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36화 (36/150)

36. 엘프숲의 재난

빠르게 저물어 가는 해를 보고 하워드와 예가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휴, 이거 좋은 사람과 함께 시간은 보내다 보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군요. 다음에는 저희 저택에서 대족장님을 모시고 더 뜻깊은 시간을 가지고자 하는데 어떠신지요?”

“안 될 게 뭐가 있겠소? 다만 그때는 백작성을 담그고도 남을 술을 준비해야 할 거요. 하워드 소백작.”

“여부가 있겠습니까? 예가르 경과 함께 그날이 찾아오길 기대하지요. 그럼 모쪼록 남은 길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루칸 대족장님.”

하워드와 예가르는 가루칸뿐만 아니라 다른 오크 전사들에게도 예를 표하며 돌아섰다.

그렇게 상행으로 돌아가려는데 요한이 하워드와 예가르에게 말을 건넸다.

“두 분께서는 먼저 돌아가 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교역로의 남은 문제로 이 친구와 할 얘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런가? 알겠네. 그럼 우리 먼저 출발하도록 하지.”

그렇게 산길을 돌아가던 중, 하워드는 문득 뒤를 돌아 요한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주군?”

“아니, 아무것도…….

신비로움 때문일까?

아니면 순수한 호기심일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때때로 알파라는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문제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던가? 저런 특이한 사람이라면 내가 잊어버릴 리 없는데. 기분 탓인가…….’

“돌아가자.”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하워드는 상념을 털어 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그래서 할 말이 뭐냐?”

“편한 건 좋은데, 너무 편해진 거 아니야? 방금 전의 위엄이랑 기세는 다 어디 가고, 그냥 딴 사람이네 이건…….”

새끼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후비적거리며 묻는 가루칸의 모습에 요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내가 위엄 따질 사이는 아니지. 그나저나 할 말이 뭐냐. 이쪽은 빨리 식량을 부족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알았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할게. 너 나랑 사람 하나 가지러 가자.”

“……뭘 가리러 가자고?”

가루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주변에 있는 전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방금 이 녀석이 한 말 들었냐?”

“사람 가지러 가자고 하셨잖습니까. 근데 그거 납치하자는 소리 아닙니까?”

“그치?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가루칸은 한숨을 내쉬며 요한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봐, 형제. 물론 형제의 부탁이라면 내 물불 안 가리고 들어줄 의향이 있지만 그래도 오르크의 대전사인 이 몸께서 모양 빠지게 납치는 좀…….”

“형제들! 상단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상단이 떠나면 식량을 가지고 먼저 부족으로 돌아가 줄래? 내가 가루칸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요한의 부탁에 전사들이 가루칸을 쳐다보자 가루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가 있겠습니다.”

“아싸! 오랜만에 포식하겠구나!”

그렇게 전사들이 떠나고 자리에 요한과 가루칸만 남게 되자 가루칸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말해 봐. 네가 평범한 녀석을 납치하려고 날 꼬시는 것도 아닐 테고. 대체 어떤 녀석을 가지러 갈 생각인데?”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회귀하기 전에 헥토르에게 덤볐다가 개박살 나서 붙잡혔다는 얘기.”

기억을 떠올리던 가루칸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들은 기억이 있다. 그때 분명 헥토르가 가진 세 가지 보물 때문에 네가 헥토르를 이기지 못했다고 했지 아마?”

“그게 뭔지는 기억하고?”

“어디 보자…… 하나는 헥토르 본인이 손에 넣은 암흑의 힘이었고, 또 하나가 녀석이 고대 유적에서 수집한 일곱 가지 신기(神器)였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생각을 끄집어내던 가루칸이 눈을 크게 뜨며 마지막 남은 보물을 맞췄다.

“아, 녀석의 호위 기사였던 검은 머리의 무사! 분명히 동대륙에서 건너온 마교 뭐시기라고 했었는데 아마…….”

“그 녀석이 지금 어디 있을 것 같아?”

“어디 있는데?”

“이테란.”

“이테란? 그럼 너 설마?”

가루칸의 경악한 눈동자를 마주보던 요한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 * *

한 달 후.

“응? 저 사람들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이테란의 관도를 이동 중이던 상인들은 전혀 예상치도 못 했던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상단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쪽은 구르칸 산맥 쪽이잖아? 설마 저길 넘어온 건 아니겠지?”

“미쳤냐?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한 곳을 무슨 수로? 게다가 저만한 물량을 가지고 넘으려면 열 개가 아니라 백 개가 있어도 불가능할걸.”

“그럼 저 사람들은 어디서 온 건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사람들의 호기심 섞인 눈빛이 두 상단을 향했지만 정작 지금 이 현실을 가장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기도 했다.

“지, 진짜 구르칸 산맥을 넘었다…….”

“봐봐! 메마른 대지다! 여기만 넘어가면 코앞이 이테란이라고!”

“겨우 두 달 반 만에 이테란에 도착했다고? 세상에…….”

“두 달 반이 아니야. 처음에 우리가 지체했던 시간들만 제대로 속도를 냈다면 두 달 안으로 도착했을 거다.”

반 년짜리 거리를 고작 두 달 반 만에 주파해 낸 상인들의 경악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물론 그중에서도 누구보다 이 사실을 반색하는 사람은 바로 하워드와 예가르였다.

“알파 경!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건 기적이라고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교역로는 지금까지 그 어떤 교역로보다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킬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두 사람이 요한을 찾아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송했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정 그러시거든 돌아가시는 길에 제 형제들에게 그 말씀을 전해 주십쇼. 저보다는 구르칸 산맥의 제 형제들이 더 고생했을 테니까요.”

“이를 말이겠습니까? 구르칸 오크…… 아니, 구르칸 산맥의 전사들은 이제 저희의 동료입니다.”

“저는 여기서 제 임무를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테란으로 가시는 길은 저보다 여러분이 더 익숙하시겠지요.”

“알파 경께서는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는 구르칸 산맥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직 교역로에 관해서 정리해야 할 부분도 있으니까요.”

요한과의 동행이 여기까지라는 말에 두 사람은 아쉬움을 느꼈지만 계약상 더 호위를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는 길에 뵙도록 하죠.”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맡은 상단을 이끌고 관도에 합류하자 예상했던 것처럼 다른 상인들로부터 그들에게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요한은 그 모습을 멀리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저들을 통해 입소문이 나게 되면 구르칸 교역로는 순식간에 흥하겠지. 그렇게만 되도 당장의 자금 걱정은 덜어도 되겠어.’

두 상단과 헤어진 요한은 그 즉시 말을 구해서 빠르게 북쪽으로 달렸다.

훗날 헥토르의 보물 중 하나가 될 그의 호위 기사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다, 헥토르.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방법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이 은혜는 나중에 이자까지 듬뿍 얹어서 갚아 주마.’

* * *

사람들이 상상하기에 엘프의 숲이라고 하면 고요하고 평화로운 녹음을 떠올리기 십상이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이쪽이다! 엘프들이 이쪽으로 도망쳤다!”

“어서 쫓아! 한 놈이라도 도망가면 네놈들 모가지가 떨어질 줄 알아!”

숲 한쪽에서 난폭한 외침이 울려 퍼지자 살기등등한 노예 사냥꾼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도망친 엘프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엘프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을 부자로 만들어 줄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슉슉슉슉……!

풀잎이 우거진 나무 위에서 날아온 화살들이 정확하게 노예 사냥꾼들의 심장과 이마를 관통하였다.

생기를 잃은 사냥꾼들의 주검이 거칠게 나뒹굴자 뒤를 쫓던 동료들이 다급하게 나무 뒤로 숨었다.

“조심해! 경비대 놈들이다!”

“젠장, 어떻게 벌써 도착한 거지? 아직 놈들이 여기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을 텐데…….”

“어쩌지, 대장? 이대로 후퇴…….”

슈욱, 퍽!

후퇴를 언급하던 사내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아주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야말로 눈알 한 쪽만 어렴풋이 보일 정도였으나 엘프 경비대의 화살은 그런 사내의 눈알을 정확히 파고들어 뒤통수를 뚫고 나왔다.

노예 사냥꾼들의 대장, 우게르는 죽은 부하의 시신을 노려보다 침을 뱉었다.

“병신 새끼! 여기서 발견한 엘프들 숫자만 스무 마린데 그걸 포기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자고? 내가 미쳤냐? 하는 수 없지. 조금 아깝긴 하지만…….”

삐이익!

그는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불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부터 엄청난 수의 인기척이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 찬 짐승들이었다.

다른 노예 사냥꾼들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경비대원 한 명이 경비대장에게 빠른 속도로 접근하여 상황을 보고했다.

“놈이 피리를 불었습니다! 대장, 근방의 노예 사냥꾼들이 곧장 이곳으로 몰려들 텐데 어떡하죠?”

“긴장 하지 마. 우리 목적은 노예 사냥꾼의 섬멸이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놈들을 싸그리 쏴 죽이고 싶지만 우리가 우선해야 할 임무는 주민들의 피난을 돕는 것이다. 조를 반으로 나눈다. 1조는 내가 맡아서 놈들을 유인할 테니 2조는 칸트 네가 맡아서 피난민들이 도망친 흔적을 깨끗하게 지우도록.”

“예! 대장.”

칸트는 대장을 믿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1조는 경비대장인 에흐라데를 포함하여 경비대 중에서도 실력 있는 베테랑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저들이라면 충분히 임무를 마치고 복귀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에흐라데를 포함한 1조의 경비대는 적절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몰려든 노예 사냥꾼들을 효율적으로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니미! 대가리는 장식이냐! 이만한 숫자가 모여 있는데 꼴랑 경비대 수십 명을 상대로 뭐 하는 짓거리냐고!”

“그럼 네가 용감하게 나서서 해결해 보든가, 지도 숨어서 꼼짝 못 하는 주제에……!”

“씨부레! 전부 방패 들어! 화살을 막으면서 놈들을 압박한다!”

결국 화살 받이가 되고 싶지 않았던 노예 사냥꾼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고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에흐라데가 노리던 바였다.

푹푹푹푹……!

“크아악!”

“내 무릎!”

방패로 머리 위를 가리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나무 위를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경비대의 모습을 더욱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경비대들의 독무대였다.

비록 머리나 심장을 맞춰 즉사 시킬 수는 없었지만 하반신을 맞춰서 사냥꾼들의 발을 묶어 둘 수는 있었다.

게다가 화살촉에 바른 독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그대로 중독사할 터였다.

당연히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예 사냥꾼 대주들은 복장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개 같은! 뭐 해? 부상자들을 뒤로 옮겨!”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천천히 전진해라! 놈들에게 화살길을 주지 말라고!”

“이번에 나타난 놈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잖아! 혹시 이러다 다 놓치는 거 아니야?”

노예 사냥꾼이라고 해서 100%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요즘 들어 성공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을 뿐, 예전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실패하면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이번에 발견된 엘프들의 무리만 스무 명.

전부 처분한다면 못해도 조그마한 영지의 작은 성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눈뜨고 도망치는 꼴을 지켜봐야 할 판이었다. 엘프 경비대가 노리는 바도 그러했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고 간격을 유지해!”

“놈들을 전부 죽일 필요는 없다. 무모하게 돌격하는 놈들만 노려서 병신을 만들어 줘라!”

그들은 그저 동족들이 도망칠 시간만 벌면 충분했고 그들 또한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경비대는 무사히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들을 노리고 있던 숨은 사냥꾼은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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