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외전4. 호랑이 보러 가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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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외전4. 호랑이 보러 가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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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외전4. 호랑이 보러 가자 (1)
2022.06.07.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또다시 봄이 오길 반복했다.
비바람이 들이치고 폭풍우가 몰려와도 태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을 따사롭게 비추고, 앙상하던 나뭇가지는 어느새 굵어지며 나이테를 늘려 갔다.
시간은 때로는 무심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흘러갔다.
아델은 이미 거품을 물고 질주하는 말을 더 채근했다. 관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저 멀리 달려오는 그녀를 보고는 얼른 문을 열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백작님!!!”
“고맙네!!!”
엄청난 속도로 관문을 통과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병사들이 인사를 건네자 아델도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몇십 분 뒤, 지평선 너머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히 보아 오던 광경인지라 병사들은 어찌하여 탑 대항 본부의 수장과 단원들이 이토록 큰 격차를 보이며 따로 오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탑 대항 본부 단원들도 부러 아델을 따라잡으려 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델의 마음은 이미 후작저에 닿아 있었다. 저 멀리 집이 보이자 바짝 달아올랐던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며 온몸이 눅진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다 왔다.”
환희에 찬 음성이 따스한 봄날 햇살 속으로 잘게 부서져 스며들었다.
* * *
두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델을 발견한 후작저의 집사가 얼른 달려 나왔다.
“백작님!”
그러자 아델은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이며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그녀의 의사를 알아들은 집사도 퍼뜩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속삭였다.
“후작님께서는 등나무 그늘에서 쉬고 계십니다. 도련님, 아가씨도 함께 계세요.”
집사의 말에 아델은 살금살금 정원으로 향했다. 그녀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곳곳에서 조용히 인사를 건네 왔다.
아델은 그들에게 가벼운 눈인사로 화답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지나온 바람이 코끝을 맴돌자, 다채로운 꽃향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이번 여정은 유난히 길었다. 출정 내내 이 순간만을 고대했기에 아델의 가슴은 터질 듯 벅차올랐다.
여린 싹이 오른 아름드리나무를 지나니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이거 좀 봐 봐!”
아델의 입술이 위로 치솟으며 하얀 치아가 반짝였다.
“응? 좀 와 봐아!”
“엘라. 나 지금 숙제하느라 바빠. 네가 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해 줘.”
“아, 정말 직접 와서 봐야 해!”
“엘라, 그게 뭔지 아빠에게 알려 줄래?”
아옹다옹하는 남매의 목소리 위로 다정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오라버니랑은 안 놀아. 서운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하나도 안 서운해.”
잠시 침묵이 맴돌더니 다소 불퉁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아버지. 서운하지 않은 것을 서운하지 않다고 하지 그럼 뭐라 그래요.”
보아하니 리오넬이 아들을 엄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모양이었다. 아델은 웃음을 참으며 코너를 꺾어 돌았다.
완연한 봄을 담은 한 폭의 명화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색색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배경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이 한 폭에 모두 담겨 있었다.
“리오넬.”
아델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딸을 바라보고 있던 리오넬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리오넬은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난 아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높게 묶은 그녀의 등 뒤로 마법사단 단장을 상징하는 짙은 남색의 망토가 위풍당당하게 휘날렸다.
“엄마!!!”
엘라가 아버지의 품을 박차고 나와 있는 힘껏 어머니를 향해 내달렸다. 아델도 달려오는 자그마한 아이를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가볍게 달려 품을 파고드는 아이를 가슴 깊이 끌어안자, 조그마한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마주 안는 것이 느껴졌다.
아델은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딸을 끌어안은 채, 아들을 향해 팔을 뻗었다.
“알렉!”
아버지를 쏙 빼닮은 소년이 입술을 끌어 올려 씩 웃더니 힘차게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동생과 부딪힐 것이 염려되었는지 마지막엔 속도를 늦추고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안겼다.
“다녀오셨어요?”
“잘 지냈니?”
“물론이죠, 어머니.”
이제 갓 열 살이 되었음에도 또래답지 않은 의젓한 표정으로 아델을 올려다보던 알렉이 어머니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뒤로 물러났다.
그 모양을 본 엘라도 아델의 품에서 나와 제 오빠 옆에 섰다. 이제 부모님의 시간이란 것을 두 아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성큼성큼 다가온 아버지가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마주 안아 주었다. 봄볕이 묻은 두 사람의 얼굴이 그보다 더 따뜻하고 해사했다.
알렉산더는 조용히 부모님에게서 등을 돌린 다음 동생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엘라. 도대체 뭘 보여 주고 싶었던 건지 알려 줘.”
부모님 품에선 한껏 어리광을 피우던 엘라도 오빠가 부르자 얼른 몸을 돌렸다. 여덟 살 소녀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물씬 차올랐다.
엘라는 알렉을 앞질러 가더니 정원 한구석을 가리켰다.
“오라버니, 이거 봐 봐!”
알렉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푹 쉬더니 엘라가 가리키는 것을 보기 위해 허리를 기울였다.
예상대로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알렉이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를 들며 동생을 보자, 엘라도 똑같은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
“…….”
“인사 잘한다고 하고 싶었지?”
무덤덤한 말투에 엘라는 낯을 팍 일그러트렸다.
“레오 전하도 그렇고 오라버니도 그렇고, 어쩜 하나같이 재미가 없지?”
“왜 나에게서 네 재미를 찾아?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 레오 전하가 뭐야. 약칭에 존칭을 제멋대로 섞어 쓰는 게 어딨어.”
“……어서 가서 숙제해.”
알렉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리자 엘라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아델은 불만스러운 금안을 마주 보며 씩 웃었고, 엘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터덜터덜 다가오며 투덜거리듯 청했다.
“엄마. 수도 밖의 신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세요. 안 계신 동안 정말 너무 지루했어요.”
* * *
여독이 몰려든 아델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밤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곁을 손으로 훑었지만, 손끝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조용히 문이 열렸다. 사위가 어두워 윤곽이 흐릿하지만, 부러 그가 누구인지 물을 이유는 없었다.
“깼어?”
리오넬은 미지근한 물을 그녀에게 내밀며 침대맡에 앉았다.
“둘 다 잠들었어.”
아델은 물을 한 모금 삼켜 입을 가신 뒤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우람한 가슴이 그녀를 압박하듯 끌어안았다.
“하아…… 이번엔 너무 길었다.”
아델의 한숨과도 같은 투덜거림에 리오넬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길었지. 변경까지 다녀온 거지?”
“어. 돌아오려는데 마력이 느껴지잖아.”
아델은 눈을 감고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출정을 나가서도 이런 순간만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리오넬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금 내려가 눈가에 입을 맞춘 다음 입술을 맞대었다. 얇은 침의 아래 단단하고 날씬한 등허리가 아찔한 굴곡을 이루며 손 아래에서 미끄러졌다.
“리오.”
“음?”
“등나무 그늘에 가자.”
“……지금?”
아쉬움이 가득 묻은 음성에 아델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응. 지금. 나 좀 안고 내려가. 너무 지쳐서 걸을 힘도 없으니까.”
아델의 투정에 리오넬은 미련이 덕지덕지 묻은 손길을 거두며 그녀를 이불로 감싸 번쩍 안아 들었다. 아델은 그의 목덜미에 손을 휘감고 뺨에 입을 맞췄다.
“자꾸만 건드리지는 말고. 지쳤다는데 배려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
어쩐지 불퉁하게 들리는 음성에 아델이 웃음을 터트렸다. 리오넬은 솜씨 좋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본채를 벗어났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우아한 달무리를 휘감은 달이 훤한 밤이었다. 만개하여 흐드러진 보랏빛 꽃그늘 속으로 파고든 연인은 서로에게 기대앉았다.
아델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만졌다. 부드럽게 감기는 머리카락도 기분 좋고,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도 듣기 좋고, 그만의 체취도 향긋했다.
아델은 그의 품에서 긴장을 푼 채 단단한 가슴에 뺨을 묻고 늘어졌다.
“좋다.”
알렉과 엘라는 조금 특이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잠시 포옹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아예 폭 안겨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리오넬은 아이들이 그 부분은 외탁한 것이라 여겼다. 일정 선 너머로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던 루시오 황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그런 성정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걸 보면 그녀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도, 그녀는 아이들도 파고들지 않는 그의 품을 차지하고 앉아 나른하게 늘어지는 것을 좋아했다.
리오넬은 그녀의 그런 점도 좋았다. 그녀가 그에게만 보여 주는 모습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리오넬이 아델의 정수리에 턱을 댄 채 이불 밖으로 빼꼼하게 나온 하얀 발을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하자 아델은 나머지 한쪽 발도 이불 밖으로 쏙 내밀었다.
“좋다. 너무 좋아, 리오넬.”
웃음 섞인 숨소리가 어느 사이엔가 작고 느리게 변했다. 그녀가 다시 잠이 들었다.
리오넬은 입가를 끌어 올리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고쳐 안았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벅차게 부풀었다.
봄밤, 그의 봄이 소리 없이 가슴으로 괴어들었다. 이미 그녀로 물들어 더 들어올 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 * *
한편, 그 무렵 고트로프.
곱게 다듬어진 손끝이 무언가를 훑기 바빴다.
“보고 싶으십니까?”
태후는 고개를 뒤로 빼고 손바닥만 한 그림 두 점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며칠 전, 그녀의 살뜰한 사위가 꽤 많은 선물을 보내며 동봉한 아이들의 초상화였다.
검푸른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제 아버지를 쏙 빼닮은 소년과, 검은 머리카락과 금안이 제 어머니를 쏙 빼닮은 소녀가 초상화 속에 있었다. 태후의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자란 모습으로.
“알렉산더 요 녀석은 생긴 건 제 아버지 판박이인데 성격은 아델과 똑같아. 날 처음 보자마자 ‘할머님,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했다니까. 영민하기로는 아마도 에흐몬트 내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을 테지.”
“아델라이드 황녀님께서도 영민하셨지요.”
시녀장이 맞장구를 치자 태후는 눈을 지그시 내리깔며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리고 엘리노어.”
태후가 엘라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그것참. 요 녀석이 궁금하단 말이야. 지금 여덟 살이라는데, 나는 네 살 때 보고 못 봤어. 리오넬 말로는 엘라가 생김은 제 어머니를 닮았지만, 성격은 두 사람을 반반 섞어 놓은 것 같다더군.”
“자식이 부모를 골고루 닮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야 그렇지.”
오랜 시간 태후를 보필해 온 시녀장이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척 보고 싶으신가 보군요.”
태후는 눈썹을 까딱이더니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여전히 장년으로 보일 만큼 젊음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녀를 감싼 세월은 야속하리만치 흘러가 버렸다.
태후는 실낱같은 연기를 한참이나 자아내다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할 일이 없으니 그리되는군.”
“…….”
“이 내가 뒷방 늙은이가 되어 버릴 줄이야.”
태후는 긴 숨을 내쉬었다.
“하긴. 범 새끼가 범이지 살쾡이일까. 아델도 내 손아귀에 못 쥐어 놓고 루시오는 좌지우지할 수 있을 줄 알았으니, 내가 미련했던 것이지.”
그녀는 입에 궐련을 문 채 엘리노어의 초상화를 한 번 더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녀석. 그림인데도 그 눈빛이 제 어미 못지않구나.”
가뜩이나 무료하고 지겨운데, 이 녀석이나 보러 다녀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