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24화 (24/150)

24. 무거운 마음

그날 밤, 요한은 도모스 자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나 왔다. 어휴, 피곤하다…….”

“오셨습니까!”

창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온 요한이 널찍한 소파 위에 다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그때까지 집중해서 집무를 보고 있던 겔러핀은 요한이 찾아오자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일은 어떻게…… 잘 풀리신 겁니까?”

“어떻게 됐을 거 같냐?”

능청스럽게 되묻는 요한의 모습을 보고 겔러핀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 같군요.”

“알면 됐다. 그나저나 준비는?”

“누가 당부한 일인데 소홀했으려고요. 이미 장인들까지 전부 섭외해 두었습니다. 말씀 하시면 내일 당장이라도 공사 가능하고요.”

“잘됐네. 진행시켜.”

요한의 명령이 떨어지자 겔러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공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새로운 교역로를 개시할 상단 말이지?”

“역시 알고 계셨군요.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안전하다고 떠들어 대 봤자 실제로 이용하는 상단이 나와 증언을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구르칸 산맥 교역로를 이용하지 않을 겁니다.”

요한도 사실 그게 이번 교역로 건설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거라 생각했다.

‘이미 대다수의 대형 상단들은 돈이 좀 들더라도 자신들만의 안전한 교역로를 이미 확보해 둔 상태라서 모험은 하지 않을 거야. 소형 상단들도 상행 한 번에 명줄이 걸린 놈들은 쉽게 도박을 시도해 보지 않겠지. 유명세가 없으니 소문의 위력도 그리 크지 않을 거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요한도 많은 생각을 해 봤지만 답은 하나였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어. 소형 상단이나 상인들을 대거 불러 모아서 피해 보상도 걸고 영지병력으로 무료 호송을 해 주는 수밖에. 질보다 양으로 밀어붙여서 소문을 퍼트리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새 고객님들도 늘어나겠지. 안전만 보장되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교역로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건 어떻습니까, 알파 경.”

그러면서 겔러핀은 자신이 조사한 어느 상단에 대한 자료를 요한에게 넘겨주었다. 자료를 확인하던 요한의 안색이 점점 굳어갔다.

“이건…….”

“현재 급부상하고 있는 신흥 상단 중에 독자적인 교역로를 아직 구축하지 못한 상단이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남작으로 봉작받은 덕분에 귀족들이나 상단에서도 꽤나 주목을 받고 있고요. 현 가주가 실력 하나로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만큼 담력과 배짱도 두둑한 인물이라고 하니 한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만…….”

“그, 그렇네…….”

“왜 그러습니까? 어디 꺼림칙한 부분이라도…….”

“아냐, 좋은 의견이야. 잘했어.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이런 것까지 조사하고.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네.”

“감사합니다!”

요한에게 칭찬받은 게 순수하게 기뻤는지 겔러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물론 요한의 표정은 반대로 똥 씹은 사람처럼 굳어들었지만…….

‘거의 다 완벽하긴 완벽하네. 상대가 아반가르디 남작가라는 것만 빼면…….’

끊어 버린 줄 알았던 인연의 고리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

“아가씨, 교양 수업 선생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아가씨!”

리리아의 전담 시녀는 아무리 노크해도 돌아오지 않는 인기척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문을 열었다.

‘설마……!’

“아가씨, 실례할게요!”

벌컥!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주인이 없으면 이게 귀족 아가씨의 방인지, 기사의 방인지 구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리리아의 방 안은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펄럭 펄럭…….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또…….”

“하아…….”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을 배경으로 시녀는 교사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고 교사는 나직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 모두 이런 상황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한편, 시녀와 교사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리리아는 현재…….

“타압!”

“아가씨, 어깨에 힘을 빼십쇼! 몸이 너무 굳었습니다. 위력을 중시하다 보면 가장 중요한 흐름을 잃게 됩니다. 항상 집중하세요.”

리리아를 가르치는 기사, 클레번은 자신의 지적을 실시간으로 수정하며 깔끔한 연계를 보여 주는 리리아의 모습에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그만큼 안타까움도 컸다.

‘재능도 있고, 본인의 의지도 강해. 그래서 더 안타깝단 말이야. 리리아 아가씨께서 사내아이로 태어나셨다면 크게 쓰임받으실 수 있었을 텐데…….’

보수적인 벨로반 왕국에서 여성이 기사가 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에 한없이 가깝게 힘든 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하고 잠시만 휴식을 취하죠.”

“하아, 하아, 왜? 난 좀 더 할 수 있는데……?”

“쉬는 것도 훈련입니다. 오버 페이스는 되레 몸을 망칠 뿐이라는 걸 벌써 잊으셨습니까?”

촤악!

클레번의 훈계에 리리아는 수통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남은 물을 머리 위에 부었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물과 땀이 섞여 내리는 리리아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굉장히 지쳐 보였다.

“제가 알고 있기로 오늘 이 시간에는 교양 수업이 잡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맞아. 그런데 그걸 클레번이 왜 신경 써?”

“하아……. 아가씨만 혼나신다면 모를까, 저까지 마담께 불려가 꾸중을 듣지 않습니까. 이러다 해고라도 당하면 아가씨께서 책임지실 겁니까?”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기사와 주군의 딸이 보여 주기에는 너무 가식 없는 태도였지만 두 사람 모두 이런 대화와 관계에 상당히 익숙해 보였다.

“괜찮아. 그때는 내가 고용할 테니까.”

“이래 봬도 저는 꽤 비싼 몸입니다만?”

“지인 할인 해 줘. 한 90% 정도.”

“차라리 무료 봉사를 하라고 하십쇼.”

“진짜 해 줄 거야?”

“제가 미쳤습니까? 안 그래도 오라는 데가 널리고 널렸구먼.”

클레번의 대답에 리리아는 피식 웃으며 검을 쥐고 일어섰다.

아직 휴식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훈련을 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모습에 클레번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그녀를 말렸다.

“좀 더 쉬십시오. 그러다 몸 버립니다.”

“괜찮아. 충분히 쉬었어.”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건 호위 기사로서의 당부가 아니라 검술 스승으로서의 명령입니다. 앞으로 10분은 더 쉴 겁니다. 만약 어기시면 제 수업은 영원히 이걸로 끝입니다.”

“칫! 하여간 잔소리는. 진짜 괜찮다니까…….”

“하아…….”

그렇게 툴툴거리며 리리아가 자리에 앉자 클레번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가씨, 도대체 뭐가 그렇게 조급한 겁니까? 요즘 아가씨를 보면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 같습니다. 예전부터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 도가 지나친 것 같다고나 할까요?”

“내가? 무슨 말이야.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

“혹시 크림포드 백작가 클랜 파티에서 있었던 일 때문입니까?”

아닌 척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려던 리리아는 클레번이 클랜 파티를 언급하자 표정이 바뀌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여간 아가씨는 확실히 상인의 딸이지만 상인의 재목은 아니야. 정곡을 찔렸다고 저렇게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면…….’

“하아……. 아가씨,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상대는 라펠트 가문의 후계자였습니다. 저조차 전력으로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대라고요.”

“알아. 내 또래 중에서 내가 제일 강하다고 자만하는 것도 아니고, 안드레오에게 패배한 게 분하지만 인정 못 할 일도 아니야. 그리고 반드시 녀석보다 강해져서 그때는 내 손으로 녀석을 꺾을 거야. 반드시!”

이건 평소 클레번이 알고 있는 리리아의 모습이었다.

당당하지만 자만하지 않고, 언제나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말괄량이 아가씨.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심통이 나 있는 거지? 안드레오도 아니라면……. 설마!’

“설마 요한 도련님 때문에 그러십니까?”

리리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클레번은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저도 아가씨께서 요한 도련님을 원망하는 마음이야 백번 이해합니다. 저 역시 그 자리에 있었고, 도련님의 그 말도 안 되는 횡포도 두 눈으로 지켜봤으니까요. 마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저는 수백 번도 더 그 자식의 목을 떨어트렸을 겁니다.”

클레번은 무거운 눈빛으로 리리아를 보며 타일렀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잖아요. 만약 거기서 아가씨가 도련님께 손을 댔다면…… 아반가르디 남작가는 그날로 끝장났을 겁니다. 그걸 모를 분도 아니시면서 왜 그걸 마음에 담아 두십니까…….”

“클레번이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아?”

“네? 뭐가요?”

“요한 도련님이 아무 생각 없이 나와 안드레오에게 횡포를 부린 것 같냐고.”

클레번은 이해할 수 없는 리리아의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대답했다.

“같은 게 아니라 횡포 맞죠. 저뿐만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봤을 걸요? 아닙니까?”

“과정만 보면 그렇지.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고. 하지만 돌아와서 그날 일을 곱씹어 보면 곱씹어 볼수록 뭔가 이상하고 찝찝하단 말이야.”

“뭐가요? 저는 이해가 잘…….”

클레번이 고개를 갸웃하자 리리아는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과정을 빼 놓고 원인과 결과만 놓고 보자고. 먼저 그 대결의 원인은 나와 안드레오였어. 안드레오가 추태를 부리긴 했지만 내가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지. 하지만 내 지랄맞은 자존심 때문에 결국 안드레오를 자극해 버렸고 그렇게 대결이 벌어졌어. 여기에 도련님의 잘못이 있어?”

“없죠. 거기까지는.”

“그러면 이제 결과만 놓고 보자고. 그 대결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지?”

“그야…… 안드레오 님 아닐까요? 요한 도련님께 밟히고 완전 엉망이 되셨잖아요.”

클레번의 대답에 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하이든 백작님과 하워드 소백작께서 라펠트 가문을 직접 찾아가 머리 숙여 사과하셨어. 덕분에 라펠트 자작가의 위상은 이전보다 더욱 높아졌고 안드레오의 입지는 탄탄해졌지. 녀석의 잘못이 묻혀 버린 건 덤이고. 그런데 안드레오가 최대 피해자라고?”

“아니면 아가씨 본인요?”

리리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나도 아니야. 오히려 그 대결 덕분에 운이 좋다고는 해도 라펠트 자작가의 후계자를 쓰러트렸다는 명성을 얻었으니까. 게다가 내 명예와 자존심도 지킬 수 있었고, 피해자라고 하기엔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은걸.”

“그럼 대체 누가 가장 큰 피해자라는 건지…….”

“있잖아. 그 소동을 일으킨 탓에 가문에서 쫓겨나 다시 별장에 감금된 사람. 심지어 나에게 향하는 게 당연한 안드레오와 라펠트 자작가의 원망까지 모두 가져가 버린 사람 말이야.”

리리아의 대답에 클레번은 두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요한 도련님요? 에이, 그건 비약이죠. 요한 도련님이야 자기 욕망을 채우려다 벌 받았을 뿐인데 그게 어떻게 아가씨나 안드레오를 위한 일입니까?”

“의도야 어땠는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요한 도련님에게 빚을 진 건 사실이야. 게다가 그 일로 아버지도 도련님과의 약혼을 재검토 해 보겠다고 말씀하셨고.”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자신의 딸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모욕주고 핍박하려 했단 사내가 요한이다.

그런 남자와 자신의 딸을 강제로 혼인시킨다면 아버지로서의 자질을 떠나 귀족계에서도 명성에 흠집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답답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려면 도련님에게 빚을 갚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당최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가씨…… 하여간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계속 신경 쓰실 테니까 이거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아가씨가 조바심 내지 않고, 꾸준히 지금처럼 최선을 다하신다면 반드시 그 기회는 어떤 형태로든 올 겁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러다 아가씨가 먼저 지치십니다.”

“그렇겠지? 자, 그럼 휴식 시간 끝! 다시 간다!”

“자, 잠깐만요! 아직 제가 준비가…… 으악!”

그렇게 리리아는 잡념을 털어 내려는 듯, 평소보다 훨씬 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지금 자신의 집으로 누가 찾아오고 있는지는 꿈에도 알지 못한 채…….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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