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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35화 (35/150)

35. 실크 로드

말에서 내린 하워드는 자신을 반겨 주는 예가르와 요한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어서 오십시오, 하워드 경. 이쪽은 알파 경입니다. 이곳 구르칸 교역로의 담당자이시죠.”

“알파라 합니다. 하워드 경의 명성은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요한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하워드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워드 크림포드입니다. 저야 말로 알파 경이 이루신 위업에 대해서는 아버님께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두 분께는 먼저 저 대신 제 동생의 마지막을 지켜 주신 일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닙니다. 저희 역시 그 일로 마음이 편치가 않군요. 요한 도련님이 그곳에선 편히 쉴 수 있기를 저희도 간절히 바랍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요한은 스스로의 명복을 빌어 주며(?) 하워드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예가르와 하워드는 교역로 앞에서 마지막 점검을 마친 뒤, 앞장서는 요한과 자작령의 병력들을 따라 천천히 산맥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뻐꾹!

“뭐, 뭐야?”

히히히힝!

“다들 진정해! 뻐꾸기 울음소리일 뿐이다! 너희가 놀라면 말들도 놀란다고!”

산맥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긴장감은 금세 최고조에 달했다.

작은 산짐승이 수풀 속에서 바스락대거나 산새 울음소리에도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상단이 멈추고 무장한 병사들이 사방을 포위하며 경계하는 일들이 허다했으니 굼벵이가 기어가는 수준으로 느릴 수밖에…….

“이거 곤란하군요. 이대로는 예상 도착 시간보다 몇 배는 더 오래 걸릴 텐데…….”

예가르가 솔직한 심정으로 고민을 털어놓자 곁에 있던 하워드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상단의 규모와 구르칸 산맥의 악명을 생각한다면 예상치 못할 속도는 아닙니다. 대신 이번 상행으로 교역로의 안정성이 확보된다면 그때부터 이 교역로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겠지요.”

“다시 한번 저를 믿고 제안을 받아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신뢰에 대해서는 안전으로 반드시 보답해 드리죠.”

“그것 참 든든한 말씀입니다. 하하하!”

걱정을 털어내려는 듯 웃어 보이는 예가르의 모습에 요한도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녀석들이 알아서 잘해 줄 테니까.’

한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

그 수풀 사이에 숨어 상단을 주시하고 있는 몬스터들이 있었다.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우글우글한 상단은 그야말로 뷔페나 다름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부드럽고 기름기 넘치는 인간의 고기를 마음껏 뜯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여기도 숨어 있었네.”

“하여간 인간한테 눈독들이지 말라니까 이것들은!”

팟! 촤촤촤!

어느새 나타난 구르칸 오크들의 글레이브가 작렬하자 인간을 노리던 몬스터 무리의 일부가 순식간에 육편이 되어 사방에 쏟아져 내렸다.

“얼른 안 꺼져?”

구르칸 오크가 소리치자 살아남은 녀석들이 오크들을 보며 으르렁거렸지만 이내 꼬리를 말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시는 오지 마라. 또 오면 전부 잡아먹는다!”

“여기도 한 발 갈겨 놓자고.”

“아따 시원하다!”

오크들은 몬스터들을 쫓아낸 곳에 소변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했다.

이렇게 영역을 표시해 두면 몬스터들이 이곳을 통해 상단을 습격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 식으로 오크들이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던 허점들까지 정리하며 꼼꼼하게 영역을 만들어 가자 교역로는 알게 모르게 훨씬 더 안전해지고 있었다.

* * *

“우리가 지금 산맥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됐지?”

“글쎄, 한 달쯤 지나지 않았나?”

“벌써 그렇게 됐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안전하네.”

“그러게……. 지금까지 몬스터 같은 건 그림자도 못 봤지 아마?”

지금까지 상단을 습격한 몬스터들의 숫자는 제로.

도저히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구르칸 산맥의 악명과 맞지 않았다.

“하암……!”

“얼마나 더 가야 되려나.”

몬스터들의 습격은커녕 그림자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던 탓일까?

그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교역로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창끝을 바깥쪽으로 겨누면서 긴장하던 병사들은 어느새 하품을 하며 창을 지팡이처럼 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거기! 자세 바로하고. 네 지팡이로 쓰라고 준 창이 아니다.”

“크크크큭!”

물론 그런 병사가 보일 때마다 기사들이 단단히 주의를 주긴 했지만 그만큼 교역로의 안정성이 보장된다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이대로 별일 없이 계속 간다면 한 달 후쯤에는 정말로 이테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긴 하군. 이 정도면 지름길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어.”

예가르의 감상을 하워드가 긍정했다. 그러자 앞장서서 걷고 있던 요한이 대꾸했다.

“손색이 없는 게 아니라 지름길 맞습니다. 다만 규모가 좀 더 큰 지름길일 뿐이죠.”

“그렇군. 그런데 경이 얘기했던 접선지는 어디인가? 그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 말일세.”

“그렇지 않아도 거의 도착했습니다.”

요한은 접선지 근처에 도착하자 상단을 그 자리에 대기시켜 두고 예가르와 하워드. 그리고 두 사람을 호위하는 일부 기사들만 대동한 채 약속한 장소로 이동하였다.

“다 왔습니다. 이곳입니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교역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마루였다.

먼저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아직 요한 일행 말고 누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군, 제 뒤로 물러서십쇼.”

백작가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이자 하워드의 호위 기사인 노빌과 예가르의 호위 기사, 클레도르가 각자 자신의 주군 앞으로 나와 긴장을 곤두 세웠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호위 기사들은 모두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주위를 둘러싸며 한껏 긴장하기 시작했다.

산등성을 향해 다가오는 무리들의 존재감을 그들도 느낀 탓이었다.

‘저들이 구르칸 오크들인가…….’

드디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구르칸 오크들에게 기사들은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확실히…… 만만히 볼 자들이 아니다.’

오크들을 확인하는 기사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노련한 기사들은 오크들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풍겨져 나오는 기세만 봐도 자신들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단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설마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이거 참 미안하게 됐구먼. 크하하하!”

한 존재의 등장에 기사들은 사색이 되었다.

쿠구구구구구……!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도 태산같이 거대하고 강철보다 단단하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절대자의 기세였다.

굳이 통성명을 하지 않아도 기사들이 눈앞의 거대한 오크가 이곳의 지배자임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안할 거 없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도착했을 뿐이니까. 애초에 너도 약속 시간 전에 왔고.”

요한은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가루칸에게 다가가 그와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혔다.

“보고 싶었다, 형제.”

“동감이다.”

가루칸과 친숙하게 인사를 나누는 요한의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던 하워드와 예가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요한과 가루칸의 친분에 대해서 백 번을 들어 봤자 지금처럼 한 번 보여 주는 것만 못 하다는 얘기였다.

‘세상에…… 정말이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저 맹수보다 무서운 구르칸 오크족의 대족장과 정말로 막역한 사이였다니…….’

‘아버지께서 신뢰하실 만한 이유가 있었군. 정확한 건 아니지만 수많은 전쟁 학자들이 계산하기로 구르칸 산맥 오크족들의 병력 규모는 능히 어지간한 국가 수준에 필적한다고 얘기하지. 그런 구르칸 오크족의 수장과 알파 경이 이토록 막역한 사이라면 그의 뒤에는 한 나라가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한에 대한 두 사람의 평가가 다시 한번 수직상승하는 순간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한은 가루칸에게 두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크림포드 상단의 주인이자 크림포드 백작가의 후계자인 하워드 크림포드. 마찬가지로 이쪽은 아반가르디 남작가의 가주이자 아반가르디 상단의 주인 되는 예가르 아반가르디다.”

“만나서 반갑소. 구르칸 오크들의 대족장이자 위대한 오르크의 대전사 아르칸의 아들, 가루칸이오.”

“하워드 크림포드입니다. 용맹한 오르크의 대전사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예가르 아반가르디라 합니다. 구르칸 산맥의 전사들은 일기당천이라 하더니 그 소문도 축소된 것이었군요. 이리 직접 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요한이 중간에서 통역을 해 준 덕분에 세 사람은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알파 경에게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구르칸 오크족의 번영을 위해서 기꺼이 이 길을 열어 주셨다고요.”

“그렇소.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우리 동족들이 풍요 속에서 번영하는 것뿐이오. 그 대의 안에서 인간들은 우리의 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여기 있는 나의 형제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믿음인지를 일깨워 주었소.”

가루칸은 요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에게 신뢰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에 예가르도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얼마나 좁은 세상을 살고 있었는지……. 알파 경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예가르의 말을 하워드가 이어받았다.

“구르칸 오크족이 우리와 같은 곳을 보고, 같은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구르칸 오크족과 함께 할 것이오. 그대들의 힘이 되어 드리리다.”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내 입으로 뱉은 말은 그다지 신용하지 않으나 그대들의 약속은 속는 셈치고 한번 믿어 보겠소.”

가루칸이 손가락을 튀기자 대기하고 있던 오크가 네 개의 사발과 술통을 가져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들과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보고 싶으나 오늘은 마음만 취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다.”

가루칸은 네 개의 사발에 술을 가득 채운 뒤, 그것을 세 사람에게 나눠 주고 마지막 남은 사발을 들어 머리 위로 올렸다.

“이 사발에 담긴 것은 술이 아니라 우리의 피요. 피의 맹약을 어긴 자는 응분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니 각오한 자만이 이 잔을 비우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한과 가루칸이 술잔을 비우고 뒤 이어서 예가르와 하워드가 술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그 순간, 하워드와 예가르가 상당히 놀라면서 빈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술맛이 굉장하군요!”

“우리 오크들이 전투만큼 자신 있는 게 술이라오. 크하하하!”

가루칸이 크게 웃자 하워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그렇군요. 이 좋은 술을 오크들만 맛보고 있었다니…… 조만간 이 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는 모쪼록 저희 아반가르디 상단도 포함시켜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두 분 모두. 아무튼 대족장께서 원하시는 식량과 생필품은 저희 상단 가장 후미에 넉넉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됐소. 우리가 가 봐야 인간들 놀라서 나자빠지기나 하지. 괜한 소동을 일으킬 생각은 없소. 그대들을 믿으리다.”

‘이 녀석…….’

요한은 속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차피 교역로는 편도가 아니라 왕복이다.

만약 여기서 거래 물품의 질이 한참 떨어지거나 장난질을 해 놓는다면 돌아오는 길은 지옥길이 될 거라는 걸 가루칸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워드와 예가르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 때문에 보지도 않고 믿는다는 말로 자신들의 체면을 세워 주는 가루칸의 모습에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면 저희들도 다음에 더 좋은 상품으로 대족장의 호의와 믿음에 보답하도록 하죠.”

예가르의 약속에 가루칸이 대꾸했다.

“그렇게만 해 주시오. 그럼 내 교역로 전체에 실크를 깔아 드릴 테니.”

“실크 로드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하하하!”

진짜 비단으로 교역로 전부를 포장할 수는 없겠지만 이 교역로가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기에 하워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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