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결정을 약속한 시간이 찾아오자 요한을 비롯한 도모스 측과 예가르 측이 한자리에 모여 계약의 최종 결정에 관한 조율을 시작했다.
처음 운을 땐 사람은 예가르였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죠. 회의의 회의를 거듭한 결과, 저희는 알파 경이 제안한 계약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생각입니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반드시 포함돼야 합니다.”
“들어 보죠.”
요한이 대꾸하자 예가르가 요한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저희는 이 계약 그대로 클림포드 백작가의 공증을 받길 원합니다.”
“크흠!”
크림포드 백작가의 공증 얘기가 언급되자 도모스는 대놓고 언짢은 티를 팍팍 냈으며 뒤에 있던 헨더슨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진짜 알파 경이 예상한 대로 됐잖아?’
“죄송합니다, 도모스 경. 저는 귀족이기 이전에 상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상인들의 속담 중에는 부모 자식 간에 용돈을 줄 때도 계약서를 쓰라는 말이 있지요. 그만큼 저희는 계약의 신뢰성을 중요시합니다. 확실한 계약이라는 밑거름 위에 신뢰라는 성을 쌓을 수 있으니까요.”
“누가 뭐라고 했나? 이번 일의 전권은 알파 경에게 일임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안 그런가, 알파 경?”
그러면서 도모스는 알파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만약 영지가 잘못되면 그때는 가문이고 목숨이고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혹시라도 내 영지를 빼앗기는 날이 온다면 각오해라. 그때는 아주 그냥 가문이고 목숨이고 내 모든 걸 걸어서 네놈의 멱을 따 줄 테니까.’
물론 요한은 그런 도모스의 애잔한 협박 따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시죠.”
요한은 망설임 없는 계약서에 도모스의 인장을 찍었고 그에 예가르의 표정도 환해졌다.
‘이번 상행에 가져갈 상품 종류와 수량을 다시 한번 체크해야겠군. 최대한도까지 늘려서 가져가야겠어.’
예가르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상행이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고, 실패해도 열 배의 보상을 보험으로 들어 놓았으니 손해 볼 것이 없는 결정이었다.
“알아본 바, 내일 마침 하이든 경께서 스케줄이 비어 있다고 하니 지금 바로 약속을 잡고 출발하면 내일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최소한 저녁은 먹고…….”
하이든의 스케줄에 맞춰서 바쁘게 움직이려는 예가르의 모습에 도모스는 주린 배를 움켜쥐며 아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요한이 대신 도모스에게 대답했다.
“저녁은 가는 길에 육포로 해결하면 될 것 같습니다. 도모스 경, 설마 지금 이 계약보다 저녁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빨리 안 일어나고 뭐 하나? 저녁에 육포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구먼. 그래도 홍차는 마실 수 있지?”
요한의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은 눈을 확인한 도모스가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일행은 최소한으로 구성되었다.
도모스 측에서는 왔을 때처럼 요한과 도모스, 헨더슨이 동행했고, 예가르 측에서는 예가르와 리리아, 클레도르가 그들의 신변 보호를 책임졌다.
그렇게 여섯 명이 길을 재촉하며 말을 달린 덕분에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영주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거 좀 신기한 기분이네…….’
요한은 어색한 시선으로 도시를 둘러보았다.
위장한 신분 탓일까?
평소 익숙한 풍경들이 오늘따라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도모스가 콧방귀를 뀌며 요한의 어깨를 다독였다.
“자네 같은 남자라도 크림포드 영주령은 처음 와 보는 모양이군. 하기야, 이곳만큼 크고 화려한 대도시도 드물긴 하지. 긴장하지 말고 마음껏 구경하게나. 으하하하!”
마치 자기 집처럼 영주령을 소개하는 도모스의 모습에 요한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피식 웃으며 가볍게 넘겼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크림포드 백작가를 찾아 주신 귀빈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일행이 저택에 도착하자 시종들과 시녀들이 예법에 맞춰 일행을 환영해 주었다.
요한은 마치 남의 집을 찾아온 것 같은 어색함 속에 그들을 따라 귀빈실로 안내를 받았다.
그렇게 여독을 풀면서 조금 쉬고 있자니 시종이 찾아와 그들을 저녁 만찬장으로 초대했다.
“크림포드 백작님께서 먼 길을 찾아와 주신 여러분을 저녁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저녁 만찬장에는 하이든과 아네트가 미리 와서 요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네트는 우아하게 고개 숙여 그들에게 인사했고, 하이든은 찾아온 손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어 주었다.
“도모스 경, 오랜만에 보는군. 최근 기인을 만나 영지의 운영이 꽤나 달라졌다고 들었네만, 알다시피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부디 왕국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게나.”
“무, 물론입니다! 각하! 저, 도모스 히로벤칼! 분골쇄신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조국과 백작가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하하하! 그것 참 든든하군.”
괜히 오버하는 도모스를 웃으며 여유 있게 받아 주는 하이든의 모습에 요한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지? 설마 나 지금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처음 본 건가?’
회귀 전후의 기억을 따져 봐도 아버지가 웃는 모습이 떠오르질 않았다.
만약 잊어버린 게 아니라면 이번이 처음이 맞을 것이다.
문득 씁쓸한 미소가 배어 나왔지만 다행히 가면 덕분에 들키지는 않았다.
“예가르 경! 미안하군. 내 자식 교육을 똑바로 시키지 못한 탓에 자네 여식에게 아픈 기억을 남겨 주었어.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내 진심으로 두 사람에게 사과하네.”
“각하! 이러지 마십시오! 감당하기 힘듭니다! 이미 한 번 저희 가문에 직접 찾아오셔서 용서를 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 일은 벌써 다 잊었는걸요. 그러니 고개를 들어 주세요. 아버지의 말씀처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각하.”
하이든은 두 사람에게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했다.
요한은 몰랐는데 예가르의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하이든이 한 번 남작가를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한 듯싶었다.
‘아버지…….’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는 요한이었다.
예가르와도 진심 어린 악수를 나누며 그렇게 인사를 마친 하이든이 마침내 요한의 앞에 섰다.
“자네가 도모스 경의 복덩이라고 소문난 바로 그 친구로구먼.”
“알파라고 합니다. 사정상 가면을 벗지 못하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괘념치 말게. 어릴 때 큰 화상을 당했다지? 그것 때문에 목소리도 다쳤다니 크게 속상했겠구먼. 그래도 몸과 마음의 상처를 떨치고 일어서서 이리 큰 사람이 된 것을 보면 자네도 보통 인물은 아니구먼그래.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각하.”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하이든은 시종들에게 손님의 안내를 지시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하워드는 일이 있어서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웠다고 하니 어쩌면 벌써부터 후계자로서 가주의 업무 대행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자, 많이들 시장할 텐데 어서 들지.”
식탁 위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고 오케스트라가 자리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사람들은 음식을 음미하며 대화를 즐겼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족들과 초대받은 손님들이 모여 즐기는 저녁 만찬인 만큼 웃고 떠들며 식사를 즐기는 건 평민이건 귀족이건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요한은 신선한 충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함께한 저녁 만찬 자리는 언제나 장례식 버금갈 만큼 무겁고 우울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식사 도중 말 한마디 꺼내는 적이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항상 요한에 대한 잔소리뿐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분위기를 보면서 언제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부자를 지켜보았다.
형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다른 대화 주제를 꺼내 들곤 하지만 항상 마무리는 요한 자신의 분노로 끝이 났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저렇게 유쾌하고 잘 떠드는 사람이었구나……. 진짜 형이 아버지를 빼다 박은 거였네.’
그런데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무척이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형이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는 어머니의 말에 이전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알파 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용한 사람이구먼. 아니면 음식이 맛이 없다는 걸 침묵으로 시위하는 겐가?”
“아, 아닙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오랜만에 집밥을 먹는 것 같아 조금 감회가 새로워서요.”
“하하하! 그런가? 그렇다면 이해하네. 우리 부인께서 다른 것도 능숙하지만 요리는 왕국 제일의 솜씨를 자랑하지 말일세.”
“당신도 참, 여러분도 음식은 얼마든지 더 있으니까 사양 말고 마음껏 드세요.”
“감사합니다, 마담.”
요한은 순간 울컥했다.
가족들과 이렇게 모여서 웃고 떠들며 밥을 먹는 게 이토록 행복한 일이었다는 걸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어땠을까…….
순간 그때의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요한은 남김없이 후회를 털어 버렸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으니까.
그렇게 저녁 만찬이 끝나고 요한과 예가르, 그리고 하이든 이렇게 세 사람이 하이든의 집무실에서 따로 자리를 가졌다.
“그래, 얘기는 나도 대충 전해 들었네. 히로벤칼 자작령에서 준비 중이라는 새 교역로의 공증 때문이라지? 대단하군. 구르칸 산맥은 왕국에서조차 섣불리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거늘, 자네 혼자서 그곳의 패자인 구르칸 오크들과 성공적으로 협상을 이끌어 냈다는 게 사실인가?”
“각하, 그전에 잠시만 무례를 용서하소서.”
“무례? 그게 무슨…….”
파지직!
그 순간 요한의 몸에서 푸른 전류가 방전하며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툭. 털썩…….
요한이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예가르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오러막을 펼쳐 방을 감싸자 그의 기감에 숨겨져 있던 도청 아이템들이 걸려들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알파 경! 여봐라! 밖에 아무도 없느냐!”
스릉!
갑작스러운 요한의 돌발 행동에 하이든은 잔뜩 경계하며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요한의 오러막이 내외부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이든은 아무리 소리쳐도 병사들이 들어오지 않자 잔뜩 긴장했지만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방금 요한의 움직임을 보고 자신이 전력으로 도망쳐 봤자 그의 손바닥 안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이든이 영리하게 자리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음을 확인한 요한은 창문마다 커튼을 쳐서 내부를 가리고 기감에 걸려든 도청 아이템들을 빠르게 탐색하여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이든도 거기에 대해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무엇인가?”
“도청 아이템입니다. 아마 이 방뿐만 아니라 저택 이곳저곳에 깔려 있을 겁니다.”
그러자 경악하여 소리치는 하이든.
“그게 무슨! 감히 누가 나 하이든을 도청한단 말이더냐! 그런 일은 설령 국왕 전하라도…….”
“국왕 전하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놈들이죠.”
그렇게 모든 도청 아이템을 제거한 요한은 그제야 안심하고 가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날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어디서 숨어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그림자들의 눈에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 방 안의 도청 아이템들을 전부 제거하고 오러 막으로 소리를 차단해도 당연히 사업에 관련된 기밀 때문일 거라고 놈들을 착각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 말입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이든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두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요한이 가면을 벗고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제 진짜 신분으로 별안간 백작님과 독대를 청한다거나 이 자리에서 오러 막으로 소리를 차단하고 도청 아이템 같은 걸 제거했다가는 그림자 놈들의 이목을 단숨에 잡아끌었을 테니까요.”
“너, 너는……!”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