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30화 (30/150)

30. 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털썩…….

하이든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엉덩이 밑에 소파가 있어 별일은 없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혼란 그 자체였다.

“어, 어떻게……!”

하이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가면 속에 숨어 있던 얼굴은 자신이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할 그런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이든은 체면도 불구하고 자신의 뺨을 뜯겨 나갈 정도로 꼬집었다.

당연히 뺨은 뜯겨 나갈 만큼 아팠다.

손을 놓은 뒤에도 붉게 달아오른 뺨에서는 얼얼한 통증이 계속 느껴졌다.

“저는 이게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꿈이라고 한다면 저는 누구보다 신을 저주하는 인간이 될 테니까요.”

목소리 변조까지 풀자 영락없는 요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탓에 하이든의 두 눈은 더욱 커졌고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요한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정녕…… 요한이라는 말이냐?”

“저 진짜 아버지 아들 요한이 맞습니다.”

“그럼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이 아비를 찾아온 것이냐? 대관절 이 상황은 또 뭐고. 알파? 그런 가명은 또 왜……? 아니, 지금 이게…….”

하이든은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정리하고 조각난 퍼즐을 맞춰보려 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어쩌면 저놈이 요한과 모습만 비슷한 가짜일 수도…… 잠깐, 그렇다면 진짜 내 아들은?’

하이든이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기 시작하자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생각을 대충 짐작했기 때문이다.

“변장도 아니고, 가짜도 아닙니다. 정 뭣하면 아버지랑 저밖에 모르는…….”

말을 하다 말고 요한은 무거운 눈빛으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죄송합니다. 그런 일은 없었네요. 아버지랑 저밖에 모르는 비밀 같은 건…….”

그 모습에 하이든의 눈빛이 침잠했다.

요한의 말처럼 요한과 자신만의 비밀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정말로 요한이든 아니든, 이런 상황을 설계한 이유가 있겠지. 일단 한번 얘기해 보아라, 자네의 목적이 무엇인지.”

요한은 하이든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를 똑바로 주시하였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전부 진실입니다. 하지만 그걸 믿을지 말지 결정하는 건 온전히 아버지의 몫입니다. 저는…….”

요한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전부 하이든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철없고 방탕했던 망나니 시절을 보내다 가문과 가족을 모두 잃어버리고 노예로 전락한 일부터, 제국의 전쟁 노예로 차출되어 기연을 만나 제국의 영웅으로까지 출세했던 일들 모두를 말이다.

마침내 토사구팽당한 자식의 최후까지 숨죽여 듣고 있던 하이든은 회귀한 이후 요한의 행보에 관한 얘기를 듣다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전해 듣고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후우……. 그것 참…….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도 믿어 달라고 하기 어려운 일은 건 맞구나.”

“믿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을…….”

“그렇다면 회귀한 날짜는 2년 전, 4월 12일. 그날이 맞는 것이더냐?”

“……!”

요한은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부릅뜨고 하이든을 쳐다보았다.

자신은 얼마 전에 회귀했다고만 했지, 정확한 날짜는 얘기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든이 그 날짜를 정확하게 맞춰 버렸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그, 그걸 어떻게……?”

요한은 머릿속으로 회귀 이후의 기억들을 빠르게 훑어보다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윌라드였군요. 제게 심어 놓은 아버지의 스파이가…….”

“너무 속상해하지 말거라. 그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사람이었다. 뭐, 1년 전부터 네가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정기 보고를 하는 걸 보면 이제는 완전히 네 사람이 된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런데 알고 계셨으면서 왜 모른 척을 하셨습니까? 그랬다면 라펠트 자작가나 아반가르디 남작가를 직접 찾아가 고개를 숙이는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셨을 텐데요.”

하이든은 요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 감추면서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이유를 얘기해 줄 때까지는 모른 척하자고 다짐했을 뿐이야. 설마 그 얘기가 이 정도로 충격적인 얘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야.”

요한은 피식 서글픈 웃음을 흘러 나왔다.

“조금은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분입니다. 이런 개차반보다 못한 자식 놈을 왜 그렇게까지 믿어 주시는 겁니까?”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는 없다. 나도 그렇지만 네 엄마와 형은 나 이상으로 너를 믿고 있었다. 언젠가 방황을 끝내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제대로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날이 올 거라고. 하지만…….”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서일까?

하이든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더니 천장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을 흘렸다.

“설마 그런 참담한 미래에 너 혼자만 남겨 둘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구나. 미안하다…….”

그 순간, 요한은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요한은 그것을 숨기지 않고 입에 담아 뜨겁게 내뱉었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접니다! 당신은 자랑스러운 크림포드 백작가의 가주로서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신 명예로운 귀족이셨고, 못난 아들을 살려 보겠다고 자신을 희생한 자랑스러운 아버지셨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조금만 더 정신을 빨리 차렸더라면…….”

꽈악!

요한은 피가 나오도록 주먹을 틀어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힘없이 떨군 고개 밑으로 그날의 후회가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요한아, 그 후회를 다시 하지 않으려고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더냐? 나는 지금의 네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네 가족과, 네 사람과, 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분골쇄신하는 위인이 내 아들이라는 게 내게는 무엇보다 갚진 명예요, 자긍심이다. 그러니 고개를 들거라. 너는 지금 누구보다 위대한 인간이다.”

하이든은 요한에게 다가가 아들을 꼭 끌어안아 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처음이었다.

아버지에게 비난이 아닌 칭찬을 받는 게.

처음이었다.

아버지에게 안겨 위로받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품이 이렇게 넓고 따뜻하다는 걸 안 것이…….

요한은 울었다.

정말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목 놓아 울었다.

울면서 소리쳤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하이든은 그런 아들의 묵은 감정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며 자식을 위로해 줄 뿐이었다.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른 요한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못난 모습을 보여서…….”

“무슨 소리냐. 최근에 본 네 모습 중에 가장 솔직하고 보기 좋았는데. 그런데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이곳 왕국은 물론이고 대륙 곳곳에 제국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첩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했지?”

“예, 그들은 일반 평민부터 상인, 귀족, 심지어는 왕족까지…… 짧게는 백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에 걸쳐 제국이 침투시킨 황제의 눈입니다. 대를 이어서 해당 신분에 녹아들었기 때문에 겉으로 봐선 구분이 절대로 불가능하죠.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확실히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고 제국 부흥의 기틀을 쌓는 것입니다.”

“그럼 너조차 그 첩자들을 구분할 수 없단 말이냐?”

요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운 좋게 찾아낸다고 해도 점 조직인 그림자들은 서로의 정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지정된 직속상관의 명령에만 순종할 뿐이죠. 물론 그 상관에 대해서도 그들은 일체 알지 못하고요.”

“그럼 전하께 이 사실을 고하고 왕국 전체에 대대적으로 첩자 색출 작전을 진언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국내에 숨어 있는 첩자들만 색출해도 분란의 씨앗은 막을 수 있을 게 아니더냐.”

“아버지께는 혹시 루드란 왕국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는 있다만 갑자기 루드란 왕국은 왜?”

“제가 제국의 영웅이 된 이후, 루드란 왕국 왕실 기사단장 출신의 기사를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가 그러더군요. 자신들의 왕이 조금만 더 어리석었더라면 적어도 왕국을 제국에 가져다 바칠 일은 없었을 거라고. 적어도 한 번쯤은 제대로 싸울 수 있었을 거라고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이냐? 루드란 왕국이 스스로 제국에 항복했다는 말이냐?”

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대답했다.

“루드란의 왕은 영민한 자였습니다. 기사단장의 말에 의하면 그는 왕국 내에 숨어 있는 첩자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더군요. 물론 그 첩자가 제국의 그림자인 건 알지 못했지만요. 그래서 첩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실패했나 보군.”

“첩자는 하나도 색출하지 못한 채 귀족들과 왕족들 간에 의심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왕족파와 귀족파로 나뉘어 있던 파벌은 심지어 같은 파벌조차 의심하며 서로를 불신했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그림자들에게는 가장 최적의 상황이 완성되었습니다. 자중지란을 일으키기 위한 장작이 한가득 쌓여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루드란은 그렇게 다른 왕국들보다 한발 먼저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망해 버렸죠.”

“흐음…….”

요한의 얘기에 하이든은 안색을 굳히며 침음을 흘렸다.

루드란의 미래가 자신들이 속한 벨로반의 미래는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드란의 왕은 첩자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갉아먹기 전에 첩자들을 색출할 생각이었겠지만 전제 자체부터 틀렸습니다. 이미 첩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왕국은 갉아 먹힌 지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루드란은 이미 쓰러져 가는 고목나무에 자신의 손으로 도끼질을 한 것과 다름이 없었죠. 물론 우리 왕국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대외적인 색출 작업은 처음부터 불가능이라……. 그래서 네가 지금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가짜 신분을 만들어 암중에서 움직이는 게로구나.”

“제국은 능력 있는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후계자를 싫어합니다. 그런 자들이 그림자의 눈에 띄면 은밀하게 주시하고 있다가 조금씩 숫자를 줄여 나가거나 의식불명 상태로 만들어 버리죠.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멍청하고, 욕심 많고, 능력 없는 이들만 남을 수 있게요.”

귀족들은 정쟁 때문에, 왕족들은 왕위 다툼 때문에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게다가 그림자들은 모두 해당 왕국의 왕족이나 귀족으로 뿌리를 깊게 내린 사람들이었으니…….

만약 암살이나 의식불명으로 만드는 계획이 실패했다 하더라고 그것이 제국의 소행이라고 밝혀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네 형도 사고로 위장해 암살을 당했다는 게냐?”

요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그런 일은 이제 없을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제 가족을 제 손으로 지키기 위해 돌아온 거니까요. 그리고 반드시…… 그 빌어먹을 제국을 제 손으로 무너트릴 겁니다!”

파지직!

요한은 성난 짐승의 눈으로 말을 씹어 뱉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그의 주먹에서 푸른 스파크가 사납게 방전하였다.

이를 보는 하이든의 눈매가 좁아졌다.

‘뇌전의 마나라……. 전설로만 전해지던 아바타의 힘을 손에 넣은 것이더냐? 그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책임만큼이나 무서운 힘을 손에 넣었구나.’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아버지께 몇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이 아비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뭐든지 힘이 되어 주마.”

요한의 계획을 전해 들은 하이든이 안색을 심각하게 굳히며 되물었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제가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계획입니다. 만약 제 정체를 드러내 놓고 제국 타도를 위해 움직인다면 그림자들은 제 손가락 움직임 하나까지 감시해서 제국에 보고할 테니까요. 오히려 백작가에 숨어 있는 놈들의 이목이 형에게 집중되어 있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요한은 한층 더 표정이 무거워진 아버지에게 자신감 있게 포부를 밝혔다.

“저는 반드시 우리나라에 숨어 있는 그림자들을 조용히…… 그리고 모조리 찾아낼 겁니다. 놈들도 자신들이 어떻게 당하는지 모를 만큼 은밀하고 치밀하게 말이죠. 우리 가문과 우리 왕국이 피를 보지 않고 그림자들을 제거할 수 있는 건 이 방법뿐입니다.”

그에 하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다. 아들아, 만약 네 말대로 하게 된다면 너는 그때부터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씻을 수 없는 오명과 불명예를 짊어진 채로…….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되겠지. 너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해서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 하는데 이 아비가 도울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저는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언젠가는 제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라고 믿으니까요.”

아들의 서글픈 위로에 하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요한에게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얼른 고개를 드세요! 빨리요!”

예상치 못한 하이든의 행동에 요한이 깜짝 놀라 일어나서 그를 말리자 하이든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보잘것없지만 제가 감히 왕국의 귀족을 대표하여, 그리고 이 나라의 백성들을 대표하여 우리의 영웅에게 대신 감사를 전합니다. 고귀하신 영웅에게 이것밖에 드릴 게 없다는 것이 그저 천추의 한일 뿐입니다…….”

“아버지…….”

허리를 곧게 편 하이든은 말없이 요한에게 다가가 아들을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미안하구나. 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해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못했던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하지 말거라…….”

“…….”

두 사람은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부자의 정을 나누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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