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우연×우연
야심한 밤.
철컥, 드르르륵…….
서재를 찾은 사내가 책장에 꽂혀 있던 몇 권의 책들을 조작하자 책장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는 위험한 계단을 어렵지 않게 내려간 사내는 통로 끝에 존재하는 작은 밀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밀실 안에는 불빛 하나 없이 의자 하나와 테이블,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수정 구슬 하나가 전부였다.
의자를 당겨 앉은 사내는 구슬에 손을 얹더니 익숙하게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구슬이 옅은 빛을 발하며 그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로 보이는 듯한 검은 실루엣이 보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서로의 실체를 알아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다만 복면에 그려진 붉은 문양이 다른 게 서로의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보고하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청년인지 노인인지 구분이 안 되는 목소리가 앉아 있던 그림자에서 흘러나왔다.
변성 아이템으로 목소리를 바꾼 것이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변성 아이템을 사용하는 수정 구슬 속 그림자가 비슷한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크림포드 백작가의 하워드 크림포드 소백작이 왕족파의 귀족들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목적은?”
-조용히 병력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림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최근 하워드가 가까운 미래에 대륙 전쟁을 예고하고 다니면서 병력을 규합하자고 주장한다 하더군요.
“전운을 감지할 만큼 아직 대륙의 정세가 그렇게 위태로운 건 아니었을 텐데?”
-하워드는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문이 운영하는 상단 전권을 위임받았을 만큼 능력과 감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하워드가 무기상으로 백작가 상단의 주종을 전환하고 병력을 준비하기 시작한다면 벨로반 왕국을 무너트리는 데에 상당한 애로 사항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고를 받은 그림자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서 물었다.
“하워드를 처리하면 백작가의 후계는 누가 남지?”
-차남인 요한 크림포드가 남습니다.
“요한 크림포드라면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다. 백작가에서도 골치를 썩는 개망나니라고 하던데.”
-최근에는 하워드가 주최한 클랜 파티에서 예가르 아반가르디 남작의 외동딸, 리리아 아반가르디에게 수치를 주고, 라펠트 자작가의 후계를 폭행한 탓에 다시 근신 처분을 받았습니다. 근신하고 있는 별장은 히로벤칼 자작령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히로벤칼 자작령이라는 말에 보고를 받던 그림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히로벤칼 자작령이라면 알파라는 녀석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그 지역이군.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요한은 쓸 만한 녀석인가?”
-최근 별장에서 버려지는 쓰레기 중에 빈 술병의 비중이 평소의 몇 배나 늘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최근에는 마약에까지 손을 대는 것 같다는 보고도 들어왔습니다.
“마약?”
-예, 그의 집사인 윌라드가 새벽마다 도모스가 뒤를 봐주고 있는 암상인을 찾아가서 마약을 구매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윌라드 본인에게 마약 중독의 증상이 보이지 않고 요한이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걸 보면 요한이 마약에 손을 대는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다거나 그럴 것이라는 심증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본인이 마약을 하고 있다는 확증을 잡아 오도록. 검증만 된다면 하워드를 제거한 후에 백작가를 조종하는 훌륭한 장기 말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예.
“그나저나 알파라는 녀석에 대해 다른 정보는 아직 들어온 게 없나?”
-최근 도모스, 예가르와 함께 구르칸 산맥 교역로 계약에 대한 공증을 받기 위해서 하이든을 찾아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집무실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 아이템들이 모두 고장 나는 바람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이든의 집무실에 숨겨 두었던 도청 아이템이 전부 파괴되었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림자가 즉시 답했다.
-몇 달 전, 근신을 마치고 돌아온 요한 크림포드의 방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이라……. 그러고 보니 요한이 근신하고 있던 별장도 히로벤칼 자작령이고 알파라는 놈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도 히로벤칼 자작령이군.”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실수가 거듭되면 실력이듯, 우연이 거듭되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가능성이 높지. 알파가 활동하는 최근에 요한이라는 녀석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있나?”
-그게…… 최근에는 술과 마약 때문인지 녀석의 난폭함이 심해져 몇몇 사람들을 빼면 녀석의 방 근처도 얼씬거리지 않는다고…….
“즉, 녀석의 모습을 실제로 확인한 사람은 제한적이라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그림자는 긍정한 후에 물었다.
-하면 어떻게 할까요? 요한을 처리하시겠습니까?
“알파의 정체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다. 알파라는 녀석의 능력은 확실히 대단하다. 만약 녀석이 제국의 큰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이라면 거두는 게 맞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녀석은 제국의 독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요한이 알파라면 요한 그 녀석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알파로 활동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정체를 숨기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건 나도 아직 정확히 추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녀석이 하워드의 동생이라면 적어도 제국의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할 걸 준비할 것 같지는 않군. 요한과 알파를 철저히 감시해라. 만약 녀석들이 같은 인물이라면 그 즉시 나에게 보고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밖에 다른 보고들을 받고 그에 따른 지시를 내린 사내는 보고하던 그림자가 구슬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자 자신도 왔던 길을 통해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
비밀 통로에서 옷을 갈아입고 서재를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그맣고 예쁜 여자 아이가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할아버지!”
“어이쿠, 우리 예쁜 공주님! 벌써 온 게야? 귀여운 내 새끼!”
“헤헷! 할아버지, 수염 따가워요.”
사내는 손녀딸을 한 손으로 번쩍 안아 들며 반가움을 표하는 사이, 그의 딸과 사위가 그를 찾아왔다.
“하여간…… 아빠는 세라밖에 안 보이죠?”
사내의 딸이 뾰로통한 얼굴로 인사하자 사내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공주님이랑 우리 공주님을 훔쳐간 괘씸한 도둑놈도 잘 보인단다.”
“아빠!”
“하하하…….”
그에 사위가 어색하게 웃으며 가지고 온 선물을 그에게 건넸다.
“아 참, 각하. 이건 아버지께서 각하께 전해 드리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담그신 과실주인데 공작 각하께 드리는 선물치고 많이 부족하다 싶어 극구 말렸지만 워낙 강경하게 부탁하셔서…….”
“달마지안 경이? 이것 참 고맙구먼. 잘 마시겠다고 전해 주게. 으하하하!”
사내가 기뻐서 함박웃음을 터트리자 그의 딸이 피식 웃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거봐. 내가 좋아하실 거라고 했잖아. 밖에서 왕국제일검이면 뭐 하냐고. 집에서는 검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술고래 할아버지일 뿐인데. 안 그래요?”
“그래도 우리 세라는 할아버지가 좋지?”
“응! 할아버지 너무 좋아!”
“으하하하! 그거면 됐지, 뭐. 자, 가자. 밤도 늦었는데 푹 쉬고 내일 보자꾸나. 우리 공주님은 오늘 할아버지랑 같이 잘까?”
그렇게 벨로반 왕국 제일검, 유스터프 공작가의 밤은 깊어 갔다.
* * *
시간을 돌려 요한과 예가르, 하이든이 계약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던 그날 밤.
“으음…….”
작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린 예가르를 하이든이 걱정해 주었다.
“정신이 드는가?”
“각하? 제가 지금까지 무슨…….”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네. 다녀간 신관의 말로는 긴장이 풀리면서 그동안 참아 왔던 스트레스가 터진 것 때문이라던데, 그동안 신경 쓸 일이 많았나 보구먼. 스트레스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명이 크게 단축될 게야. 명심하게.”
‘내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
예가르는 분명 뭐가 더 있었던 것 같지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에 기억은 제대로 나지 않았다.
다만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것만큼은 확실했기에 하이든이 그렇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딱히 몸에 별다른 문제도 없는 것 같고…….’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닐세. 어차피 대략적인 계약 내용은 사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말일세. 게다가 자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 알파 경이 자세히 설명해 줘서 더 들을 것도 없다네.”
‘알파 경이?’
예가르의 시선이 요한에게 향하자 요한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여기서 내가 하나 제안을 하지. 아반가르디 상단의 피해 보상에 대한 계약 조건을 다섯 배로 하는 게 어떻겠는가? 대신 같은 조건으로 우리 크림포드 상단과도 계약을 맺도록 해 주게.”
“예?”
“왜? 마땅치 않은가?”
예가르는 놀란 얼굴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가면 때문에 그 표정을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이미 그와는 얘기가 끝난 모양이었다.
예가르는 속으로 주판을 튕겼다.
‘백작가에서도 이미 구르칸 교역로에 대한 정보 수집과 평가를 마친 건가? 그렇다고 해도 숟가락을 올리겠다는 건 교역로에 대한 평가가 확실히 높다는 건데…… 만약 여기서 우리가 보상 조건이 하향됐다고 발을 뺀다면 이번 계약은 백작가에서 독점할 수도 있다.’
백작가에서도 탐을 내는 교역로.
무엇보다 피해 보상이 줄어든다고 해도 다섯 배면 충분한 메리트가 있었다.
무엇보다 백작가의 상단 역시 계약 당사자가 된다면 공증을 서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도모스를 압박할 수 있었다.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도모스가 미치지 않고서야 하이든에게 어깃장을 부릴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좋습니다. 받아들이도록 하죠.”
“현명한 판단일세. 그럼 바로 새 계약서를 준비하도록 하지.”
하이든은 반색하며 순간적으로 요한과 눈빛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요한은 자연스럽게 아반가르디 상단을 포함하여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림포드 상단을 교역로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크림포드 상단 역시 기존의 교역로보다 훨씬 효율이 좋고 효율 대비 가격도 저렴한 새로운 교역로를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상부상조가 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계약이 끝나고 새로운 교역로의 건설 및 번영을 위한 연회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니, 저자는…….”
“윌라드잖아? 요한 도련님을 모시고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는 왜……?”
“표정이 꽤나 심각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나?”
윌라드는 얼마나 급했는지 요한, 예가르와 함께 있는 하이든을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는 하이든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보고했다.
그러자 실시간으로 표정이 악귀처럼 변하기 시작하던 하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자와 같이 소리쳤다.
“여봐라! 병사들은 히로벤칼 자작령의 별장에서 요한을 끌고 오거라! 지금 당장!”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