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하워드의 재능
“전설 속의 아바타가 출현해? 그것도 이테란의 지하 콜로세움에서?”
수정 구슬 속, 그림자의 보고를 받던 가니온 유스터프 공작은 미간을 구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림자의 보고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번개와 불을 쓰는 투사들의 싸움을 목격한 관객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불을 쓰는 투사는 압둘라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동대륙 출신의 무인이라고 합니다.
“놈에 대해서는 나도 조금 알고 있다. 듣자 하니 황태자 전하께서 눈독을 들이던 강자라고 하던데…….”
-이전까지는 딸과 함께 압둘라에게 의탁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딸과 함께 두 사람 모두 종적이 묘연한 상황입니다.
이 부분은 하이든이 직접 개입하여 두 사람을 은닉시켜 준 덕분이었다.
“다른 쪽은? 정작 문제가 되는 건 그 현실에 나타난 전설의 존재이지 않나.”
-콜로세움에 출현했을 당시에는 복면과 로브로 정체를 가리고 있어 쉽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복면과 로브란 말이지……. 당시 알파의 행적은?”
-공식적으로는 구르칸 교역로의 완공 때문에 구르칸 산맥에서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녀석의 알리바이를 확실하게 증명해 줄 사람이 없는 셈이로군.”
거기에 그림자가 첨언을 덧붙였다.
-한 가지 더 보고드리자면 도모스의 총관으로부터 3년 전에 아바타로 추정되는 인물이 도모스에게 진상되던 뇌물을 약탈해 갔다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들키면 목이 잘릴까 봐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다 하더군요.
하지만 알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도모스의 측근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하여 그림자가 미인계를 사용하였고 거기에 총관이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이다.
“그렇다면 알파가 결국 아바타라는 뜻인데…… 그만한 힘을 가진 녀석이 교역로를 손에 넣고 거기다 불의 마나까지 다루는 동대륙의 무인과 접촉했다는 건가? 그 무인과 딸의 종적이 묘연해진 것도 알파와 접촉한 직후겠지?”
-그렇습니다.
‘분에 넘치는 힘과 돈을 함께 손에 넣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정도면 단순히 몰락한 상단이나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서라고는 보기 어려운데…….’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하게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하워드 크림포드에 관한 소식입니다.
“하워드 크림포드라면 현재 이테란에 있다고 들었는데?”
-예, 평소라면 이테란에서 향신료와 실크, 공예품 등의 사치품을 위주로 구입했을 크림포드 상단이 이번에는 병장기와 노예들을 대거 구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현재 구입한 노예들의 숫자는 5천이며 앞으로 5천을 더 구입할 예정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합이 1만의 사병을 더 늘이겠다라…….”
-새로운 교역로를 이용하면서 얻은 이익으로 계획을 좀 더 앞당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대로라면 저희 예상보다 백작가의 사병이 최소 5만 이상은 더 확보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림자의 보고에 가니온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젊은 기린아가 명을 재촉하는구나. 녀석이 계획을 앞당긴다면 우리도 계획을 앞당기는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 구르칸 산맥에서 하워드를 처리하게. 새로운 교역로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알파의 반응도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과연 우리가 써먹을 수 있는 놈인지, 아니면 싹을 밟아야 하는 놈인지 말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3개월간의 무역이 끝나고 구르칸 산맥을 다시 방문한 크림포드 상단을 요한이 환영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백작님. 원하시는 결실은 많이 거두셨습니까?”
“새로운 교역로 덕분에 아주 많은 과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알파 경의 덕분입니다. 하하하하!”
빈말이 아니라 하워드는 정말로 기분이 많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이 많은 노예들을 전부 어디다 쓰실 생각이십니까? 저택 일손이 이 정도로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요?”
“크흠! 알파 경에게만 내 특별히 말씀드리지요. 최근 대륙의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혹시 경도 느끼셨습니까?”
“그런가요?”
“전쟁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분쟁이 빈번하던 국가들의 알력다툼조차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평화가 찾아왔다고 들뜨는 이들도 많지만 내가 보기엔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 하시면……?”
“분쟁에 소비할 힘까지 비축해 두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더 큰 전쟁에 쓰기 위함이지요. 그것도 한두 나라가 아닌, 대륙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이유가 전 두렵습니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음모가 그 속에 도사리는 것 같아서요.”
“……!”
요한은 굳은 얼굴로 형 하워드를 쳐다보았다.
하워드의 얘기에서 상상도 못 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혹시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확실히 신빙성 없는 얘기긴 하지요. 그래도 전 제 분석과 수하들의 정보를 믿고 싶습니다. 막상 일이 터진 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하하하!”
요한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착각했구나! 형이 암살당한 이유는 단순하게 유능해서만이 아니었던 거야!’
대륙의 정세를 꿰뚫어 보는 눈.
거기에 숨은 음모까지 헤아려 대비책을 강구하는 모습까지.
하워드는 유능한 정도를 넘어서 자칫 제국의 비수가 될 수도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놈들도 그걸 알아보고 형을 제거했던 거였어.’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꾸 뚫어지게 쳐다보시는지…….”
“아뇨, 그냥 뿌듯해서요.”
“예? 그게 무슨…….”
“요한 도련님이 소백작님의 의중을 아셨다면 그럴 것 같다는 얘깁니다. 제가 만약 요한 도련님이었다면 이렇게 자랑스러운 형이 내 형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을 겁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물색없이 요한 도련님의 얘기를…….”
“아뇨,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저도 감사합니다. 마치 그 녀석한테 직접 들은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하하하하!”
“…….”
요한은 뜨끔한 심정을 숨기면서 역시나 징그럽게도 촉이 좋은 형을 피해 앞장서 걸었다.
* * *
그날 밤, 모두가 잠자리에 든 야심한 시각.
한 병사가 누군가를 찾아와 은밀하게 보고를 하였다.
“알파가 숙소에 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은밀하게 거사를 진행한다면 녀석이 눈치채기 전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알았다.”
병사에게 보고를 받은 기사는 천막을 나와 하워드가 자고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하워드의 천막은 아직까지도 등불의 은은한 빛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 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며 접근하던 자의 얼굴을 비쳤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그자의 정체는 하워드의 호위 기사 수장인 노빌이었다.
“주군, 접니다.”
“노빌인가? 들어오게.”
하워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노빌이 안으로 들어왔다.
노빌의 눈에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하워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슬쩍 자신의 검으로 향했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하워드는 강하다.
싸우면 물론 자신이 이기긴 하겠지만 일대일이라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련이라면 상관없지만 암습이라면 그 자체로 실패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상부의 명령은 평범한 암살이 아니라 구르칸 오크족의 짓으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즉, 설령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상황과 실력이라 해도 그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직까지 안 주무시고 일하시는 겁니까?”
“아직 정리가 덜 된 장부가 있어서 말일세. 이것만 정리하고 잘 생각이었네. 그런데 자네는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마누라처럼 잔소리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이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심하게 훼손된 시체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체의 옷가지에 저희 상단의 표식이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 했던 노빌의 보고에 장부를 정리하던 하워드의 손이 멈추며 딱딱하게 굳은 그의 시선이 노빌에게 향했다.
“그게 사실인가?”
“예, 알파 경이나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기 전에 주군께서 먼저 확인하고 결단을 내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니까요.”
노빌의 말처럼 이곳, 구르칸 산맥 교역로에서 상단 사람의 시체가 발견된다면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며 큰 소란이 일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교역로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면 이는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가지. 그곳이 어딘가?”
“모시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워드가 노빌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은 알지 못했다.
* * *
노빌을 포함한 호위 기사 열 명과 동행한 하워드.
“횃불은 근처에 있을지 모를 야행성 몬스터들을 자극할 수 있으니 끄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이유가 조금 이상했지만 하워드는 노빌을 믿고 어둠 속에서 그들의 뒤를 열심히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수림 안쪽으로 들어갔을까?
“시체가 도대체 어디 있길래 이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건가, 노빌 경?”
“다 왔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앞서서 걷던 노빌과 기사들이 멈춰 서서 대답하자 하워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시체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대체 어디에 시체가…….”
스릉 스릉 스릉.
푹푹푹푹!
“커헉!”
“어, 어째서…….”
날카롭고 차가운 소성이 하워드의 고막을 파고들기 무섭게 노빌을 포함한 몇몇 호위 기사들이 동료들의 심장을 검으로 꿰뚫었다.
노빌을 포함하여 남은 다섯 명의 호위 기사들은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을 죽였음에도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하워드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하워드는 대충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발견된 시체가 나였던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주군. 이 죗값은 목숨으로 갚도록 하겠습니다.”
“이유가 뭔가?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보아하니 돈이 목적은 아닌 것 같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라면…… 혹시 우리나라에 숨어 있는 어둠과 관련이 있나?”
“……쳐라.”
노빌의 나직한 명령이 떨어지자 네 명의 호위 기사들이 빠르게 하워드를 향해서 돌진하였다.
‘젠장…….’
옆구리를 더듬어 보니 손이 허전했다.
장부 정리를 하다가 급하게 따라 나온 탓에 검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실력 좋은 호위 기사들과 동행하다 보니 더욱 느슨해진 감도 있었다.
설마 그 검이 오늘 자신을 향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워드는 곧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나무 작대기를 쥐어 들었다.
아무리 하워드의 검술이 뛰어나도 나무 작대기 하나로 네 명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절대로 목숨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후웅…… 촤악!
난데없이 하워드의 앞을 가로막은 거한이 가지고 있던 도(刀)를 휘두르자 한 줄기 붉은 섬광이 기사들의 허리를 그대로 가로질렀다.
화르륵!
그 순간 섬광을 따라 불길이 터져 나오면서 반으로 잘려 죽어 버리는 네 명의 호위 기사들…….
몸통이 잘려 죽은 기사들은 자신들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숨을 거두었다.
“너, 너는……!”
하워드는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의문의 기사를 살펴보았다.
복장을 보아하니 자신의 구입한 노예 중 한 명 같은데, 이만한 실력을 가진 노예를 구입했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건 자신과 모든 일과를 함께 한 노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네놈은 누구냐!”
팟!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몸을 날려 도를 휘두르는 거한의 노예.
노빌은 상당한 강자다.
오러 익스퍼트 초급에 달하는 실력자로 검에는 옅은 오러가 무장되어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순순히 당해 줄…….”
노빌은 사내를 향해서 자신의 전력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서걱!
하나 붉게 달아오른 노예의 도는 그런 노빌의 검과 몸통을 그대로 일도양단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쩌억…… 털썩!
몸통이 양쪽으로 쪼개져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노빌.
그의 가슴에 달린 크림포드 상단의 문양이 피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차에 하워드의 암습을 꿈꾸었던 다섯 호위 기사들은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