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25화 (25/150)

25. 상인에게 가장 가치 있는 상품

“가주님! 히로벤칼 자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예상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하셨구나. 알겠다. 금방 나가마.”

총관의 보고에 자신의 집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던 아반가르디 남작가의 가주, 예가르 아반가르디는 서둘러 외투를 걸친 후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한 뒤 저택 로비로 향했다.

로비에는 먼저 준비를 마친 그의 가족과 시종들이 도모스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예가르가 일행의 선두에 서서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체크하자 총관이 크게 외치며 저택 문을 열었다.

“히로벤칼 자작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이 열리자 예가르의 긴장감도 더해졌다.

도모스는 크림포드 백작가의 주요 클랜 가문이자 백작가의 곡창지대 중 한 곳을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귀족이기도 했으니까.

‘처음 도모스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는 꽤나 당황스러웠지. 하지만 이건 기회다! 리리아의 혼사가 반쯤 물 건너 간 이상, 도모스와 거래를 터서 어떻게든 자작령의 식량 유통권을 우리가 따내야 해.’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중앙에는 예가르도 낯익은 도모스의 모습이 보였고 다른 둘은 생소했는데 한 명은 착용하고 있는 장비를 봐선 호위 기사 같았고 다른 한 명은…….

‘가면? 얼굴에 흉터라도 있는 건가? 기사의 예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선 평범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모스 경, 저희 저택을 찾아주신 경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예가르는 갈색 곱슬머리의 가면을 쓴 사내에 대한 관심을 순식간에 끊어 버리고 예법에 맞춰 도모스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가족들과 시종들 역시 마찬가지로 도모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극진한 귀빈 대우였다.

이러한 모습에 도모스도 우쭐했다.

“과연! 상인 가문으로 몰락하기 전에는 다른 왕국의 귀족 가문이었다더니 가족들도 시종들도 예법이 제법 자연스럽구려. 저택도 우리 저택만큼은 아니지만 이리 화려하고 웅장하니 이곳의 영주 말투스 자작의 속이 제법 타겠구먼. 크하하하하!”

남의 아픈 치부를 들쑤시며 자신을 추켜세우는 도모스의 화법에도 예가르는 사람 좋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하하하! 초라한 저희 저택을 이리도 후하게 봐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행의 여독을 푸시는 동안 저녁 만찬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총관, 도모스 경을 특급 귀빈실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각하, 이쪽입니다.”

도모스의 짐을 챙겨 시종들이 귀빈실로 향하자 의기양양하게 발걸음을 옮기려던 도모스의 발을 멈추게 만든 목소리가 있었다.

“자작님, 긴 여행의 여독을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작님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목소리가 특이하군.’

마치 인간이 아닌 듯, 전혀 들어 본 적도 없는 특이한 목소리가 가면의 사내에게서 흘러나오자 예가르를 비롯한 남작가의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정말로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그, 그렇지? 크흠!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군. 고맙네, 알파 경.”

도모스가 고양이 앞에 쥐처럼 쩔쩔매며 어려워하는 사람들 중, 알파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요한뿐이었다.

물론 예가르가 이 사실을 알 턱이 없었지만.

‘알파 경? 도모스의 주변에 저런 사람이 있었던가?’

예가르는 상인 가문인 만큼 정보도 어느 정도 취급하고 있었다.

특히 백작가의 주요 인물들에 관해서는 빈틈없이 체크한다 생각했었는데 도모스의 주변에 저런 인물이 있었다는 건 오늘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것도 도모스가 어려워하는 걸 보면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건데…….’

“아반가르디 남작.”

“말씀하십시오, 도모스 경.”

“이 친구는 알파 경이라고 하네. 사업가이자 내 동업자이기도 하지. 이 친구와 함께 온 것은 이번 사업에 내 대리인으로 이 친구를 임명했기 때문이니 이 친구의 결정이 곧 나의 결정이라 생각하고 일 보시게나.”

“그러겠습니다.”

“가자.”

말을 마친 도모스는 호위를 맡은 헨더슨과 함께 귀빈실로 향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귀빈실로 향하는 도모스를 보면서 예가르는 요한을 보는 시선을 달리했다.

‘도모스는 깐깐하고 의심이 많은 자다. 그런 자작이 자신의 전권을 일임할 정도라면 상당한 신뢰는 받는 모양이야.’

귀족들은 보통 행정 담당자에게 일을 맡겨도 최종 결정권은 반드시 자기가 갖는다.

지금처럼 최종 결정권도 일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예가르는 요한이 먼저 다가오자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네. 아반가르디 상단의 책임자이자 아반가르디 가문을 이끌고 있는 예가르 아반가르디 남작이라 하네.”

“알파입니다. 가면과 목소리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릴 적 입은 화상 때문에 남들에게 드러낼 만한 몰골이 아닌지라…….”

목소리만 들어도 그 상처가 얼마나 심각할지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예가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신경 쓰지 않네. 내가 신경 쓰는 건 히로벤칼 자작 측에서 어떤 협상을 준비했는지 그 내용이 궁금할 뿐이야. 따라오게. 내 방에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그렇게 예가르와 요한은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리고 리리아, 너도 따라 들어오거라.”

“예? 저, 저도요?”

“요한 도련님과의 약혼이 사실상 파기된 상황이니 만약을 대비해서 너도 공부를 해 둬야 하지 않겠느냐? 이 아비가 마련할 선 자리에 순순히 응할 생각이 있다면 상관없다만…….”

“갈게요! 가면 되잖아요, 가면!”

그렇게 리리아도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

‘그래도 크게 걱정은 없어 보이네. 몸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고.’

요한은 가면 속의 눈동자로 예가르의 곁에 앉아 있는 리리아를 슬쩍 일별한 후, 서류 뭉치를 꺼내 예가르에게 넘겨주었다.

“우리 히로벤칼 자작령에서 준비하고 있는 사업입니다.”

‘사업?’

예가르가 알기로 히로벤칼 자작령은 기름진 곡창지대라는 것 빼고는 전혀 메리트가 없는 땅이었다.

물론 곡창지대라는 것만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걸 제외하면 교통도 엉망이고, 특산물도 없고, 관광지로서의 매력도 없었다.

하나 그런 의심도 잠시…….

서류를 넘겨보던 예가르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들다가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요한은 사실이란 단어를 힘주어 강조했다.

그러자 예가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

리리아는 당황스러웠다.

아버지가 사업을 논하는 자리에서 지금처럼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 그녀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예가르는 말 대신 서류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확인하던 리리아의 표정도 아버지와 비슷하게 변해갔다.

“마, 말도 안 돼! 구르칸 산맥을 통과하는 교역로를 건설할 예정이라고?”

서류에는 구르칸 산맥을 관통하는 최단거리 루트와 건설 계획, 구르칸 오크족과의 협약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보다 구르칸 오크족과의 협약서가 진짜라면 정말 놀랄 만한 일이군. 설마 구르칸 산맥으로 직접 오크족을 찾아간 건가?”

“그쪽에서 찾아올 생각이 없으니 필요한 쪽에서 찾아갈 수밖에요.”

“누가 그 위험한 곳을…….”

“제가 직접 갔습니다.”

“자네가?”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조사해 보면 금방 드러날 텐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강한 임팩트를 심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가라 들었네만 보기보다 능력이 출중한 친구로군. 구로칸 산맥을 혼자 찾아가는 건 목숨이 백 개는 있어도 모자랄 일일 텐데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현재 아반가르디 남작가가 임시로 이용하고 있는 교역로는 이곳을 출발하여 구르칸 산맥을 멀찍이 돌아 열두 개의 도시, 두 개의 왕국을 거쳐 이테란까지 간다고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이테란까지는 그 거리만 대략 4,000km에 달하죠. 상행의 규모를 생각하면 소요 시간만 편도로 반년이 넘게 걸리고요. 하지만 구르칸 산맥을 직통으로 넘게 되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요한은 테이블에 지도를 펼쳐 히로벤칼 자작령과 구르칸 산맥의 교역로, 마지막으로 이테란까지 이어지는 길을 표시했다.

“구르칸 오크족의 도움을 받아 만든 교역로입니다. 대량의 물자를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경사가 완만하고, 폭이 넓은 지역만 골라 가기 때문에 산맥을 조금 돌고 돌아 가게 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의 교역로보다는 거리를 약 1/3까지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지도를 바라보는 예가르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졌다.

상단에게 교역로가 짧아진다는 건 단순히 거리가 줄어들어 빨리 도착한다는 간단한 이점 같은 게 아니었다.

“상업계의 트랜드는 시간 싸움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준비해도 트랜드가 지나 버리면 그 상품은 절반의 가치도 가지지 못한 다고 하죠. 안전을 검증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큰 리스크가 아닐까요? 편도에만 반년, 왕복에 1년이라는 시간은 예가르 경께도 분명 큰 부담이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요한이 넌지시 찔러보자 예가르는 의외로 시원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하하하! 맞는 말일세. 자네의 말대로 우리 같은 상인들은 유행에 매우 민감하지.”

그러면서 예가르는 눈앞에 있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가령 이 상품이 지금 이테란에서 지금 유행하는 상품이라 치자. 그런데 이게 반년 뒤에도 이테란에서 유행하고 있을까? 만약 유행이 지나 버렸다면 그렇게 되면 우린 유행에 뒤쳐진 재고들을 본 가격의 1/10도 안 되는 처분할 수밖에 없다네. 결국 그 고생을 하고도 적자를 보게 되는 거지.”

유행을 타지 않고 일정 가격이 유지되는 상품들은 모두 고위 귀족 가문의 상단에서 독점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예가르는 지금까지 유행의 흐름을 읽어 상품들을 준비하고 교역해 왔다.

맞아 떨어질 때는 큰 이문이 남지만 흐름을 잘못 읽어서 가문이 휘청일 정도의 경제적 타격을 입은 적도 꽤나 많았다.

그래서 도모스의 곡창지대를 그토록 원했던 것이다.

식량은 유행을 타지 않는 품목 가운데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교역로가 짧아지면 그만큼 유행에 더 빠르고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지. 아주 매력적인 제안일세. 문제는…….”

“요금 말씀이시군요.”

“잘 아는군.”

‘사실상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요한은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던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계약서를 확인한 예가르는 눈매를 좁히며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이 친구, 이거 농담도 본인 능력만큼이나 화끈하군. 이건 어림잡아도 현재 이용하는 교역로의 두 배 가격이 아닌가? 이래서는 상행을 성공하더라도 이문을 남기지 못하네. 못 본 것으로 하지. 아직 검증도 되지 않은 위험한 교역로에 이만한 돈을 지불할 수는 없네.”

예가르의 단호한 거절에 요한은 가면 속에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상인의 가장 큰 상품은 시간과 신용이죠. 제가 파는 것은 그 두 가지 전부입니다. 오히려 제가 파는 상품에 비하면 이것도 꽤나 저렴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시간은 그렇다 치고 신용을 판다는 건 무슨 뜻이지?”

“구르칸 산맥 교역로를 이용하던 도중, 몬스터나 산적, 그밖에 자연재해를 제외한 인위적인 재해로 상단이 피해를 입을 시 상단이 준비한 물품 대금의 열 배를 지급한다. 이 정도 신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한은 준비해 두었던 두 번째 계약서를 내밀었다.

두 번째 계약서에 그가 말한 조항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자신감이 과하군. 그러다 진짜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우리 상단도 규모가 그렇게 작진 않네. 특히 이테란으로 운반하는 상품들의 대금 열 배라면 도모스 경께도 큰 부담이 될 텐데?”

“저도 자작님도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만한 각오도 없었다면 아반가르디 남작님을 찾아와 이렇게 상단의 운명을 맡겨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도모스가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놀라 까무러칠 만한 발언을 서슴없이 꺼내 드는 요한이었다.

‘과연 도모스가 이자에게 전권을 위임할 만한 이유가 있군, 상인으로서의 스킬은 아직 미숙한 점이 많지만 타고난 배짱과 사람에게 신뢰를 심어 주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어. 그건 배워서 익힐 수 있는 자질이 아니지. 상인이라기보다는 제왕의 자질에 더 가깝다.’

사람을 설득할 때는 논리보다 믿음이 더 중요한 때가 있다.

그리고 믿음은 그 사람의 확신과 자신감에서 나온다.

마치 사이비교주가 자신을 정말 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행동하면 그게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서서히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요한이 사이비 교주라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는 능력만큼은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고 예가르는 생각했다.

“자네와 도모스 경의 각오는 잘 알겠네. 하지만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상단 행수들의 의견도 무엇보다 중요하지. 그리고 여러모로 확인하고 조사할 것도 있고. 그러니 사흘만 시간을 주게. 사흘 후에는 꼭 답을 하도록 하겠네. 기다려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예가르 경.”

“그래, 자네도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푹 쉬게. 저녁 만찬이 준비되는 대로 부를 테니. 장담하건대 우리 셰프들이 준비한 요리는 자작령으로 돌아가서도 한동안 생각날 걸세. 하하하!”

“그것 참,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요한은 예가르와 가벼운 악수를 나눈 뒤,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리리아를 일별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