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꿩 대신 꿩
“가주님. 저기…….”
“그래, 나도 보고 있네.”
예가르는 스테이지에서 알파와 함께 춤을 추는 자신의 딸을 보고 놀라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군.”
“그렇게 신기한가? 보아하니 자네 딸도 사교계에서 깨나 주목받을 만한 인재인 것 같은데.”
도모스가 딸의 미모를 칭찬하자 예가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저도 걱정을 덜었겠습니다만…… 저 아이는 꽃보다 검을 더 좋아하고 파티장보다 훈련장을 더 자주 가는 녀석이라 말이죠. 생전 단 한 번도 남자가 춤을 신청하면 받아준 적이 없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가 먼저 신청할 거라고는…….”
“듣고 보니 그렇군. 심지어 상대가 저 빌어먹을…….”
“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알파 경은 목소리도 특이하고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는 일도 없는데 뭘 보고 자네 딸이 호감을 느낀 건지 조금 신기해서 말이야.”
도모스의 말에 예가르는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며 대꾸했다.
“도모스 경은 그런 적 없습니까?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 불쑥 찾아오는 감정 말입니다. 리리아도 분명 우리가 모르는 알파 경의 어떤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거겠죠. 하여간 누가 내 딸 아니랄까 봐…….”
아버지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한편, 딸은 현재 속으로 진땀을 흘리며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난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사교 수업 제대로 받을 걸……!’
리리아에게 검술 스텝을 밟으라면 그녀는 하루 종일도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춤 스텝을 밟으라면 그녀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릴 때는 평민이었던 터라 배울 필요가 없었고 귀족이 되어 사교계에 입성하고 나서도 딱히 파티나 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검과 훈련, 그리고 장래에 왕국 최강의 기사가 되는 것뿐.
그녀의 머릿속에 전에 들었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제대로 배우라는 소리 안 할 테니까 제발 기본이라도 배워 둬. 너 그러다 진짜 후회한다?]
[걱정 마셔. 죽었다 깨어나도 그딴 걸로 후회 안 할 테니까.]
‘엄마 미안. 엄마 말이 맞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기본이라도 배워 둘 걸…….’
의식할수록 꼬이는 스텝에, 혹시라도 요한의 발을 밟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식은땀이 흘렸다.
어느새 음악은 귀에 들리지도 않고, 화려한 조명도, 눈앞의 요한도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그때였다.
요한이 귓속말로 작게 속삭인 것은.
“제 발등 위에 살짝 발을 올려 주시겠습니까?”
“네? 그, 그치만…….”
“괜찮습니다. 잠시만 저에게 아가씨를 빌려 주세요. 그럼 제가 아가씨를 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리죠.”
‘아이 씨……! 이젠 나도 몰라!’
리리아는 할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요한의 발등 위에 살짝 자신의 구두를 올렸다.
요한은 그녀의 한쪽 팔을 자신의 목에 살짝 두르고 남은 팔을 다정하게 감싸 쥐어 옆으로 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 보자.’
요한이 마음먹고 춤을 추기 시작하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어머, 세상에……. 브라보!”
“저렇게 엘레강스하고 뷰티풀한 댄스는 내 평생 처음이야!”
“도대체 저런 춤은 어디서 배운 걸까?”
요한이 춤을 추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스텝이 따라오자 뻣뻣하던 목각 인형은 어디 가고 사교계에서도 보기 드문 프로 댄서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내가 어떻게 이런 춤을……!’
그저 힘을 빼고 요한에게 몸을 맡겼을 뿐인데 두 사람은 스텝에 따라 우아한 백조의 몸짓이 되기도 하고, 흩날리는 꽃잎이 되기도 하며 무대를 장악했다.
그러자 리리아의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그제야 그녀의 오감이 주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연주, 화려한 스테이지, 눈부신 샹들리에, 자신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까지…….
요한이 장담한대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리리아가 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춤이라는 게 이렇게 즐거운 거였구나.’
한편 당황하던 처음과 다르게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리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요한은 어색한 미소를 삼켰다.
‘춤이라고는 전부 까먹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몸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도대체 얼마나 사교장을 돌아다니며 놀아났길래 몸이 기억하냐? 하기야, 나한테나 오래전 일이지, 이 몸뚱이로는 불과 2년도 안 된 과거의 일이니까.’
“알파 경!”
“예, 아가씨.”
“고마워요! 저 이렇게 춤이 즐거운 건 줄 몰랐거든요. 덕분에 지금은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일어나고 싶지 않은 그런 꿈 말이에요.”
리리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고마움을 전하자 요한도 가면 속에서 피식 미소를 그렸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뭐, 기뻐하니까 다행인 건가?’
하나 달콤한 시간은 언제나 유성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법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주는 어느새 종막을 고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제가 경을 리드해 드리죠. 고마워요, 알파 경.”
“그것 참 기대되는군요. 저 역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레이디 리리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사를 하면서 즐거웠던 시간을 마무리했다.
그날 밤, 리리아는 요한과 춤을 췄던 당시를 밤새 되새기면서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 * *
다음 날.
예가르의 가족들이 모인 아침 식사에 초대받은 도모스. 당연히 요한과 헨더슨 또한 자리에 함께하여 도모스의 곁을 지켰다.
“지난밤은 평안하셨는지요, 도모스 경.”
“신경 써 준 덕분에 푹 잤네. 그나저나 아반가르디 남작가는 아침상도 만찬이구먼. 상다리가 부러지겠어.”
아침 식사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도모스와 예가르는 사담을 나누고, 리리아는 안 그런 척 하면서도 끊임없이 도모스의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요한을 신경 썼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녀의 어머니, 보나는 딸의 모습이 답답했던지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알파 경, 혹시 가정은 있으신가요? 아니면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라도……?”
“엄마!”
보나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화들짝 놀란 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지만, 오히려 보나를 말릴 줄 알았던 예가르가 보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리리아, 식사 중에 이 무슨 무례더냐. 자리에 앉거라. 죄송합니다, 알파 경. 제 딸이 아직 귀족이라는 자각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아빠까지…….”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보나뿐만 아니라 예가르 역시 느낌이 요한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보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백작가의 차남인 요한과의 파혼이 결정 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전도유망한 알파라도 어떻게 인연을 맺어 보겠다는 속셈인 듯했다.
‘대충 결혼했다고 둘러대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사실 최근에…….”
“설마 어제 결혼하신 유부남께서 아직 미혼인 제 딸이 신청한 춤을 받아 주신 건 아니시겠죠? 처녀가 유부남을 꼬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리리아는 시집은커녕 평생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 할 텐데…….”
보나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닦는 척 눈가를 손수건으로 스윽 훔치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머, 주책맞게 제가 무슨 소릴 한 건지…… 제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겠죠? 게다가 손가락을 보니 결혼반지도 안 끼고 계신 것 같고. 아, 죄송해요, 말씀을 끊어서. 최근에 무슨 일이 있으셨다고요?”
‘…….’
요한은 방금 전까지 딸 걱정에 울다가 어느새 해맑게 웃는 보나의 미소가 마치 먹잇감을 칭칭 휘어감아 입맛을 다시는 구렁이의 미소처럼 보였다.
퇴로는 전부 막아 놓고 답을 정해 놔 버린 질문에 요한은 결국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약혼이 파기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할 일이 많은 탓에 지금 당장은 누군가에게 신경을 써 줄 여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안타깝네요, 알파 경 같은 멋진 남성분과 연이 닿지 못했다는 그분이. 그런데 혹시 일 하시는 곳에 검 잘 쓰는 사람은 필요 없으신가요? 여자라도 상관없다면 추천할 만한 인재가…….”
“잘 먹었습니다!”
리리아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며 도망치듯 식사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보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네. 저 아이도 그렇고, 알파 경도 그렇고. 이러다 서로가 부담스러워져서 일부러 피하면 큰일이니까.’
“하하하! 아무래도 저희 집 여자들이 알파 경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저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르칸 산맥을 찾아갈 정도의 용담호혈을 가지고 구르칸 산맥의 패자라고 알려진 구르칸 오크들과 협약을 맺은 전도유망한 사업가분께 관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예가르는 도모스와 요한에게 제안했다.
“어떻습니까? 마침 오늘 오후에 아반가르디 기사단의 합동 훈련이 예정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도모스 경만 괜찮으시다면 기사단의 합동 훈련에 참석하여 관람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훈련 관람 운운하지만 의중이야 뻔했다.
심지어 예가르도 자신의 의중을 크게 숨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계약서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는 거겠지.’
결혼 얘기는 생각도 못 했지만, 이런 얘기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요한이었기에 도모스는 사전에 요한이 시킨 대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것 참 흥미로운 제안이군. 좋네. 어차피 할 일도 없었으니 아반가르디 기사단의 실력을 구경하도록 하지. 만약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라면 바로 돌아갈 테니 그리 알게.”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지요.”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오후가 되었다.
기사단이 준비를 마치고, 도모스와 요한을 비롯한 예정된 관객들이 도착하자 예가르가 기사단을 향해 외쳤다.
“시작하라.”
예가르의 명령이 떨어지자 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기사단의 공개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것 봐라?’
기사단의 수준을 직접 확인한 요한이 크게 놀랐다.
사실 지금까지 풍문으로 떠도는 아반가르디 기사단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상인 가문에서 돈으로 사들인 뜨내기들이네, 방랑 기사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장식 기사단일 뿐이네, 하는 소문만 무성했었지.’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 모습을 실제로 봤다면 아마 쥐구멍을 찾지 않을까 싶었다.
‘예가르가 그런 헛소문을 신경 쓰지 않을 만하군. 이 정도 실력이라면 그딴 헛소문에 신경 쓸 필요조차 없겠어.’
모의 일기토부터 모의 세력전까지…… 다채로운 구성으로 진행된 훈련은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그중에서도 시종일관 요한의 이목을 사로잡은 사람은 바로 아반가르디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저 녀석…… 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 중에도 여유가 넘치잖아? 실력을 어느 정도나 숨기고 있는 거지? 어쩌면…….’
요한의 눈매가 좁아졌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