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44화 (44/150)

44. 출항

정말로 오랜만에 엘프의 숲이 활기를 되찾았다.

“아아…….”

“여보!”

“아빠!”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가족들과 재회한 엘프들은 그날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지켜보던 다른 엘프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진심으로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그사이, 요한은 깨끗한 갑옷으로 갈아입고 두나스, 도셉과 함께 엘라임을 찾았다.

얼굴을 투구와 면갑으로 가리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엘프들은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와아아아아아!

하지만 인간이라면 치를 떠는 엘프들조차 그에 대해서는 호감과 환호성으로 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행한 엘프 전사들이 요한이야말로 이번 탈환 작전의 영웅이라 증명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도셉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이 숲에 살면서 인간을 환대하는 날이 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소.”

“엘프라고 다 같은 엘프가 아닌 것처럼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은 아니야. 그 편견을 깨지 못하면 똑같은 과거를 반복할 거다.”

“명심하지요.”

도셉은 요한의 대꾸에 살짝 고개를 숙인 뒤 그와 함께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알파 경. 저는 이 숲의 대장로인 루비리드라고 합니다.”

“알파입니다. 고결한 숲의 수호자라는 하이 엘프를 직접 뵐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와……. 진짜 말도 안 되긴 하네. 소문이 사실보다 축소된 거였어.’

요한은 한순간 심장이 술렁거릴 정도로 혼을 쏙 빼놓는 루비리드의 아름다움에 애써 심장을 진정시켰다.

엘프의 미모가 반딧불이라면 하이엘프의 아름다움은 달과 비견된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요한은 그 속설이 사실이었음을 오늘 처음 확인할 수 있었다.

“감사는 저희가 드려야죠. 저희 동족들을 구출해 주시고 저희 품으로 돌려보내 주신 은혜는 결코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에이, 설마 그렇게 은혜라는 말씀으로 퉁 치시려는 건 아니죠?”

요한의 능청에 루비리드는 살짝 미소를 그리며 눈앞의 있는 상자를 들어 요한에게 가져갔다.

“이게…….”

“말씀하신 정령의 눈물입니다.”

상자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요한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정령의 눈물은 톡 까놓고 말해서 껍질이 하얀 사과와 비슷했다.

향이 놀라울 정도로 향긋하다는 것 빼고는 딱히 차이점을 못 느낄 만큼.

“과육을 그대로 섭취해도 상관없고, 씹기 불편하다면 갈아서 먹여도 되지만, 온전히 하나를 다 먹어야 그 효과를 확실히 볼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건 잘 쓰도록 하죠.”

“그런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요한은 루비리드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면 그렇게 인간이 깊은 어둠을 끌어안고…….”

“…….”

요한은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루비리드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털썩…….

“대, 대장로님!”

“뭣들 하느냐! 어서 대장로님을 모시지 않고!”

루비리드가 말을 하는 도중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장로들이 서둘러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장로들은 요한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전했다.

“미안하오. 대장로님께서 이러신 적이 없으셨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서 대장로님을…….”

그렇게 장로들이 루비리드를 이송하자 두나스와 도셉이 요한에게 다가왔다.

“미안하오. 많이 놀라셨소?”

“나는 괜찮지만 대장로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절대 아무 짓도 안 했다.”

요한의 말에 두나스는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누구도 그대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오. 이는 모두 생명의 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생명의 눈?”

“생명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요. 그 눈을 가진 하이 엘프만이 정령수를 관리하는 대장로가 될 수 있소.”

‘그럼 그 생명의 눈이란 걸로 내 본질을 꿰뚫어 봤다는 건가?’

요한이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게 말을 하다 말고 기절할 만큼 충격적이었다는 거야? 거참 너무하네…….”

“너무한 게 그대의 본질인지, 아니면 대장로님인지는 그대의 본질을 꿰뚫어 본 그분만이 아시겠지.”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야? 설마 계속 여기서 버티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의 관문이 털렸다. 라마콘 왕국은 대외적인 체면치레 때문에라도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할 거다. 어쨌거나 명분이 생긴 셈이니까.”

“지금 우리를 걱정해 주는 것이오?”

도셉이 살짝 놀라서 묻자 요한이 대꾸했다.

“조만간 우리 배가 이곳 북쪽 해안 절벽으로 도착할 예정이다. 절벽이 가파르고 높긴 하지만 양쪽에서 협력만 수월하게 한다면 이동하지 못할 것도 아니더군. 그래서 말인데, 원한다면 피난을 바라는 엘프들을 도와줄 수도 있다만?”

“마음은 고마우나 아마 피난을 바라는 동족은 없을 것이오. 엘프들은 숲의 아이들이자 정령수의 백성들이오. 정령수가 이곳에 존재하는 한, 우리가 먼저 정령수를 버리고 떠나는 일은 없소. 다만 정말로 피난을 바라는 동족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한번 공개적으로 얘기는 꺼내 보리다.”

“그런가. 알았다.”

요한은 지금까지 그게 궁금했다.

어째서 엘프들이 이 고립된 숲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인지, 약탈을 당하면서도 참고 버티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마땅한 도주로가 없기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두나스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이들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 정령수가 자라고 있는 동안은 말이다.

* * *

이튿날 오후.

한척의 거대한 범선이 돛을 접고 노의 힘만으로 천천히 엘프의 숲 북쪽 절벽으로 조용히 접근하고 있었다.

“천천히! 신중하게 접근해라!”

“암초에 부딪히면 끝장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 새끼들아!”

그러나 일정 거리를 경계로 더 이상 배는 절벽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바다 위에 닻을 내렸다.

“이 앞은 암초투성이라 더 이상 이 정도로 큰 범선이 접근하는 건 위험합니다. 고객님.”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작은 배로 조금씩 실어 나르도록 하죠.”

“배를 내려라!”

복면의 사내가 말하자 선장이 즉각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선원들은 배 측면에 고정된 비상용 보트들을 조심스럽게 바다 위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은 보트 수척이 절벽 가까이 다가가자 촘촘한 그물 사다리가 절벽 아래쪽으로 쭉 떨어지더니 짐을 가득 짊어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심해서 내려가! 헛디디면 죽는다!”

“새 삶을 살기도 전에 죽을 순 없잖아. 안 그래요들?”

“조심하세요, 모두!”

요한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도, 제 삶을 선택한 사람들도 모두 새로운 인생에 부푼 꿈을 안고서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보트에 올랐다.

그렇게 보트가 절벽과 범선을 열심히 왕복하는 사이, 어느덧 범선에는 꽤 많은 사람들과 노예 상단에서 챙겨 온 재물들이 쌓여 가기 시작했다.

꿀꺽…….

“선장님. 저것 좀 보십쇼. 저게 다 얼마입니까? 저들이 보따리에 한가득 짊어지고 있는 게 전부 금화라고요, 금화!”

“…….”

부선장이 찾아와 선장 델커스에게 조용히…… 그러나 힘주어 호들갑을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봇짐에서 금빛이 흘깃흘깃 보일 때마다 선원들도 모두 혹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애초에 재물이랑 사람을 옮기고 싶다는 의뢰긴 했지만 이 정도라는 말은 안 했잖습니까? 선장님, 이거 우리가 딱 한 번만 눈 감으면 팔자가 달라진다니까요?”

“……저녁에 조용히 애들 소집해. 단단히 무장시켜서.”

“옙!”

결국 델커스는 품어선 안 될 욕심을 품고 말았다.

* * *

“숲의 모든 이들에게 행운을 빕니다. 그럼 이만.”

“당신의 앞길에 정령들의 가호가 함께 하길…….”

범선으로 사람과 재물의 이동을 전부 마친 요한은 마지막으로 루비리드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닻을 올리고 돛을 펼쳐라!”

“출항한다!”

요한까지 실은 범선이 바람을 타고 빠르게 해수면을 미끄러지는 동안, 요한은 뱃머리 위에 서 있었다.

그렇게 바람을 만끽하고 있으려니 배를 끌고 온 또 다른 복면인이 요한에게 다가왔다.

요한은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고생 많았어. 이만한 크기의 범선을 용케 구했네?”

“알파 경에 비하면 고생이랄 것도 없지요.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구출한 노예들과 재물의 양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아서요.”

“좀 많긴 하지? 사실 나도 좀 놀랐어. 설마 그렇게 많이 쌓아 두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승선하기 시작한 이후로 선장들과 선원들의 분위기가 좀 변한 것 같더군요.”

요한은 또 다른 복면인…… 윌라드의 얘기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할 일을 하면서도 은근슬쩍 자신들의 눈치를 살피던 선원들은 요한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히 고개를 돌리며 하던 일에 집중하였다.

씨익.

그 모습에 가면 속 요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 *

그날 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떠 있는 범선 위에서 욕망이 꿈틀거렸다.

“다들 모였지?”

“예, 선장님!”

델커스는 탐욕에 절어 있는 선원들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신도 부하들과 똑같은 눈을 하고 있겠지.

“사람들은 노예로 팔아야 되니까 최대한 상하지 않게 두 녀석만 죽여서 바다에 버린다. 신속하게 움직여. 놈들이 깨서 반항이라도 하면…….”

“골치 아프지. 가능하면 자고 있을 때 죽여서 바다에 버리는 게 편하긴 해.”

“……!”

델커스는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요한을 보고 기겁을 한 것이다.

“너, 넌……!”

“그러니까 욕심도 사람 봐 가면서 부렸어야지.”

촤악!

요한이 검을 휘두르자 델커스의 목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그 순간.

파지직, 파직!

“뭐, 뭐지?”

“사람의 몸에서 왜 빛이…….”

“쫄지 마! 놈은 한 명이고 숫자는 우리가 더 많다고! 죽여 버려! 저놈만 죽이면 노예와 재물들은 전부 우리 거다!”

요한에 대한 두려움을 탐욕으로 씻어 버린 그들은 살기를 피우며 요한을 덮쳤다.

거친 바다와 씨름하고 해적들과 싸우며 생사를 넘나드는 그들의 전투력은 평범한 병사들과 차원이 달랐다.

물론 지금은 그들이 해적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하지만 상대는 요한이었다.

번쩍!

“으악!”

“누, 눈이……!”

요한이 뇌전을 발산하며 강렬한 빛이 폭발하자 깜깜한 밤에 눈이 적응되어 있던 선원들은 본능적으로 눈을 가렸고…….

그걸로 전투는 끝이었다.

촤촤촤촤!

“헉……!”

간신히 시야를 되찾은 선원 한 명이 눈을 껌뻑거리다가 기겁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제외한 동료들이 전부 처참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전한 시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사지가 잘려 나갔으며 흘러나온 내장과 핏물이 갑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살고 싶으면 사람들 일어나기 전에 얼른 치워라. 그러라고 살려 준 거니까.”

“예, 옙!”

빠릿하게 일어난 마지막 선원은 바닷물을 길어 갑판을 몇 시간 동안 혼자 청소했다.

자신이 치우고 있는 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란 사실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청소가 끝나자 요한은 선원을 약속대로 살려 주었다.

다만…….

“보, 보트 하나만 가져가라고요?”

“그럼 헤엄쳐서 갈래?”

선원은 슬쩍 고개를 돌려 바다 밑을 바라보았다.

이미 사람의 피와 내장 냄새를 맡고 상어들이 개떼처럼 몰려든 상태였다.

저기에 맨몸으로 다이빙하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결국 요한의 마지막 배려로 작은 보트와 함께 바다 위에 떨어진 선원.

물도, 식량도 없는 보트를 타고 그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까웠지만…….

퍽!

“아이고, 운도 없네. 아니, 운이 좋은 건가? 괴롭게 천천히 죽어 가든 것보다야 저게 나을지도…….”

“아, 안 돼! 살려 주세요! 사람 살려!”

몰려든 상어 떼가 실수로 보트를 때리는 바람에 보트에 구멍이 난 모양이었다.

결국 가라앉는 보트와 함께 마지막 선원도 상어의 먹이가 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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