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17화 그의 진심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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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그렇게 되자 파티장 중앙에 임시 대결 무대가 마련되었다.
파티장이 워낙 컸던 탓인지 사람들이 멀찍이 물러서서 둥글게 서자 순식간에 경기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쫘아악!
리리아는 굽이 높은 구두를 벗고 치렁치렁한 드레스의 칼로 그어 손으로 쫙 뜯어냈다.
그러자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며 뭇 남성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지만 그 불은 곧 옆에 있던 여성들에 의해 순식간에 진화 되었다.
리리아는 검을 뽑아들고 슬쩍 요한을 쳐다본 뒤에 다시 시선을 돌리며 인상을 굳혔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랐는데··· 당신은 소문 이상의 악마였군요. 이번 대결, 절대로 당신의 뜻대로는 안 될 겁니다!’
실력 차이는 확연하다. 아무리 어릴적부터 검을 수련해 왔다고는 하나 상대는 명문 검가로 유명한 라펠트 자작가의 후계자다.
그 실력 차이는 현재 두 사람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선수는 양보하지. 보아하니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마음껏 들어와 보라고.”
안드레오가 여유있게 웃으며 선수를 양보했고 리리아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하기에는 실력 차이가 너무나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팟!
그녀가 맨발로 바닥을 박차며 상대를 향해서 빠르게 접근했다.
챙챙챙!
곧이어 순식간에 오고가는 3연격. 빠른 검술의 연계에 안드레오도 제법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코르셋으로 조인 드레스를 입고도 이 정도 움직임이라니, 큰 소리 칠만하군.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뛰어난 검술이다.’
그 뒤로도 리리아는 때론 사납게, 때론 날카롭게 검을 휘두르며 안드레오를 압박했다.
그녀의 뛰어난 검술 실력에 지켜보고 있던 다른 관중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설마 리리아가 저 정도의 실력자일 줄은 생각치도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아.”
“그러게. 하필이면 안드레오라니······. 성격은 더러워도 실력 하나는 확실한 놈이잖아.”
“라펠트 가문에서 수련하는 또래 기사들 중에서도 적수가 없다던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야.”
필사적인 리리아의 모습과 달리 안드레오는 여유 그 자체였다.
리리아의 매서운 검술을 받아내는 모습도 마치 스승이 제자의 투정을 받아주는 것처럼 여유가 흘러 넘쳤다.
‘보아하니 실력은 이게 전부인 것 같고···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안드레오의 시선이 리리아의 화려한 드레스로 향했다.
이번 대결을 한 번에 끝낼 생각이 없었던 그는 그녀의 드레스를 조금씩 찢어내면서 그녀에게 수치심을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안드레오의 시선이 슬쩍 요한에게 향했다.
그의 의중을 읽은 것인지 요한도 음흉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뜻이 통했다고 생각한 안드레오도 마찬가지로 음흉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어디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
결심을 마친 안드레오의 검이 움직이려던 바로 그 순간.
찌릿!
‘큭······!’
순간, 검을 든 팔이 저릿하며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덕분에 드레스를 찢기는 커녕 잠깐의 경직 때문에 위험할 뻔 했던 안드레오가 식은땀을 흘렸다.
‘뭐, 뭐지, 방금 그건?!’
안드레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요한에게 검을 넘겨받을 때 느꼈던 그 저릿한 감각이 방금 전에도 팔을 마비 시켰기 때문이다.
‘착각이 아니었다고?!’
안드레오는 슬쩍 시선을 돌려 요한을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검을 건내주기 전에 무슨 짓을 한 건 아닌지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의 표정은 지루함, 짜증, 답답함으로 물들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끝내버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기야, 수작질을 부려도 저 계집에게 부렸겠지. 나한테 수작을 부려서 저 녀석이 얻는 이득이 없잖아. 그럼 뭐지? 대체 이 저릿거림은······. 혹시!’
안드레오는 눈을 부릅떴다.
‘고위 귀족들이 사용하는 검 중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검을 적에게 뺏겨 위협당하는 일이 없도록 장치를 해 놓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이 검이······.’
안드레오는 입술을 씹었다. 자식 바보라고 소문난 하이든 백작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검이라고는 만져본 적도 없을 저 망나니놈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겠지.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거절했어야··· 아니, 애초에 거절해도 그걸 가지고 생트집을 잡을 놈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시합을 중단하고 검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요한이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그런 장치는 없다고 주장해버리면 자신만 꼴이 우스워지기 때문이다.
요한의 분노를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하지만······.
‘젠장! 이런 빌어먹을!!’
공격을 방어하기만 할 때는 상관없는데 꼭 공세를 전환하거나 반격의 기회를 노리면 어김없이 저릿거리면서 몸이 마비가 되었다.
‘좋아, 할 수 있어!’
덕분에 리리아는 거침없이 공격에 집중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드레오의 움직임에 적응이 되자 그녀의 공세는 더욱 날카롭고 예리하게 다듬어졌다.
패배할 경우, 치욕을 당하기 전에 혀를 깨물고 자살까지 각오했던 그녀다. 죽음을 각오한 그녀의 검술이 결코 녹록할 리가 없었다.
‘이, 이 년이······!’
반대로 안드레오는 자주 마비를 당하자 이제는 전기가 통하지 않아도 몸이 굳고 느려져서 제대로 반응하기 어려워했다.
이를 악 물고 전기를 참아보려해도 허사였다.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전기 충격이 주는 마비를 절대로 거역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 안 돼!’
잠시 멈칫한 안드레오의 품속으로 단숨에 파고든 리리아의 검극이 안드레오의 목젖앞에 멈춰섰다.
“제가 이겼습니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리리아의 칼끝이 그녀의 눈매만큼이나 날카롭게 안드레오의 목젖을 겨누고 있었다.
챙그랑······.
“마, 말도 안 돼······.”
머리 위로 검을 들고 있던 안드레오는 힘이 풀려버린 것인지 그대로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진짜 안드레오가 진 거야?”
“보고도 몰라? 그렇게 기고만장해 하더니 꼴 좋다.”
“뭔가 움직임이 이상한 것 같기도 했는데··· 수비만 하던 것도 그렇고.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누구도 예상 못 했던 결과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난 요한이 성큼성큼 안드레오에게 걸어갔다.
안드레오는 악귀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요한을 다급하게 말렸다.
“자, 잠시만요! 요한 도련님. 방금 전 대결은 검에 문제가······!”
퍽!
안드레오가 변명하기도 전에 요한의 주먹이 그의 면상을 거침없이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쓰러진 안드레오를 잘근잘근 밟으면서 있는 힘껏 분노를 토해냈다.
“내가 네놈에게 내 검을 하사해 준 것이 잘못이라고? 아니면 아버지께서 문제가 있는 검을 내게 선물해 주셨다는거냐?! 어디서 빌어먹을 세 치를 놀려 백작가를 우롱하려느냐! 이 개같은 새끼가! 고작 저딴 계집애 하나를 쓰러트리지 못 해서 나를 욕보인 것도 모자라 백작가를 능멸하려들어? 그냥 죽어! 죽으라고, 이 쓰레기 새끼야!!”
“죄송합니다! 제, 제발 그만······. 커억!”
안드레오는 요한의 발에 무자비하게 밟혀 피를 토하면서도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 했다.
안드레오한테 힘이 없어서? 밟히는 이유가 정당해서? 성격이 온순해서?
당연히 셋 다 아니었다. 그 모든 부당함을 감수하고 피를 토하면서도 가만히 밟히고 있는 건 상대가 요한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밟혀 죽으면 죽는 건 자기 혼자였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욱하는 마음에 요한을 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주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웠다.
혹시라도 그러다 요한이 중태에 빠진다거나 목숨이 위험해진다면 그때는 가문 전체의 존망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귀족 자제들도, 안드레오 무리의 친구들도 쉽게 나서서 그를 도와주지 못 했다.
자칫 괜히 손을 빌려주었다가 지금 요한에게 찍히면 그야말로 성난 미친개에게 물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휙!
그런 상황에서 요한과 안드레오의 사이에 끼어들어 두 팔을 벌리고 굳은 표정으로 요한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리리아였다.
당연히 요한의 반응은 불쾌와 짜증 그 자체였다.
“뭐냐, 너는. 미쳤냐? 얼른 안 비켜?”
“비록 안드레오 경의 몸상태가 좋지 않아 운 좋게 제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저도, 안드레오 경도 최선을 다한 대결이었습니다. 이런 처사를 받을만큼 그는 잘못한 게 없었습니다.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요한 도련님.”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부탁하는 리리아의 모습에 요한의 숨이 거칠어졌다. 마치 통제할 길 없는 분노를 그녀에게 좁혀가는 것처럼.
하지만 속내는 전혀 달랐다.
‘미안하다. 이런 남자였어서. 가족들을 제외하고 날 똑바로 바라봐 준 유일한 사람이 너였는데. 그런 너에게 준 것이 상처뿐이라서 미안했다. 이번만큼은 나같은 못난 놈에게 얶매이지 않고 네 뜻대로 살아가길 바란다. 진심으로······.’
요한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일부러 리리아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같이 맞아 뒤지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그녀에게 손을 올려 붙이려던 순간.
짝! 쿵!
놀랍게도 따귀를 맞은 사람은 리리아가 아니라 요한이었다. 그리고 요한에게 따귀를 날린 사람은 다름아닌 그의 형, 하워드였다.
“도련님!”
볼썽사납게 주저앉은 요한이 한쪽 뺨을 감싸쥐며 죽일듯한 눈빛으로 형을 노려보았다. 요안나는 서둘러 달려와 그런 요한을 부축해주었다.
하워드는 그런 요한을 얼음장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명령했다.
“네 방으로 돌아가라. 가서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곰곰히 돌이켜보고 반성하거라. 요한.”
“왜 때려?! 난 잘못 한 거 없어! 나와 가문을 능멸한 건 이 쓰레기같은 년놈들이라고!”
“뭣들 하느냐! 어서 안드레오를 의무실로 옮기고 신관을 불러오라!”
그러나 항변하는 요한을 무시하고 쓰러진 안드레오에게 달려간 하워드는 병사들에게 소리쳐 안드레오를 옮겼다.
결국 경멸어린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조용히 파티장을 나선 요한은 리리아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리리아는 자신이 별장에서 감금당해 있는 동안 결정된 자신의 약혼녀였다.
가족을 가지면 좀 더 안정된 생활을 하지 않을까 싶은 백작가 어른들의 바람과, 백작가와 사돈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아반가르디 자작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성사된 약혼이었다.
물론 이전의 요한은 이번 파티가 있기 전까지 알지 못 했지만 리리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말 없이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요한을 보고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이 싫다고 해도 리리아나 요한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이미 양가에서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깰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일그러진 악연으로 시작한다면, 양가의 어른들도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이런다고 깨질 약혼일까 싶지만 노력은 해 봐야지.’
“도련님······.”
요안나가 아무 말 없이 걷고 있던 요한을 걱정하자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요한이 슬쩍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괜찮아. 미움받는 건 익숙하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저는 알아요! 도련님이 리리아 아가씨를 지키려고 일부러 악역을 자처했다는 걸! 어떻게 아가씨를 이기게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드레오 경에게 못된 짓을 하신 것도 일부러 그러신 거잖아요! 그분이 리리아 아가씨에게 품을 앙심을 도련님에게 돌리려고요! 저는 다 안다고요! 그러니까······.”
요한은 싱긋 웃으며 요안나의 머리를 말 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그녀가 너무 예쁘고 기특해 보여서.
***
다음날.
요한의 어머니, 아네트가 그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요한······.”
“뭐, 별장에 갇혀 지낸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뭘 새삼스레 안타깝다고 그래요.”
본래 3일동안 이어질 파티는 어제부로 막을 내렸다. 하이든과 하워드가 안드레오와 함께 라펠트 자작가를 찾아갔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당연히 요한이 한 일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정작 그 일 때문에 별장에 감금령을 전해 받았으니 당연히 짜증을 부릴 수밖에.
물론 별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요한은 당장이라도 기뻐서 춤 추고 싶은 걸 참느라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아네트는 그런 둘째 아들의 속내는 짐작도 하지 못 한 채 요한이 너무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겨졌다.
“조금은 네가 반성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이 어미가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반성은 그 자식이 해야죠. 가뜩이나 그 자식 때문에 형한테 맞은 것도 억울한데······.”
요한의 삐뚤어진 태도에 결국 아네트가 굳은 얼굴로 결심을 다졌다.
“그래, 아무래도 너를 고치려면 나 역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겠구나. 지금부터 별장의 모든 고용인을 해고하마. 물론 본가에서는 생활비나 그 어떤 지원도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어디 혼자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껴 보거라.”
‘어머니······.’
아네트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 할 것이다. 가족들 중, 그 고통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요한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