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6)
(122/127)
122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6)
(122/127)
122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6)
2022.05.31.
태후는 딸이 올 때까지 느린 걸음을 걷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네 아이 태몽을 내가 꾼 것 같다.”
“태몽이요?”
“그래. 내가 네 태몽으로 호랑이 꿈을 꾸었다고 말했니? 아무튼, 그 호랑이가 또 꿈에 나왔어. 아마 널 닮은 아이이지 않을까 싶구나.”
아델은 걸음을 걷다가 물끄러미 배를 내려다보았다. 태후는 그런 딸을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넌 나와 많이 닮았지만…… 나와는 다른 어미가 되길 바라마.”
아델이 고개를 들자, 태후는 시선을 틀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아니, 너라면 틀림없이 나와는 달리 좋은 어머니가 되겠지.”
태후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걸음을 옮겼다.
태후가 후작저에서 머무는 동안, 그녀의 사위는 딸 곁을 맴돌며 제 아내를 살뜰히 챙기느라 늘 여념이 없었다.
리오넬이 직접 꾸민 아기방을 포함해 집 안 구석구석 아델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시녀 말에 의하면 식자재 창고엔 오로지 아델만을 위한 신선한 식자재가 가득하다고 했다. 태후가 처음 후작저를 찾았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딸은, 그 사내로 인해 죽지 않았다고 했다. 제가 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제 행복을 위해 그를 택했다고 했다.
입덧으로 바싹 마른 아델을 본 뒤로, 태후는 몇 차례나 악몽을 꾸었다. 차디찬 시신이 되어 돌아온 딸을 제 손으로 거두는 꿈이었다.
‘아델!!!!!!’
꿈임에도 제 목소리가 어찌나 섬뜩하고 소름이 돋는지, 깨어난 뒤에도 좀처럼 떨림이 가라앉질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 한결 살이 오른 딸의 얼굴과 그 곁을 든든히 지키는 사위를 볼 때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태후의 빙벽 같은 가슴속에 휘몰아쳤다.
태후는 그렇게 한 달여를 머물다 에흐몬트를 떠났다.
떠나는 날, 그녀는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온 리오넬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사위에게만큼은 냉소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정스레 어깨를 두드려 주던 이도 아니었다. 시녀들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태후가 짤막하게 말했다.
“고맙네.”
“…….”
“잘 부탁하고.”
“어머님.”
리오넬이 얼른 그녀의 손을 붙잡자, 태후는 보일 듯 말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틀어 딸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낳거든 되도록 손목은 쓰지 말고. 금세 아플 거다.”
“벌써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쌀쌀맞기는.”
“조심히 가세요. 감사했어요.”
“그래.”
태후는 한 달 만에 건강을 많이 회복한 아델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다 창문을 열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리오넬에게 말했다.
“자네 형님도 입덧을 하는 것 같으니, 육포를 좀 챙겨 드리게!”
“예?”
“그래 보였어. 형제가 아주 다정들 하구먼.”
황당해하는 이들을 남겨 두고 태후는 화통한 웃음과 함께 떠나갔다.
* * *
태후가 다녀간 뒤, 아델의 몸은 더욱 좋아졌다. 오랜만에 황궁으로 출근한 그녀를 황제가 친히 마중했다.
엘리자베타는 아델을 정원으로 이끌었다.
“고트로프 황제의 두 번째 선물은 정리가 끝났소?”
“예. 거의 끝나 갑니다. 좀 과하셨지요.”
루시오가 누이를 위해 또다시 보내온 엄청난 선물에, 엘리자베타는 허허롭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델은 엘리자베타에게도 선물 받은 귀한 약재를 보냈는데, 두 사람이 현재 마시고 있는 차 또한 그 일부를 다린 것이었다.
엘리자베타는 꽤 익숙해진 차향을 음미하며 한 김 식은 차를 홀짝였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델을 일별한 그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 보면 발드르 형제도 과한 면이 있지 않소?”
“…….”
짓궂은 물음에 아델도 입꼬리를 씰룩였다.
“세상에……. 나는 남편 입덧이란 말도 처음 들어 봤소.”
“크흠흠. 대공저 집사 말에 의하면, 선대 공작께서도 그러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런 것도 집안 내력이라니 놀라운 일이지. 근데, 나는 몹시 곤란하지 않았겠소?”
아델은 대공의 체면을 생각하여 필사적으로 턱에 힘을 주며 웃음을 참았으나, 엘리자베타는 거침없었다.
“후작이야 아내가 그토록 힘겨워하니 살이 빠져도 모두가 그러려니 했소. 한데 대공은 말이지, 나는 이렇게 살이 오르는데 그쪽만 살이 쏙쏙 빠지니 마치 내가 대공 몫의 음식까지 모조리 먹어 치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겠소?”
“감히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대저 임신한 아내의 남편이라면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죠.”
“그런데 진짜 입덧이었다는 것이 기가 막힌 지점이요. 나도 안 한 입덧을 말이지.”
“…….”
아델도 차마 그 말엔 대공을 두둔할 수가 없어서 찻잔을 기울였다.
두 여자의 담소가 한참 이어질 무렵, 발드르 형제가 각자의 부인을 찾아 나타났다.
“폐하.”
“아델.”
아델과 엘리자베타는 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대공.”
“리오.”
리오넬과 테세우스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각자 부인의 낯을 습관적으로 살폈다. 리오넬이 별안간 벌떡 일어나 차양을 좀 더 기울였다.
“해가 너무 들어오는군요.”
테세우스도 벌떡 일어나 거들었다.
“내가 봐도 그렇군.”
형제가 부산스럽게 움직이자 아델과 엘리자베타는 서로를 마주 보다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 * *
그렇게 감사하고 무탈한 시간이 흘렀다.
세상을 포근하게 감쌌던 온기가 열기로 바뀌며 파르라니 올랐던 새순이 울창하게 변해 갔다. 아델이 좋아하던 등나무꽃이 모두 지고, 아름드리나무의 잎사귀가 손바닥보다 커졌다.
그리고 그날, 이른 아침부터 요란한 여름비가 쏟아졌다.
요란한 빗소리에 잠을 깬 아델은 뭔가를 직감한 듯 배를 매만졌다. 싸늘한 통증이 서서히 엄습하자 배가 수축하며 딱딱해졌다.
먼저 잠에서 깨어난 리오넬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건넸다.
“아델, 잘 잤어? 몸은 좀 어때?”
그러는 사이 싸늘하게 엄습했던 통증이 살짝 물러갔다. 잠시 긴장했던 몸이 풀리자 긴 한숨이 쏟아졌다.
“왜, 어디 아파?”
리오넬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몸을 낮춰 아델과 눈을 맞춘 채 곧장 그녀의 배를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졌다.
아델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싸늘한 통증이 엄습하며 배가 딱딱해졌다.
“리오. 아무래도 진통이 오는 것 같아. 의원을 불러 줘.”
순간 리오넬은 숨을 멈췄다. 단정한 눈매가 매섭게 굳으며 수려한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리오넬은 곧장 방 밖으로 달려 나가 집사를 찾았다. 집사가 보이자마자 그는 기다렸던 사람처럼 빠르고 간결하게 명령했다.
“산파와 의원을 데려와라. 내가 준비했던 모든 출산 도구를 챙겨오고 예정해 두었던 유모도 불러와. 뜨거운 물은 상시 이용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물을 계속 끓여라.”
눈치 빠른 집사는 두 번 묻지 않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더불어 산실이 있는 복도엔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말고, 정해진 이들만 오갈 수 있도록 해. 출산 직후엔 딱딱한 음식은 안 되니 주방장에게 미리 말해 두고. 기사관저엔 오늘 업무를 보지 않는다 전해라.”
“예!”
모든 명령을 마친 리오넬은 아델의 곁으로 돌아왔다.
시녀들의 도움으로 출산하기 편안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벌써 머리카락이 젖을 만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리오넬은 시녀에게서 수건을 받아 들고 직접 아델의 이마를 훔쳐 주었다.
아델은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씩 강한 통증이 엄습하는지 미간이 일그러지며 호흡이 흐트러졌다.
리오넬은 아델의 부푼 배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품고 있는 열 달간, 아델의 몸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리오넬은 어찌하여 그 모든 고통을 어머니만 감내해야 하는가, 무력하게 자연의 섭리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곁에서 수족처럼 이것저것 챙겨 줄 수라도 있었다. 한데, 고통스러워하는 아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순간엔 원망마저 사라지고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델…….”
리오넬은 경련하듯 벌벌 떨리는 손으로 아델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때, 후작의 명령을 받은 의원과 산파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있는 후작의 모습에 눈을 둥글게 떴다가 이내 슬쩍 웃었다. 그러고는 그를 부드럽게 타일러 후작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
“잘 부탁하네. 잘 부탁해.”
몇 번이나 거듭된 후작의 당부에 의원과 산파는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예, 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델도 애써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리오.”
리오넬은 몇 번이나 숨을 가다듬으며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 대기실로 마련된 옆 방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와서도 그는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서성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오넬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고, 그래도 불편하여 목을 갑갑하게 하는 단추도 풀어 버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성이기를 한참, 소식을 들은 테세우스가 그를 찾아왔다.
테세우스는 마치 상처투성이로 좁은 우리 안에 갇힌 맹수같이 침묵하는 동생의 모습에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그저 축 처진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었다.
의아하게도 저택은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백작이 아이를 낳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무렵, 리오넬이 별안간 산실로 난입하려 했다.
“아델이 괜찮은지 좀 봐야겠다.”
“계속 애쓰고 계십니다. 들어오지 마십시오.”
“괜찮은 것이 확실한가!? 어찌하여 아무런 소리도……!”
막무가내로 아델의 얼굴 보려 몸을 들이밀던 리오넬은 어느 순간 탄식하더니 시녀가 미는 대로 밀려났다.
시녀는 그 기세를 몰아 아예 문을 닫아 버렸고, 리오넬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에 머리를 기댔다.
열기가 치미는 산실에선 아델의 거친 숨과 끊어질 듯한 옅은 신음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문을 뚫을 정도의 비명을 지르지만 않았을 뿐, 그녀는 홀로 진통과 싸우고 있었다.
“아가야, 제발 빨리 나와라. 네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고통이 묻은 음성에 테세우스의 가슴도 선득해졌다. 최근 그 역시 무섭게 부푼 엘리자베타의 배를 볼 때마다 그녀가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낳을 수 있을지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조용히 일어나 거칠게 들썩이는 동생의 어깨를 다독였다.
리오넬은 미칠 것 같은지 애써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방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비와 함께 시작된 진통은 정오가 지나서도 그칠 줄을 몰랐고, 쏟아지는 비 또한 마찬가지로 그칠 줄을 몰랐다.
세상을 쓸어 버릴 기세로 몰아치는 빗줄기에, 리오넬은 제발 아델의 진통도 몰아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다급한 시녀들의 발소리, 뜨거운 물을 찾는 목소리 사이로도 끝내 아델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것이 리오넬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 얼마나 더 흘렀을까. 저러다 리오넬이 결국 산실로 쳐들어가지는 않을까 테세우스가 걱정하던 무렵, 별안간 거센 빗소리를 뚫고,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애, 응애, 응애.”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우렁찬 아이의 울음에 리오넬은 물론이거니와 테세우스마저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