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첫 혈맹을 맺다
전날 밤의 아비규환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른 아침부터 전사들의 기합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지나가는 굼벵이도 너희보단 빠릿하겠다! 언제까지 잔치 기분으로 있을 생각이야, 어? 휘두르기 천 번 추가!”
“휘두르기 천 번 추가!”
그렇게 전사들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훈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 요한은 가루칸과 그의 제자들이 모인 가루칸의 움막에서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래, 벗의 말에 의하며 우리가 바깥 세상에 무관심한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더군.”
대족장 가루칸을 필두로 그의 제자들이자 열두 부족의 족장이라 할 수 있는 간부급 전사들이 웅성거렸다.
요한은 부족을 찾아온 이유가 자신들과 동맹을 맺기 위함이며 바깥에서는 전쟁의 불씨가 조금씩 타오르고 있다고 그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물론 사실과는 많이 다르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가루칸이 요한의 말에 힘을 실어 주자 족장들도 요한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요한은 가루칸의 뒤를 이어 그들에게 경고했다.
“생각보다 대륙의 평화가 길었다. 그 덕분에 각 나라의 무기창고는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훈련받은 병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터지길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지. 병사들에게는 전장이 곧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니까.”
“하지만 이곳은 구르칸 산맥이다! 아무리 훈련받은 인간들의 정예병이라 해도 수많은 몬스터들을 뚫고 들어와 우리를 공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제자 중 한 명이 요한의 의견에 반박하자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수천에서 수만 명의 병사들로 이곳을 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100만 명의 병사가 이곳으로 밀려든다면 버티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야.”
100만이라는 숫자에 제자들이 경악했다.
“100만의 병사라고? 그런 대군을 모을 수 있는 나라가 있단 말인가?”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 당장은 제국이라도 그만한 병력을 끌어 모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10년 후의 제국이라면 100만 병력을 끌어 모으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100만의 군세라면 장담하건데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이기고 지는 게 의미가 없을뿐더러, 녀석들은 황충처럼 이곳을 쓸고 지나가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밟아 죽이겠지. 그게 몬스터가 됐든, 오크가 됐든 간에.”
“어떡합니까, 대족장! 알파의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터전을 옮기는 게…….”
한 제자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자 곁에 있던 다혼이 분개하여 꾸짖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판티온! 구르칸의 전사들은 절대로 도망치지 않는다! 피하지 않는다! 설령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라 해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다! 이것이 오르크의 전사임을 망각한 거냐!”
“너야말로 전사의 본분을 망각한 거냐, 다혼! 우리 전사들의 임무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지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싸워서 이긴다 한들 지킬 백성들이 전멸한다면 그 승리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말이냐!”
다혼과 판티온은 서로를 노려보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도 그런 두 사람을 쉽게 말릴 수가 없었다.
자신들도 두 사람과 비슷한 생각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두 사람을 중재한 건 다름 아닌 가루칸이었다.
“그만! 벗의 앞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이더냐. 다혼도, 판티온의 생각도 모두 옳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벗의 지혜를 빌려 보자는 게 아니냐.”
그러자 다혼과 판티온을 비롯한 다른 열두 제자들의 시선이 모두 요한에게 향했다.
“크흠!”
요한은 이목이 집중되자 헛기침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 가루칸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전에 얘기를 하긴 했는데 전쟁이 터진다면 먼저 구르칸 오크족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뭐라고 생각하지?”
“다른 것도 많겠지만 가장 심각한 건 인구수겠지. 100만의 군세를 막을 전사도 부족할뿐더러, 전쟁이 오래 지속된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전멸할 거다.”
“인구수가 낮은 이유는? 내가 알고 있기로 구르칸 오크족의 평균적인 출산율은 오히려 인간들보다 몇 배는 높다고 알고 있는데.”
“우리가 스스로 인구수를 억제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이다. 내 선선대 대족장께서 이 규칙을 깨고 우리 구르칸 오크족의 부흥을 위해서 아이들을 크게 늘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아이들이 자라기 위해서는 더 넓은 터전과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해졌지.”
구르칸 오크족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터전을 늘려나가자 산맥의 몬스터들과 짐승들의 터전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당연히 개체수도 급감했을 것이다.
문제는 식량이 될 몬스터와 짐승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는데 정작 먹여야 할 입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그 탓에 산맥의 몬스터들과 짐승들은 멸종 직전까지 갔고 우리는 싸워 보지도 못 한 채 굶어 죽을 뻔했지. 선선대 대족장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인간의 왕국을 침공하여 식량을 빼앗았지. 비록 선선대 대족장과 전사들은 모두 죽었지만, 덕분에 먹을 입이 줄고, 우리고 다시 지금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억제하기 시작한 건가?”
“그렇다. 산맥과 공존하는 규칙을 저버리고 종족의 부흥이라는 욕심을 부린 참혹한 대가를 배운 것이다.”
요한은 가루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전사들을 보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아니! 종족의 번영을 바라는 마음에 죄는 없다. 단지 요령과 기술이 없었을 뿐. 가루칸, 혹시 오크족의 건축 기술이 어느 정도나 되지?”
요한의 질문에 가루칸은 치부가 될 수 있는 대답임에도 솔직하게 가감 없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형편없는 수준이다. 대부분의 오크들이 건축보다는 전투에 관심이 많은 데다 설령 전투 이외에 다른 기술은 천대나 무시를 받기 일쑤니까.”
“그럼 다가구 주택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군.”
“다가구 주택? 그게 뭐지?”
요한은 알기 쉽게 그림을 그려 주었다.
자신도 전문 건축가가 아니라 자세한 도면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외형만으로도 오크들에게 충격을 주기는 충분했다.
“이런 형태의 가옥인데 인간들의 도시에서는 일반적인 거주 형태야. 최근에는 시골에도 이런 다가구 주택을 선호하는 추세고. 같은 공간이라도 넓이뿐만 아니라 높이도 사용하기 때문에 좁은 면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지.”
“정말로 이런 게 가능하다고?”
“세상에…….”
오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반적인 오크들도 그러했지만 구르칸 오크족은 더 더욱 외부와의 단절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인간들의 왕국을 침공했던 선선대가 새로운 집을 만들겠다고 몇 번이나 도전하는 걸 봤던 게 생각이 난다. 생각해 보니 이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던 것 같군.”
“눈으로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건축물이 아닐 텐데…….”
“네 말이 맞다. 시험 삼아 만들었던 2층 집이 폭삭 무너지고 거기에 자던 동족들이 무너지는 집에 깔려 떼죽음을 당한 뒤에야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었지.”
가루칸의 증언에 전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다가 깔려 죽는다고?”
“그럼 엄청 위험한 거 아니야?”
그러자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눈으로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건축물이 아니라고. 전문가가 제대로 만들면 상당히 튼튼한 건축물이니까 안심해. 그리고 도시에서는 벌써 4층짜리 건물까지 지어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만큼 위험한 건물이라면 아무도 안 살지 않겠어?”
“4, 4층? 이런 건물을 4층까지 쌓는단 말이야?”
“그래. 한 층을 한 가구씩 사용한다 치면 한 가구가 살 수 있는 땅으로 총 네 가구가 살 수 있다는 거지. 그렇게 되면 너희 동족들의 숫자도 지금보다 훨씬 늘릴 수 있어. 기술만 더 발전하면 4층 이상 쌓을 수도 있을 거고.”
“하지만 주거지가 해결됐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동족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결국 식량이 부족해지게 될 테니까.”
가루칸의 의견에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고 온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여기가 구르칸 산맥이야. 여기는 현재 내가 다스리는 도모스 자작령이고, 그리고 이 사이에 있는 이 땅.”
요한은 구르칸 산맥과 도모스 자작령 사이에 버려진 황무지를 짚었다.
“이 땅이 너희의 식량 창고가 될 거야.”
“여기서 뭘 하라는 거지?”
“옥수수 농사.”
옥수수는 비교적 척박한 땅에서도 손쉬운 재배가 가능하다.
오크들을 상대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농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전사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우리는 전사들이다. 그런데 검을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라는 말인가?”
그러자 요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왜 검을 포기해? 둘 다 하면 되지. 설마 구르칸의 전사들은 그 정도 근성도 없는 놈들이었나?”
“크흠!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요한이 이죽이자 전사들은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피하거나 딴청을 부렸다.
그 모습에 가루칸이 큰 웃음을 터트리며 요한의 의견에 수긍했다.
“푸하하하! 그렇게 말 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군. 확실히, 동족들이 굶어 죽는 꼴을 보는 것보다야 수련하면서 농사를 짓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긴 하겠지. 게다가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동원하면 전혀 하지 못할 일도 아닐 거고. 하지만 알파. 우리의 주식은 곡식이 아니라 고기다.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뜻이지.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있나?”
“옥수수는 너희 먹으라고 심는 게 아니야. 너희가 먹을 가축에게 먹이려고 키우는 거지.”
“가축을 키우란 말인가? 우리가? 하지만 그건…….”
“알아. 경험과 기술이 없으면 가축을 키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니까 그것도 내가 도와줄게. 건축 기술과 농사, 축산업에 대한 기술은 전부 내가 제공해 줄 거야.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건 어디까지나 향후에 대한 대비책이고 지금 당장 돈이 될 만한 사업은 따로 있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건가? 하여간…….”
그러면서도 가루칸은 눈을 빛내며 요한의 얘기에 경청했다.
그러자 요한은 교역로 건설에 관한 사업 건을 꺼내 들었다.
“도로 정비와 운송은 모두 우리가 맡는다. 대신 구르칸의 전사들은 암중에서 몬스터들을 경계해 줘. 몬스터들도 너희가 있으면 쉽게 접근하지 못할 테니까. 사업 수익은 5 : 5로 나눌 생각이야. 너희는 직접 움직이기 힘들 테니까 나한테 주문하면 식량이 됐든 무구가 됐든 필요한 걸 준비해 줄게. 지금으로 봐서는 무구보다 식량이 더 간절해 보이지만.”
“그렇게 자신하는 걸 보니 수익이 꽤 대단한 모양이군.”
“물론이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적어도 굶어 죽는 동족은 이제 없을 거야. 장담하지.”
요한의 대답에 가루칸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다. 이렇게까지 맹우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데 무시할 수는 없지. 우리는 우리의 피로서 반드시 네 호의에 대해 보답하도록 하마.”
가루칸은 준비된 두 개의 술잔에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피를 따랐고…….
“나도 용맹한 오르크의 전사들과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도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두 개의 술잔에 피를 따랐다.
“지혜롭고 강인한 우리의 벗에게 오르크의 가호를!”
“용맹하고 호쾌한 나의 벗들에게 오르크의 영광을!”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서로의 피가 섞인 술잔을 들어 망설임 없이 잔을 기울였다.
앞으로 대륙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엎을 두 사람이 강철보다 단단하고 피보다 진한 우정을 그 영혼에 각인하는 순간이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