했다.
결혼한 첫날 밤 그가 그러했듯, 그녀는 그를 앉혀 둔 채 그들이 왜 이 관계를 끝내야 하는지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것은 발드르 공가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다. 에흐몬트의 미래를 위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옳은 이야기였지만, 테세우스는 그녀의 입술을 막고 싶었다. 당신은 이 관계를 끝내는 것이 괜찮은지 되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날개 꺾인 발드르의 안주인으로 엘리자베타를 잡아 두는 것은, 그녀에게도 못 할 짓이라는 것을 테세우스 역시 사무치게 알고 있었기에.
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그녀의 모습을 지켜 주고 싶었기에.
그것을 얼마나 두고두고 후회했는지, 당신은 모르겠지.
내 등을 끌어안고, 내게 입을 맞추던 순간이 당신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그녀는 마지막 순간,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 준 뒤 떠나갔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 * *
그로부터 몇 년 뒤.
오랜만에 발드르 공저를 찾은 귀빈에게 집사가 반가운 얼굴로 정중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서 오십시오, 그랜드 공작 전하.”
엘리자베타도 집사를 향해 시원스레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이런. 내가 가고 편했는지, 얼굴이 더 좋아졌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엘리자베타가 피식 웃으며 걸음을 내디딜 무렵,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익숙한 듯 낯선 사람이었다. 투명한 안경 너머 검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엘리자베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발드르 공.”
테세우스는 깔끔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굽이치는 금발, 오만할 정도로 당당한 표정, 여유로운 미소.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이혼을 제안하던 날도, 이혼하여 공가를 나가던 날도 그녀는 이런 모습이었다.
테세우스는 제 감정을 꾹 누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랜드 공.”
가슴이 술렁였다.
테세우스에게 엘리자베타는 ‘그랜드 공’이 아니라 여전히 ‘부인’이고 ‘리즈’였기 때문에.
발드르 공작저 안주인의 방은 엘리자베타가 머물 때와 침구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테세우스는 서로 숨을 나누었던 그곳을 찾아 그날을 되짚곤 했다.
그녀는 그를 놓았으나, 그는 단 한순간도 그녀를 놓지 못했다.
그는 홀로 무너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여전했다.
그게 참 아팠다.
테세우스는 느리게 숨을 몰아쉬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끊어진 인연을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