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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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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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2)
2022.05.17.
그러나 아델은 황제의 요청을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폐하. 고트로프와 에흐몬트는 역사가 다르고 국민성도 다르며, 따라서 정치의 성향도 다릅니다. 제가 감히 도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몇 번이나 거듭된 간절한 요청에도 아델의 의사는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고트로프의 황녀였던 제게 에흐몬트의 황제께서 가르침과 조언을 받는다니요. 자칫 외세의 국정 간섭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안건에 대한 의견 역시 신하 된 자가 사사로이 참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구구절절 합당한 반박에 골머리를 썩이던 엘리자베타가 한 가지 꾀를 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술자리였다. 아델에게 술친구로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느냐 제안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엘리자베타의 묘안은 적중했고, 결국 이를 핑계로 아델은 황제의 질문에 성실히 응해 주었다. 어디까지나 ‘술자리에서 오가는 가벼운 환담’임을 강조했지만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델은 함께 술을 마시자는 황제의 요청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애마의 출산을 기념한다는 황당한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결국은 ‘오늘 나를 좀 도와주시오’란 뜻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안정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어야 제국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여 백성들의 삶도 안정시킬 수 있으니 신하로서 마다할 명분이 없었다.
아델은 여러 안건에 대해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접근했고, 엘리자베타가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리오넬이었다. 자정 무렵 그에게 사람을 보내며 얼마나 아쉬웠던가.
“헤르베르트 후작에게 오늘은 좀 미안하군.”
그간 뻔뻔하게도 시동생을 따돌린 엘리자베타조차 오늘은 꽤 미안한 눈치였다. 그러나 당장 아델의 의견을 물어보고 해결해야 할 안건이 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애초에 황제도 아델도 각자 일이 많아 이슥한 밤이 되어서야 술자리가 시작됐다. 밤이 깊도록 두 여자가 술잔을 기울이며 나랏일을 논하는 사이, 긱스 부인이 돌아왔다.
“시각이 너무 늦었습니다. 그만 두 분 모두 주무시지요.”
긱스 부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두 여자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귀한 피를 타고나 남 눈치를 크게 볼 일 없는 황족들은 대개 말해 주지 않으면 상대의 소소한 서운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제와 아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긱스 부인은 두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조심스럽게 주제넘은 참견을 했다.
“두 분 모두, 내일은 되도록 가정에서 부군을 마주하시길 바랍니다.”
두 지배자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동시에 날아들었으나, 노부인은 꼬장꼬장한 표정을 고수하며 다시 한번 힘주어 강조했다.
“꼭이요.”
* * *
친히 아델을 귀빈실로 안내한 긱스 부인이 넌지시 물어 왔다.
“폐하와 어떤 용무로 만나고 계신 것인지 헤르베르트 후작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
아델이 나른하게 눈만 슴벅이며 답이 없자, 노부인은 그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 카를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의 횡포 앞에서도 흔들림 없던 발드르 형제들이 바싹바싹 마르고 있는 것이겠지.
노부인은 웅장한 귀빈실로 들어와 문을 닫은 다음, 말을 이었다.
“그저 술자리를 가진다고만 알고 계시겠군요.”
그녀의 말에 지금껏 나른한 기색이 역력하던 아델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아델은 엄격하게 안광을 빛내며 노부인을 직시했다.
“부인, 나와 폐하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친분으로 말미암은 가벼운 술자리일 뿐이오. 거기에 다른 의미를 붙이면 곤란하오.”
아델의 분위기에 압도된 긱스 부인은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으며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예,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긱스 부인도 아델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마음고생으로 어두워지는 헤르베르트 후작의 안색을 모른 척할 수도 없지 않은가?
오늘 같은 날마저 황제에게 아내를 빼앗긴 후작의 눈빛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그래도 후작께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을 해 드려도 되지 않습니까? 두 달 만의 귀환이십니다. 그간 얼마나 기다리고 계셨겠어요.”
노부인의 조언에 아델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낮게 내리깔았다.
‘아델, 반드시 지켜야 할 비밀이 있다면, 너 자신에게조차 감추겠다는 마음을 가져라. 군주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수많은 이의 명운이 달려 있기 마련이란다.’
걸음마를 할 무렵부터 그녀를 무릎에 앉혀 두고 국사를 보았던 아버지의 가르침들은 인이 박여 그녀의 사고 전반을 지배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언제나 개인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책무를 우선하여 살아왔고, 제국과 황제를 위해 매번 엘리자베타의 청에 응했다.
신하로서의 도리를 지키며 그것이 정말로 술자리로만 끝나야 한다고 믿기에 입 밖으로 사정을 꺼낼 수 없었다.
마땅히 옳은 행동이었으나, 과연 리오넬에게도 연인으로서 옳은 일이었을까.
긱스 부인이 머리카락을 빗어 주는 사이, 한참이나 말이 없던 아델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많이 서운했겠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시면, 서운하지 않으실까요?”
이런 날, 리오넬이 끝내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지금껏 그는 늘 그녀를 최우선으로 두고 단 한 순간도 그녀를 기다리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염없이 기다리던 그가 다른 중요한 일이 있다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심장이 꺼멓게 죽어 가는 듯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단지 가정일 뿐인데도 서운함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노도처럼 그녀를 강타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명분도, 도리도, 때론 필요 없는 법이랍니다.”
긱스 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벗어 두었던 겉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부인. 기껏 방을 준비해 주었는데 미안하오. 후작저로 가 봐야겠소.”
긱스 부인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 보세요.”
그녀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아델은 이미 방을 나서고 있었다.
* * *
한편, 아델이 방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참 동안 안건을 살피던 엘리자베타는 오랜만에 부부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싸늘하게 식어 있는 방이었다. 당황하여 멀거니 어둠에 휩싸인 방을 살피기를 한참, 황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돌아온 긱스 부인이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오늘 대공 전하는 대공저에서 머무신다고 하였습니다.”
“아…… 공저에서 일이 많았던 게로군.”
황제가 납득했다는 듯 간신히 덧붙였으나, 긱스 부인은 가차 없이 대답했다.
“아뇨. 오셨다가 도로 가신 것으로 압니다.”
“……왜?”
테세우스가, 왜?
긱스 부인은 태생적 오만함에서 기인한 이기적인 물음에 몹시 피로해졌다. 그녀는 말없이 엘리자베타를 화장대로 이끌었다.
“대공께서 이곳으로 오시는 까닭은 오로지 폐하와 함께하기 위함이신데, 폐하께서 계시지 않으니 대공께서도 이곳에 머무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
엘리자베타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지자 긱스 부인은 기세를 몰아 말을 더 이었다.
“대공께서는 아무리 늦어도 먼 길을 달려 꼭 황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폐하께선 홀로 집무실 곁방에서 잠들어 계셨지요.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아, 그건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압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셔요.”
“…….”
엘리자베타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긱스 부인은 시무룩해진 황제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어 주다가 슬쩍 조언했다.
“아까 위버링겐 백작께서는 후작저로 돌아가셨습니다.”
황제가 내리깔았던 눈을 번쩍 들며 물었다.
“지금, 이 늦은 시각에?”
“서운한 연인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시각, 도리, 명분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노부인의 서늘한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 * *
한편, 마음이 조급해진 아델은 어둠을 가로질러 말을 달렸다.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날카롭게 후려쳤다. 왜 진작에 리오넬의 입장을 더 헤아리지 못했을까. 후회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망연한 눈으로 방 안을 훑는 아델에게 집사가 넌지시 답을 주었다.
“후작님께서는 발드르 대공저에 가셨습니다, 백작님.”
“……대공저에? 언제?”
“백작님께 연락을 받은 뒤였습니다.”
“…….”
아델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등 뒤로 넘겼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며 서성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기다렸지?”
후작저의 사용인들은 후작보다 백작을 훨씬 어려워했다. 아델이 가진 배경도 배경이지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가 어딘지 인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느긋하고 우아한 밀림의 표범 같던 그녀가 처음으로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자 집사는 몰래 미소 지으며 얼른 덧붙였다.
“백작님이 안 계신 동안엔 늘 밤잠을 설치십니다.”
“…….”
“오늘도 언제 오실지 하염없이 기다리셨고요.”
아델은 집사의 말에 우두커니 서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도로 몸을 돌렸다. 눈치 빠른 집사가 재빨리 속삭였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리고 빠르게 멀어지는 작은 등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서 가셔서 잔뜩 삐진 후작님을 좀 모셔오세요.
* * *
약 두 시간 전.
발드르 대공저 집사는 예고도 없이 공저에 나타난 리오넬을 당황스레 바라보았다.
“……후작님?”
리오넬은 짙은 어둠이 드리운 얼굴로 대공저의 웅장한 건물을 올려다보더니 음산하게 물었다.
“형님을 좀 만나 뵀으면 하는데.”
……이 시간에요?
집사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으나 얼른 그를 안으로 모시며 대답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대공 전하께서는 보통 궁에서 주무시는데, 오늘은 다행히도 이곳에 계십니다. 깨어 계시기도 하시고요.”
리오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오늘은 형 역시 궁이 아니라 이곳에 있을 것 같았다. 아델이 누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가? 다름 아닌 그의 형수가 아니신가! 그러니 형의 처지도 그와 다를 바 없을 터였다.
리오넬은 집사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물었다.
“침실에 계신가?”
“아뇨. 가족실에 계십니다.”
그럼 그렇지.
집사의 대답에 리오넬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한편, 홀로 밀주를 꺼내 놓고 쓰린 속을 달래던 테세우스는 갑작스러운 리오넬의 방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어서 와라. 앉아.”
리오넬은 밀주 원액이 담긴 잔을 일별하며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희석도 안 시키고 드시는 겁니까?”
“하도 이리 즐기시기에, 도대체 무슨 맛인가 해서.”
“……저도 한 잔 줘 보십시오.”
“독해. 솔직히 말하자면 맛도 없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세우스는 리오넬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리오넬은 불빛에 불그스름하게 보이는 밀주 원액을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술이 훑고 간 식도에 마치 화기가 스쳐 간 것처럼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리오넬의 미간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도대체 이걸 몇 잔이나 드시고 계실까요.”
“모르지. 긱스 부인을 믿는 수밖에.”
“…….”
“…….”
형제는 말없이 서로를 빤히 쳐다보다가 동시에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선을 모로 내리깔고 한참이나 침묵하던 리오넬이 못 참겠다는 듯 밀주를 한 잔 더 따랐다. 그러자 테세우스도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형제는 서로의 처지가 비슷하다 느끼며 말없이 독한 밀주를 거푸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다투신 날이면 홀로 술잔을 기울이셨는데, 이제야 어렴풋이 왜 그러셨는지 이해가 돼.”
“그러셨나요.”
“너야 어렸으니 기억 안 나겠지.”
리오넬은 고개를 돌려 거대한 화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계셨다. 리오넬의 얼굴이 그리움이 스쳐 갔다.
어린 시절, 리오넬은 사고를 친 날이면 언제나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화가 난 어머니를 피해서 너른 등 뒤에 숨으면, 아버지는 아내와 말썽꾸러기 아들 사이를 부드럽게 중재해 주시곤 했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꼬리, 위풍당당한 자세, 늘 입가에 머물던 여유로운 미소까지. 어머니는 그의 기억 속에서 늘 강인한 사람이었다.
리오넬은 작게 고개를 내젓다가 중얼거렸다.
“아버진 마지막까지 어머니껜 약하셨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형제는 또다시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유전인 것 같고.”
테세우스의 말에 리오넬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 폐하와 좀 대작해 드려. 밤마다 무작정 밀주랑 잔을 들고 폐하 집무실을 찾아가란 말이야. 행여 술 취향 같은 소리를 할 거라면 집어치우고. 지금 취향이 문제야?”
그러자 테세우스도 억울하다는 듯 곧장 항변했다.
“무슨 연유로 집무실에 계신지를 모르지 않은데, 어떻게 그래?!”
“어림짐작하지 마. 그럼 도대체 왜 위버링겐 백을 그토록 찾으신다고 생각해?!!”
“……그러는 너야말로 위버링겐 백작에게 밤마다 술을 권하도록 해라. 늘 폐하께서 먼저 술을 청하신 건 사실이지만,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 나는 법 아니야?!”
“…….”
“…….”
결국 상처만 남은 공방전 끝에 형제는 입을 다물며 서로의 잔에 씁쓸하게 술을 채웠다.
그렇게 그들이 말없이 술을 들이켜려는 찰나였다.
똑똑똑.
간결하고도 빠른 노크와 함께 불쑥 나타난 집사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는 형제를 향해 싱긋 웃으며 귀빈들의 방문을 알렸다.
“황제 폐하와 위버링겐 백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