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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외전4. 호랑이 보러 가자 (4) (127/127)


127화. 외전4. 호랑이 보러 가자 (4)
2022.06.18.


오랜만에 해후를 나누는 남매를 부드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리오넬도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폐하.”

“오랜만이오, 잘 지내셨소?”

루시오는 매형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가 놓은 다음, 제 아버지를 쏙 빼닮은 조카를 굽어보았다. 처음 만나는 외숙을 향해 알렉산더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폐하. 알렉산더 위버링겐 헤르베르트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그래, 알렉산더. 만나게 되어 나도 반갑구나.”

루시오도 소년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다정하게 화답했다.


“얼굴은 아버지랑 판박인데, 성격은 영락없이 어머니네.”

열 살 소년의 깍듯한 인사를 본 기벨린이 중얼거리는데, 때마침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아델이 요요하게 빛나는 금안을 초승달처럼 천천히 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기벨린과 테오도르, 카인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고개 들어. 다들 잘 지냈어?”

여전히 가슴을 술렁이게 하는 낭랑한 음성.

서서히 고개를 드는 카인의 눈에 아델의 모습이 한가득 들어찼다.

그가 아는 아델 황녀는 잘 벼린 한 자루의 명검 같던 이였다. 태양처럼 찬란한 금안은 때로는 매섭게, 때로는 거침없이, 때로는 유쾌하게 빛났지만, 부드러움이나 온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데 지금 그들을 향해 환히 웃는 아델라이드의 눈동자는 마치 풍요롭게 무르익은 황금빛 들녘 같았다. 창백했던 낯은 꽃물이 든 듯 혈색이 돌고, 베일 듯 날카롭던 위압감은 부드럽지만 성숙한 카리스마로 농익었다.

그야말로 더없이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카인의 눈을 통해 스며들어 심장을 온통 물들였다.

마음 한구석에 작게나마 남아 있던 미약한 미련의 찌꺼기마저도 하얗게 부서져 꽃잎처럼 흩날렸다.


“카인,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여전히 그의 마음을 술렁이게 하는, 그 고귀하고 찬연한 미소.

카인은 비로소 진심을 다해 마주 웃을 수 있었다.


“전하, 오랜만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델도 친우의 밝은 웃음에 화답해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려 주었다. 오래전 고트로프의 산야를 누비며 으레 그러했듯이.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닮은 햇살이 그들의 머리 위로 따사롭게 비쳐들었다.


 

* * *

항구에서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아델과 리오넬은 그간의 여정에 몸이 찌뿌둥하다며 마차 대신 말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루시오 황제의 마차엔 태후와 알렉, 그리고 엘라가 동승하게 되었다.


“폐하! 저 산은 이름이 무엇입니까?”

“발칸 산맥의 줄기란다. 고트로프 북부로 올라가면 까마득하게 높은 발칸 산맥이 장벽처럼 서 있지. 그 커다란 산의 줄기야.”

“저기엔 호랑이가 살아요?”

“지금 보이는 산엔 살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호랑이가 보고 싶니?”

“네!”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엘라와 알렉의 질문에도 루시오는 더없이 친절하게 답해 주며 때로는 조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태후는 엘라의 곁에 앉아, 평소에는 과묵하기가 이를 데 없는 아들의 낯설고도 신기한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엘라와 알렉은 외숙과 대화를 하면서도 창문에 딱 붙어 울창한 고트로프의 산림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와…….”

“녀석들, 그리도 좋은 게냐?”

태후는 자애로운 얼굴로 별 무리처럼 눈망을을 반짝이는 손주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피는 못 속이는 게지. 많이 보아 두거라. 너희들을 이루는 절반이 흐르는 땅이니.”

그런데 그 순간, 창밖을 바라보던 엘라가 돌연 비명을 질렀다.


“꺅!”

“엘라!”

“왜 그러니?!”

태후가 놀라 소녀를 얼른 품에 당겨 안는 동안, 루시오도 걱정스레 조카의 얼굴을 살폈다. 알렉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동생의 손을 와락 감싸 쥐었다.

마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엘라!”

태후가 불안한 목소리로 손녀를 불렀지만, 엘라는 눈을 크게 뜬 채 거친 숨을 헐떡일 뿐이었다.


“어디 아픈 거니?”

이리저리 아이를 살피다 궁의를 부르기 위해 루시오가 마차의 문을 열려는 순간, 하늘이 크게 울며 진동했다.

우르릉.

그 불길한 소리에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가운데 엘라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중얼거렸다.


“할머니. 온몸으로 물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뭐?”

“여기…… 여기에서 차갑고 시원한 물이…… 온몸으로 번져 나가는 것 같아요.”

멍하니 제 심장을 가리키는 아이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삶의 그 어느 순간조차 겁이 난 적이 없었건만, 태후는 손을 벌벌 떨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루, 루시오. 아, 아델을 불러라, 어서!!”

그런데 그때,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며 화창하던 날씨가 무색하게 섬광이 번뜩이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루시오가 채 움직이기도 전해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언제 돌아왔는지 아델이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루시오, 탑이 내려오고 있어! 기벨린, 테오도르, 카인과 내가 탑을 저지할 테니, 우선 어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황궁으로 몸을 피해!”

“아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엘라가……!”

손녀를 품에 안은 채 태후가 아델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치는 그 순간, 엘라가 뭔가에 홀린 듯 벌떡 몸을 일으켜 마차를 박차고 나갔다.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엘라!!”

 

* * *

엘라는 넋을 놓은 채 무작정 달렸다.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마차에서부터 소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폭포수처럼 소녀의 작은 몸을 휘감아 그녀조차도 알지 못했던 그녀 안의 무언가를 일깨웠다.


“엘라!!!!”

소녀의 귀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때아닌 눈발이 거칠게 휘날리는 가운데, 엘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두워진 하늘을 가르고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라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깃털 같은 그 손짓을 따라 거대한 마력이 노도처럼 몰려와 소녀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기벨린과 테오도르, 카인은 엘라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마력의 흐름에 놀라 눈을 치떴다.

마치 또 하나의 탑을 만난 것같이 밀려드는 마력의 흐름은, 고트로프에서 누구보다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아델에게서조차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본능에 취한 소녀가 저도 모르게 더 많은 마력을 끌어당기자 강력한 상승기류가 몰아치며 작은 몸이 휘청였다.


“안 되겠다. 잡아!”

카인이 소녀를 향해 얼른 몸을 내던질 때였다. 어느새 달려온 리오넬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상승기류에 휘말릴 뻔한 딸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안 돼, 엘라.”

리오넬은 모든 것을 부술 듯 거세게 불어닥치는 마력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 내며 자상하게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오넬, 엘라를 이리 줘.”

곁으로 달려온 아델이 남편에게서 딸을 받아 들어 조심스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이 저릿할 만큼 많은 양의 마력이 소녀의 몸속에 고여 있었다.


“엘라, 엄마가 왔으니 이제는 괜찮아. 엄마 말이 들리니? 자, 이렇게 하는 거야. 여기, 고인 물을 이쪽으로 내보낸다고 생각해 봐.”

“엄마…….”

내내 멍하게 풀려 있던 아이의 눈동자에 그제야 빛이 들어왔다. 정신을 차린 엘라가 눈을 치뜨며 소리쳤다.


“엄마! 오, 온몸으로 물이……!”

“응, 그래. 그게 무엇인지 엄마도 알아. 어서 내보내야 해.”

쏟아지는 거대한 재앙을 머리에 이고도 딸을 품에 안은 아델은 평온하기만 했다.


“엘라, 저기 머리 위에 있는 커다랗고 검은 것이 보이니? 저기를 향해서 네 안에 고여 몰아치는 물줄기를 내보내 보렴.”

뜬구름 잡는 소리 같지만, 엘라는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말을 이해했다.

어느샌가 가슴 속에 고여 온몸을 부술 듯 출렁이는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을 손끝으로 집중했다.

이렇게 모인 기운을 하늘을 향해 힘껏 밀어 올리자, 소녀의 손끝에서 가느다란 금빛 실타래가 만들어지며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던 검은 재앙이 움직임을 잠시 멈추었다.


“설마 지금 저걸 혼자서 멈추게 한 거야?”

테오도르가 멍하니 중얼거리며 엘라를 바라보았다.

탑은 한눈에 봐도 대형급이었다. 대항 본부의 뛰어난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야만 간신히 잡아 둘 수 있는 대형급 탑을, 오늘 처음으로 마력을 각성한 어린아이가 잠시나마 멈추게 하다니.


“누구 따님이신데, 당연한 거 아니야?”

기벨린의 뿌듯한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지는 사이, 안전지대로 돌아온 아델이 아이를 리오넬에게 안겨 주었다.


“엘라, 엄마가 어떻게 하는지 잘 봐 둬.”

그리고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탑을 확인한 뒤, 동료들과 차례로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오랜만에 한번 맞춰 볼까.”

그리운 그 말에, 기벨린과 테오도르, 카인이 말없이 웃으며 자연스레 각자의 증폭기를 꺼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묶어 올린 아델이 검은 칼을 꺼내 들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쏟아질 듯 다가오는 새카만 탑을 향해 힘차게 대지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기벨린, 테오도르, 잡아!”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운 재앙을 앞두고도 마치 반가운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벨린과 테오도르는 추억의 한 장면을 들춰보는 기분으로 아델의 명에 따라 마력을 방출했다.

마력을 처음 방출한 엘라의 그물이 성글고 끊어질 듯 가늘었다면, 두 사람의 그물은 훨씬 굵고 범위가 넓으며, 짜임새가 있었다.

뒤이어 한 마리의 흑표범처럼 유려하게 대지를 박찬 아델이 순식간에 하늘로 휘날려 올라가자 카인 역시 기류를 타고 올랐다.


“아…….”

엘라는 넋을 놓고 어머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리오넬은 자꾸만 들썩거리는 딸의 몸을 부드럽게 고쳐 안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단 네 사람뿐인데도 능숙하게 탑을 저지하는 모습에서, 그들이 과거 얼마나 많은 탑을 함께 부숴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탑을 붙잡아 두는 와중에도 테오도르와 기벨린은 밖으로 튕겨 나오는 아델과 카인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아델은 제 옆으로 내려온 카인을 일별하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마지막이겠는데?”

“아마도요.”

탑을 살피던 카인도 씩 웃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금안이 참으로 반가웠다.


“잘 잡아라, 기벨린, 테오도르! 마지막이다!!”

고개를 휙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검을 고쳐 쥔 뒤, 아델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치솟는 바람에 온몸을 맡기고 있는 힘껏 탑의 핵에 모든 것을 쏟아냈다.

갑작스럽게 휘날리던 눈발이 잦아들고, 검붉던 하늘 끝자락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하자 리오넬은 안고 있던 딸을 내려놓았다. 탑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사태가 진정되자 멀리서 태후와 루시오가 각각 알렉의 손을 꼭 잡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리오넬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자랑스레 속삭였다.


“잘 보렴. 어머니가 얼마나 멋있는지.”

리오넬의 곁에 다다른 루시오와 태후는 엘라의 반응이 마력 각성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완전히 부서져 하얗게 타오르는 탑 사이로 아델이 쏟아져 내렸다.


“어머니에게 달려가 볼까?”

리오넬이 아이들을 굽어보며 제안하자, 엘라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알렉도 그 뒤를 따르고, 리오넬도 아이들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허이고, 우리 황녀님 철드셨네. 위험한 취미생활을 그만두신 것 보니.”

기벨린의 중얼거림에 테오도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은 강림하듯 내려오는 아델의 표정에 깃든 충만한 행복을 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녀의 가족들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의 시간이 한 걸음 더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탑을 파괴하는 딸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된 태후가 복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루시오는 리오넬의 뒤를 따라 누이를 향해 달렸다.

이윽고 무사히 땅에 발을 디딘 아델이 아이들과 남편, 동생과 동료들을 가볍게 눈으로 훑으며 한쪽 손을 허리에 얹고 시원스레 웃어젖혔다.


“엄마!!!”

“아델!!!”

“누님!!!”

“황녀님!!!”

아델은 그녀를 부르며 달려오는 이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때아닌 탑으로 어두워졌던 하늘이 흩어지듯 완연히 열리며 새파란 창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무하게 화려했던 그녀의 삶에 어느새 충만하게 가득 찬 행복처럼.
 

-<황후 자리를 버리겠습니다>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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