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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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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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3)
2022.05.21.
위용 넘치는 건물 앞에서 마주친 두 여자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차갑고 황량한 바람이 황제와 백작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어색한 미소를 입에 걸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헤르베르트 후작이 이곳에 있다 하여…….”

“대공이 이곳에 있다 하…….”
결국, 두 사람은 머쓱하게 말끝을 흐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저택 내부로 발을 들이며 엘리자베타가 아델에게 속삭였다.

“미안하오. 나 때문에 백작도 아주 곤란해졌군.”

“아닙니다. 저도…… 좀 무심했습니다.”
이내 다급한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두 남자가 층계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델…….”

“폐하…….”
아델은 어딘지 핼쑥한 리오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리오넬은 아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껏 그를 낙담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건만, 그녀를 마주하는 순간 서운하던 감정이 햇살 앞의 이슬처럼 증발하며 속도 없이 가슴이 술렁였다.
아델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눈가가 어쩐지 불그스름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단단한 팔을 끌어안듯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마주하는 얼굴은 분명 두 달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녀가 없는 내내 잠을 설치고 힘겨워했다던 집사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아델은 몹시 미안해졌다.

“미안해, 리오.”
아델이 입 모양으로 속삭이자, 그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리오넬의 눈가에 그제야 미미한 미소가 섞여들었다. 황량한 겨울 틈으로 봄바람이 스며든 것 같은 변화였다.

“집에 가자.”
아델이 그의 팔을 잡아끌자, 리오넬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손을 꼭 잡았다.
한편,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안해, 테세우스.”

“…….”

“정말 미안해. 다시 돌아가자.”
테세우스는 풀 죽은 엘리자베타의 자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거뭇한 그늘이 내려앉은 눈가를 쓸었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엘리자베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쏟아지는 중압감에 이기지 못하고 테세우스는 물론이거니와 아델 부부에게까지 폐를 끼쳤다. 엘리자베타는 시동생을 돌아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미안하네.”
리오넬은 황제의 사과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아니야, 미안해. 오랜만에 백작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을 텐데.”
층계참에 선 에흐몬트 최고 권력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대공저 집사가 웃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는 사이, 아닌 밤중에 가출했던 대공과 후작은 기다렸다는 듯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그러나 이미 밤이 깊은 시간 아닌가? 집사는 호위로 따라온 이들을 힐끔 일별하며 두 부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시각이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네 분 모두 이곳에서 주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나, 네 명의 권력자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넷 모두 술기운이 돌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럼, 그럴까?”
황제의 승낙에 집사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 * *
아델은 귀빈실 대신 리오넬이 쓰던 방에서 머물고자 했다. 사용인들이 벽난로에 불을 지피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 부부는 각자 따뜻한 물에 목욕을 마쳤다.
편안한 슬립 드레스로 갈아입은 아델이 가운을 두른 채 방으로 돌아왔을 때, 리오넬은 침대맡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은 머리카락을 말려 주기 위해 따라 들어온 사용인을 물린 채 그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평소와는 달리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생경했다.
아니라 해도 여전히 서운하리라. 아델은 슬쩍 고개를 기울여 그의 표정을 확인하려 했지만, 방이 어두워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황제와의 음주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고, 오늘은 특별히 더 많은 술을 마셨다. 여독에 피곤했던 터라 평소보다 더 빨리 돈 취기가 가시지 않았다.
찬 바람에 술이 깼나 싶었으나, 따뜻하게 목욕하니 도로 취하는 듯 몽롱했다. 아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그녀라고 왜 그가 그립지 않았겠는가. 황제의 다급한 표정을 보면서도 내심 얼마나 애석했는지. 긴 여정 동안, 이런 순간만을 떠올렸다.
아델은 두르고 있던 가운을 벗은 다음 사뿐사뿐 걸어가 리오넬의 뺨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그렇게 검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채, 아델은 술기운이 올라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싱긋 웃으며 그의 무릎에 걸터앉았다.

우람한 그의 몸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델은 매혹적으로 웃으며 그의 등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미안.”

“…….”

“보고 싶었어. 그리웠고. 이런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말 미안.”
리오넬은 제 목을 얽어 오는 가느다란 팔을 느끼며 그녀의 젖은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깊게 들이켜는 숨에 늘 그리던 향이 묻어났다.
리오넬은 거칠게 맥동하는 심장 소리를 무시하며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 안 오신다고 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가 덩치 큰 강아지처럼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리자,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너른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녀가 너무 무심했던 게 맞았다.
아델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동안 그녀가 황제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는지 이야기했다. 리오넬은 황제가 그녀의 조언을 듣고자 매번 술자리를 핑계 삼았다는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숨겨서 미안해. 그래도 술자리에 특별한 의미를 두면 안 된다 여겼어. 밖으로 새어 나갔다간 여러모로 곤란해질 테니까.”

“그래도 제게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저는 늘 술이 마시고 싶으셔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냐.”
아델이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붙잡고 간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정말 미안해.”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는 이 남자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녀에게 숨기거나 속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에 생각이 미치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리오넬은 울상이 되어 시무룩해진 아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 얼굴을 보니 미약하게 남아 있던 서운함의 찌꺼기마저 단번에 소실되었다.

“괜찮습니다.”
여린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며 리오넬은 계속 속삭였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아델은 리오넬이라는 남자를 택하기 위해 그토록 사랑했던 고국도 등진 채 이곳 에흐몬트로 혈혈단신 돌아왔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고작 이런 작은 일들로 그녀에게 섭섭했던 제 좁은 속내가 못내 미안했다.

“괜찮아요. 그간 이해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델은 리오넬의 손길을 느끼며 결 좋고 검푸른 머리카락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젠 너도 내게 말을 낮춰, 리오.”
등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멎었다. 그래도 아델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그랬으면 좋겠어. 우리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바라보기를 원해. 그리고 내가 이번처럼 당신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부디 혼자서만 참지 말고 내게 말해 줘.”
결국, 리오넬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아델도 제게 서운한 일이 있으면 참지 마십시오.”

“응. 말을 놓으라니까.”

“천천히…….”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과 달콤한 향내에 잠시 가라앉았던 열기가 뇌를 녹일 듯 치솟았다. 리오넬은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에 뉘었다. 아직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숨 막히게 관능적이었다.
맞닿아 오는 거친 숨결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연인은 오랜만의 재회를 밤새도록 만끽했다.
* * *
한편, 그 시각.
죄 많은 엘리자베타는 테세우스를 앞에 앉혀 두고 사과와 맹세를 거듭하고 있었다.

“미안해, 테세우스. 앞으로는 되도록 잠은 꼭 부부침실에서 자도록 할게.”
테세우스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부쩍 여윈 뺨이 더욱 도드라졌다. 황금빛으로 굽이치는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어깨도 뼈가 불거질 정도로 살이 내려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왜 자꾸 위버링겐 백작을 부르느냐면, 내가 실은 그녀에게…….”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던 엘리자베타의 말끝이 흐려졌다. 테세우스가 바싹 마른 그녀의 뺨을 찬찬히 매만진 탓이다. 검푸른 눈동자에 서린 온기와 손끝에 실린 염려에 엘리자베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마디가 불거진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고, 다정하게 등을 쓸어내렸다. 과거 엘리자베타가 공작 부인이었던 시절, 정쟁에 지쳐 굳어진 테세우스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듯이.
손끝에 걸리는 앙상한 뼈의 느낌에 가슴이 저렸지만, 테세우스는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굳어 있던 작은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엘리자베타는 길고 나른한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단단한 가슴 너머에서 심장 고동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칼끝을 걷는 것처럼 예민해졌던 신경이 서서히 문질러졌다.

“미안해.”
자그맣게 속삭이는 말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래도 너는 이렇게 가지 마.”
이번엔 눈가에 머물고,

“가지 마, 테세우스. 침실에 갔는데 당신이 없었어.”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배회했다.
엘리자베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사랑해.”
테세우스는 결국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댄 채로 속삭였다.

“당신이 황제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늘 노력하는 것을 압니다. 홀로 걷는 길이라 막막하다는 것도 알아요. 그러니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신 이리 찾아오시게 하지 않겠습니다.”
다디단 숨이 겹쳐 들고, 맞닿아 오는 몸은 용광로에서 끓는 쇳물처럼 뜨거웠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숨을 삼키고 또 삼키며 있는 힘껏 서로를 끌어안았다.
* * *
뜨거운 재회가 새벽녘까지 이어진 터라, 두 커플은 집사의 배려로 오전 내내 잠을 자다가 정오 무렵에야 눈을 떴다.
아침 식사 겸 점심 식사를 위해 식탁에 마주 앉은 자리. 엘리자베타는 몹시 민망한 얼굴로 작게 헛기침을 하며 집사에게 말했다.

“간밤의 추태를 모두 잊도록 해.”
그러자 그녀 앞에 식기를 직접 놓던 집사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간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폐하?”
엘리자베타는 피식 웃으며 그들 앞에 마련된 근사한 식사를 눈으로 훑었다.

“집사. 잠시 물러나 주게. 할 말이 있거든.”

“예, 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집사는 귀빈과 주인 부부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조아린 뒤 사용인들에게 눈짓했다.
이윽고 모두가 물러가자, 엘리자베타는 황제의 가면을 벗어 버리고 맞은편에 앉은 시동생에게 소탈한 사과를 건네며 그녀가 아델을 자꾸만 따로 불렀던 진짜 이유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이미 지난 밤 아델에게 들은 내용이었으나, 리오넬은 진지한 얼굴로 엘리자베타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된 사정이니, 앞으로는 주의하겠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폐하. 다만, 다음엔 그 자리에 저도 함께 불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단순한 술자리가 아닌 까닭으로, 두 여성의 밤 모임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었다. 그래서 리오넬은 차라리 자신도 그 자리에 함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지금껏 엘리자베타가 얼른 표정을 바꿨다. 지엄한 황제의 가면을 도로 쓴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폐하.”

“황제가 가르침과 조언을 받는 자리에 구경꾼을 앉혀 둘 수는 없지 않겠어?!”

“하면, 다 좋으니 밀주 원액만이라도 삼가십시오. 도대체 어제도 몇 잔이나 들이켜신 겁니까? 그게 정말이지 몸에 해로워……,”

“크흠. 알겠네, 알겠어. 어서 식사들 하지. 시간이 이렇게 늦어지다니. 테세우스, 얼른 환궁하자고.”
알았다고는 하는데 어찌나 못 미더운지. 테세우스도 아델을 향해 간곡히 청했다.

“백작, 술은 적당히 드십시오.”

“그러지요.”
이쪽 역시 그러겠다고 하는데 못 미덥기는 마찬가지. 결국, 발드르 형제는 ‘믿을 사람은 긱스 부인’이라는 말을 또 한 번 되뇌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뒤, 그녀들의 걱정스러운 음주 생활을 막은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