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뜻밖의 기연을 얻다
“그 정체불명의 인물과 무슨 얘기를 나누는 것 같던데, 혹 아는 사이였소? 마 경.”
압둘라는 돌아온 마자현에게 요한과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다. 그에 마자현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저에게 이걸 건네주면서 제안을 하더군요.”
“그 상자는 무엇이오?”
“내 딸아이의 병을 치료할 약이 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
압둘라는 적잖이 놀랐다.
“그게 사실이오?”
“저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남자가 말하기를 이 약을 먹고 딸아이가 병을 이겨 내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으니 믿어 볼 수밖에요.”
“오늘 처음 본 정체불명의 사내가 중 약인지 독인지도 모를 수상한 것을 딸에게 먹이겠다는 말이오, 지금?”
“하면 압둘라 대인께서는 지금 당장 우리 소연이를 고칠 수 있다는 뜻입니까? 대륙 풍토병이라는 희귀병 외에는 대인께서도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압둘라가 말을 삼키며 시선을 피하자 마자현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3년째 딸아이가 병상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해가 갈수록 병이 나아지기는커녕 야위어가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심장이 뜯겨져 나가는 기분입니다. 대인께서도 이 나라의 아버지이자 공자들의 아버지인 만큼 내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 믿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수상쩍은 것을…… 만에 하나 마 아가씨가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때는 그자와 관련된 것들은 개 한 마리까지 모두 죽이고 마지막에 그자를 찾아가 사지를 찢어 죽일 겁니다. 다만 내 딸을 일부러 해하고자 찾아와 이런 약을 건네줄 것 같은 자는 아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압둘라의 성에 도착한 두 사람.
마자현은 압둘라와 자기 부녀를 위해 허락해 준 호화스러운 별관으로 약을 들고 향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압둘라에게 모든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총관이 찾아왔다.
“경기장에 난입해서 마자현과 싸웠던 복면인 말입니다. 아무래도 뇌전의 마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전설이…… 현실이 되었다는 건가?”
“예, 그런 자가 압둘라 님과 극히 소수밖에 모르는 마자현의 사정을 알고, 심지어 치료법조차 발견되지 않은 풍토병의 치료약을 들고 마자현을 찾아왔다는 건…….
“아무래도 그 약이 진짜일 가능성이 높겠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별관을 바라보는 압둘라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 * *
다음 날.
“으응…….”
“소, 소연아! 정신이 들어? 아빠야. 아빠 알아보겠어?”
“아……빠?”
딸아이의 손을 꼭 잡고 곁에서 쭉 지켜보던 마자현은 딸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뜨자 깜짝 놀라 딸의 이름을 불렀다.
“아빠다. 히이…….”
“아아…….”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딸아이의 얇은 미소에 마자현은 눈물을 흘리며 작고 깡마른 소연이의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났을까?
“옳지. 옳지! 잘한다! 한 걸음만 더!”
“하아…… 하아…….”
마소연은 아빠를 향해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힘겹게 걸음을 내디뎠다.
반쯤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신도 못 차리던 며칠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만큼 엄청난 회복 속도였다.
“딱 한 걸음만 더…… 그렇지! 잘했다. 잘했어. 우리 딸!”
“헤헤!”
노력한 끝에 자신의 품에 안겨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더니 히죽 웃어 보이는 딸의 모습에 마자현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아빠 또 울어? 아빠 혹시 울보야?”
“아빠 안 울거든?”
그때였다.
“하하하! 요새 들어 마 경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구려. 무인으로서의 마 경도 멋있지만 아버지로서의 마 경도 여전히 멋있는 것 같소.”
“오셨습니까, 대인.”
“안녕하세요.”
마소연이 포권을 취하며 귀엽게 고개를 숙이자 압둘라가 소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우리 소연이. 열심이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이제 며칠 후면 이 아저씨보다 훨씬 더 건강해지겠어. 하하하!”
“모두 대인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이지요.”
“내가 한 게 뭐 있겠소. 그저 경의 깊은 정성이 차가운 신의 마음을 움직인 게지. 준비는 모두 마쳐 두었소.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떠나도 좋소이다. 다만 내 개인적인 의견이라면 소연이가 조금 더 회복한 뒤도 나쁘지 않을 듯싶소만.”
“배려는 감사드립니다만 약조한 바가 있어 이제 그만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저희 부녀를 보살펴 주셨던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해 준다면 내 짧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소만…….”
마자현과 마소연 부녀는 그렇게 압둘라의 배웅을 받으며 요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을 떠났다.
* * *
“뭐야, 이 상황은?”
가루칸은 요한과 함께 숨어서 성을 떠나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미간을 찌푸리며 요한에게 물었다.
“잘된 거지. 우리가 나설 일이 사라진 거니까. 압둘라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네.”
“잘되긴! 결국 너만 재미보고, 난 이게 뭐냐?”
“너무 실망하지 마라. 조만간 싫어도 질리게 붙게 될 날이 올 테니까.”
“누구? 그 녀석이랑? 진짜냐? 이번에도 구라 치면 그때는 너라도 팬다!”
조만간 마자현과 싸울 수 있다는 말을 듣자 방금 전까지의 뽀로통한 투정은 어디 가고,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가루칸의 모습에 요한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아무튼 우리도 돌아가자.”
“얀마! 약속은 하고 가야지!”
* * *
그날 밤.
요한은 이테란 외곽의 버려진 마을에서 마자현과 접촉했다.
요한이 그가 머물고 있는 크림포드 상단에 그의 앞으로 밀서를 보냈기 때문이다.
“속하 마자현이 주군을 뵙습니다.”
“…….”
요한은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한 마자현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하였다.
‘설마 이런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마주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마자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던 상대는 세상에 오직 한 명, 헥토르뿐이었다.
요한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딱히 부럽다거나 근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너도 이런 기분이었냐, 헥토르.’
마자현이 자신의 검이 된다는 것.
그리고 온전한 충성을 받는다는 것.
그가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든든하고 가슴 벅찬 일이었던 것이다.
‘너를 지키던 검으로 이제는 네놈의 목을 썰어 주마. 모가지 잘 씻고 기다려라, 헥토르.’
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건 헥토르의 사람이 될 인재를 자신이 먼저 뺏었다는 그 사실이었다.
“주군?”
요한이 말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마자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미안. 널 조용히 불러낸 건 다름이 아니라 압둘라 때문이다. 네가 내 사람이 된다고 했을 때 내가 예상한 압둘라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너라는 사람을 무리하게 욕심을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손익을 확실히 계산해서 너를 순순히 보내 주는 것이었지. 압둘라는 현명한 선택을 한 듯한데, 그렇다면 그가 너에게 전한 말도 있을 거야. 안 그래?”
“역시 주군의 혜안은 경이로우십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압둘라 대인은 저에게 주군과의 자리를 은밀히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뇌전의 마나의 주인이 그와 버금가는 불의 마나 주인을 수하로 거두어들였다.
단순히 손익을 계산해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압둘라의 생각이었을 터였다.
‘전형적인 장사꾼의 마인드지. 나로서는 나쁘지 않지만.’
구르칸 오크족들처럼 서로 운명을 함께하는 끈끈한 혈맹이 아닌, 편의에 따라서 서로를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관계라면 요한으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이테란은 그만큼 이득을 취할 부분이 많은 도시였으니까.
“알았다. 그 일에 관해서는 차후 따로 압둘라 경을 만나 보도록 하지.”
“아 참, 그리고…….”
마자현은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요한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지?”
요한이 책을 가볍게 넘겨보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잉크의 마름새로 보아 작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책임을 알 수 있었다.
“제가 몸담았던 마교의 14대 사조이신 뇌천마성의 심득이 담긴 비급입니다. 뇌천마성께서는 주군과 마찬가지로 뇌기를 받들어 천하를 일통하신 당대 최강의 무인이시자 고금제일무인을 거론할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언급되시는 분이십니다.”
‘아……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도 헥토르와 자주 전장을 누비다 보니 그의 호위 기사인 마자현과도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그때 한번 스쳐 가듯 뇌천마성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본 기억이 떠올랐지만 거기까지였다.
그의 심득이 담긴 책을 지금처럼 선물한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요한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헥토르가 나를 팽할 생각이었다면 마자현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굳이 적이 될 나에게 이런 비급을 선물할 이유가 없었을 거고.’
하지만 지금 마자현은 온전히 자신의 사람이다.
그래서 비급도 선물한 것이고.
“그런데 이 귀한 걸 어디서……. 마교에서 가져온 것도 아닐 테고.”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걸 책에 옮겨 담아 봤습니다.”
“응?”
요한은 다시 한번 책을 훑어보았다.
동대륙의 언어로 쓰여 있어 뜻은 알 수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복잡한 글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걸 전부 머릿속에 외우고 있었다고?”
“뇌천마성 사조의 심득은 설령 뇌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교의 보물임은 틀림없습니다. 저 역시 수십 번이나 비급을 탐독한 덕분에 암기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아직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많은 양을…….”
“참고로 비급은 총 상중하권의 세 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지금 드린 것은 상권이고, 조만간 중권과 하권 역시 완성하여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대륙의 언어로 번역할까 하다 자칫 사조의 심득을 제가 곡해할 수도 있다 판단하여 원문으로 적어 드리는 것이니 필요하시다면 동대륙의 언어도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요한이 너무 놀라 커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마자현이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주군. 혹시 제가 쓸데없는 짓을 한 게 아닌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무튼 그쪽 대륙에서 역사상 가장 강했을지도 모르는 무인의 심득이 담긴 비급인 거잖아? 심지어 나와 똑같은 뇌전의 마나를 다뤘던 사람이고. 그런 사람의 비급이라면 나한테는 거의 국가 하나의 가치와 맞먹는 보물인데, 이렇게 쉽게 가져도 되나 싶어서…….”
“그 비급이 주군께는 국가 하나의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주군께서는 제게 세상 전부나 마찬가지인 딸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오히려 아무리 갚아도 부족할 정도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렇게 요한은 마자현과 더불어 생각지도 못했던…… 어쩌면 마자현 이상의 가치를 지녔을지 모를 뜻밖의 기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