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50화 (50/150)

50. 그림자의 진실

“하워드의 암살에 실패했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구슬 속 그림자의 사죄에 가니온은 고개를 저었다.

제국은 실패에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었다.

실패를 통한 배움은 성공을 통한 배움보다 크다는 것이 황가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실패한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래서 하워드는?”

-오늘 백작령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도착하기 전에 한 번 더 기회를 엿볼까요?

“아니. 암살이 실패했다는 건 녀석 다름대로 대비가 있었다는 뜻이겠지. 지금부터는 섣불리 건드리지 말고 녀석을 주시하도록. 엉덩이에 불이 붙은 하워드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보고하란 말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알파가 하인드 크림포드 백작과 함께 왕도로 떠났다는 소식을 혹시 들으셨습니까?

“두 사람이 왕도로? 그보다 알파는 하워드와 동행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산맥을 벗어나 히로벤칼 자작령에 도착하자마자 알파가 먼저 백작령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워드와 동행하지 않고 서둘러서 백작령으로 먼저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니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교역로 때문일 수도 있겠군. 이번 상행으로 이미 교역로의 안전은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고 왕실파 귀족인 하인드 백작이라면 왕실 직속 상단의 교역료 변경을 국왕에게 간언할 수도 있겠지.”

-감히 첨언하건데, 왕실의 재력이 늘어나는 건 귀찮은 일이 아닌지요.

“아무튼 그 건에 관련해서는 내가 알아서 하지. 너는 명령받은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예, 하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구슬 속 그림자가 사라졌다.

* * *

“그래서, 하워드는 무사한 것이냐?”

“예, 아버지. 지금도 그 녀석이 암중에서 호위하고 있을 테니 적어도 그동안은 안전할 겁니다. 저 같은 녀석이 작정하고 노리지 않는 한은 말이죠.”

“하하하!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요한.”

“뭐, 사실이니까요.”

요한과 하인드는 같은 마차를 타고 왕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차 안에는 요한이 오러막을 펼쳐 놔서 밖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고생했다. 하워드가 이번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네 덕분이다. 설마 노빌이 그림자였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지.”

“그게 그림자들의 가장 큰 무서움입니다. 가장 믿고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적으로 돌변하는 셈이니까요.”

“그림자란 무엇이냐? 보아하니 놈들은 단순한 첩자 같은 게 아닌 모양이다만…….”

하인드의 질문에 요한이 되물었다.

“그림자에 대해 설명하려면 먼저 트리스탄 제국의 진실을 알아야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트리스탄 제국에 대해서 혹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야 모를 수가 없지. 천 년 전에 존재했던 대륙 최강의 국가이자 대륙의 1/3을 차지했던 대제국이 아니더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당시 트리스탄 제국의 국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륙 최강의 수준이었고 그에 반해 다른 왕국들의 내정은 최악의 수준이었다고 지금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트리스탄 제국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통일 전쟁을 시작하기 그보다 좋은 때가 없었을 테고.”

“하지만 결과는 아버지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하인드가 대답했다.

“확실히 트리스탄 제국군은 강하고 두려운 존재들이었다고 하지. 그들은 파죽지세로 나를 왕국들을 점령해 들어갔고 수많은 왕성에 제국군의 깃발을 꽂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책에서 봤다만 워낙 트리스탄 제국에 관한 얘기가 금기시되는 터라 나도 알고 있는 게 많지는 않구나.”

요한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며 아버지를 이해했다.

“한 민족이라는 건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유대감을 발휘해 생각지도 못 한 기적을 일으키기 마련이죠. 아무리 서로 물고 뜯고 싸우다가도 외세의 침략에는 단결하여 생사를 걸고 싸우는 나라도 많았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서로 동맹을 맺고 더 큰 힘을 갖기도 하고요.”

“그들에 의해 통일이 좌절되었다는 뜻이냐?”

“아뇨, 결과적으로 그들은 대륙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반쪽짜리에 불과했죠. 서로 단결하여 끝까지 저항한 왕국들과의 치열한 전투 때문에 제국군 역시 통일 과정에서 많은 군사들을 잃었습니다. 그에 반해 이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영토는 대륙 전역이었죠.”

“군사력은 크게 줄어들었는데 반대로 통치해야 할 영토는 몇 배로 거대해진 셈이로군. 점령지의 군사력을 흡수해 봤자 그들에게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심고 제국군으로 써먹기엔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에서 점령당한 왕국의 왕실들은 아직 남아 있는 충성심 강한 귀족들과 병력들을 규합하여 레지스탕스를 운영했습니다. 한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이 말이죠. 심지어 그들은 대륙에서 소외당하고 멸시받던 아인종들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자신들을 도와주면 후에 그들의 대륙 진출을 자신들이 도와주겠다고 말이죠.”

“아인종들까지 합세했다면 골치 깨나 아팠겠어. 하지만 그 정도로 트리스탄 제국이 무너졌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맞습니다. 그들은 외세에 의해 무너진 게 아니라 스스로 무너트린 겁니다. 자신들의 통일 제국을요.”

“스스로 통일 제국을 무너트렸다고? 그게 무슨…….”

요한의 상상도 못 한 대답에 하이든이 경악하자 요한이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당시 통일 제국의 내정은 극히 불안했고, 황제 슬하의 황자들 또한 통일 제국의 다음 황제가 되기 위한 암투로 황실 역시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다음 황제가 옹립된다 하더라도 다른 황자들의 쿠데타가 분명 발생할 거라 쉽게 예측할 수 있을 만큼요. 그런 상황에서 레지스탕스가 판을 치는 통일 제국을 평안하게 운영한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당시 통일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고, 준비가 덜 되었던 거라고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고 거짓말처럼 황실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가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모습을 감췄다? 스스로 은둔을 택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 중이던 왕국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이루어 낸 독립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나라를 되찾는데 혈안이 되었죠.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트리스탄 황족들을 색출하면서 동시에 트리스탄 제국이란 역사를 말소시키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자신들의 치욕을 덮기 위해서요.”

“그건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만…… 트리스탄의 황족들은 어찌 되었느냐?”

요한은 수통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대답했다.

“끝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사명을 가지고 각 왕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후였거든요.”

“사명? 그게 설마……!”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진 이유도, 왕국들이 전력을 넘어 사력을 다해서 저항하던 이유도, 점령당한 이후에 끝까지 발버둥치는 이유도, 모두 민족에 대한 유대감 때문이라면 그 유대감을 먼저 부수자. 그게 각국으로 흩어져 은밀하게 숨어든 트리스탄 제국의 방계 황족, 그림자들의 시초입니다.”

“하면 지금 그림자라는 놈들은 모두 트리스탄 제국 황실의 후예들이라는 말이냐?”

“전부는 아니에요. 현재 활동하는 그림자들 말단들은 전부 놈들이 키우고 세뇌시킨 끄나풀들이니까. 하지만 놈들의 관리자 격인 그림자들은 방계 황족의 핏줄을 타고났죠.”

요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하이든은 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쩐지…… 수백 년이 지나도 한결같이 제국에 충성할 수 있는 광기가 이제 이해가 되는군. 놈들은 단순한 첩자가 아니라 제국의 망령들이었다는 말인가.”

“제국이 진짜로 무서운 이유는 실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패를 양식으로 진화한다는 겁니다. 트리스탄 제국의 몰락은 그들에게 끝이 아니라 진정한 통일의 과정 중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천 년 전부터 트리스탄 제국의 대륙 통일 전쟁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라는 말이죠.”

“우리 모두는 그게 잊힌 역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역사란 말이군. 허허…… 이것 참,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어도 당할 판에 이런 사실을 누구도 모르고 있다니……. 하면 현재 제국은? 로한 제국도 트리스탄 제국의 망령이란 말이더냐?”

요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은둔했던 제국의 황실은 직계와 방계로 나뉘어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방계는 방금 말씀드린 그림자들이고 직계가 새로운 트리스탄 제국의 토대가 될 나라를 일으키는 것이었죠.”

“하지만 당시에는 트리스탄 황실의 인간들을 찾기 위해 대륙 전체가 눈에 불을 켜고……. 잠깐, 그러고 보니 로한 제국은 500년 전에 세워졌다고 알고 있는데 그럼?”

“예. 500년의 시간을 암중에서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트리스탄 제국이 사라질 때까지 말이죠. 다행히 그 작업은 다른 왕국들이 알아서 해 주고 있었으니 손 쓸 필요도 없었겠지요. 그렇게 남들의 눈을 피해 조금씩 세력을 불려 가면서 천천히…… 은밀하게 나라를 세우고 키워 가며 자연스럽게 대륙의 한 부분으로 정착한 나라가 지금의 로한 제국입니다.”

“…….”

하이든은 너무나도 상상을 초월하는 트리스탄의 계획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문제는…….

“네가 겪은 그 끔찍한 미래에서는 그 터무니없는 계획이 성공했다는 말이지?”

“예. 2차 통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그림자들은 끊임없이 각 왕국의 내전을 부추겼고 병력들을 소모시켰으며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심지어 그들 때문에 제국이 전쟁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이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심화되거나 가라앉더라도 서로 협력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 뒤였죠. 왕실까지 그림자가 침투한 어떤 왕국은 전쟁도 없이 나라를 들어 바칠 정도였으니까요.”

“제국의 입장에서는 뭍에 올라온 물고기를 거저줍는 셈이었겠구나.”

“그림자들 덕분에 왕국을 흡수하는 일도 굉장히 쉬웠습니다. 그들만큼 몸담고 있던 나라를 자세히 아는 자들도 드무니까요. 통일한 이후에도 유대감에 균열이 생긴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믿지 못하면서 결국 힘을 모아 반항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특히 전쟁에서 아군의 신뢰가 깨지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지. 정말로 대륙 통일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루다니…….”

“그 뒤로는 전에 아버지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수백 년 동안 맡은 바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던 그림자들은 모두 그 나라의 요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직계 황족들은 그 나라의 제후가 되었죠. 저처럼 필요 없어진 사냥개들은 정리가 되었고요.”

“요한…….”

“괜찮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요.”

하이든은 요한의 손을 맞잡아 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 왕실은 괜찮은 것이냐? 만약 이번에 국왕 전하를 알현하러 갔다가 왕실 사람들 중에 그림자가 숨어 있으면 위험한 게 아니더냐?”

“괜찮아요. 방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방계 혈족의 그림자들은 전쟁이 끝나고 전부 그 나라의 요직에 앉았다고. 제가 모르는 건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말단 그림자들입니다. 이 나라가 제국의 손에 점령되고 나서 누가 제후에 올랐는지, 어떤 녀석들이 요직에 올랐는지 저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그, 그놈들이 누구더냐! 이 아비에게만 슬쩍 알려 주면 안 되겠니?”

애간장이 타는 얼굴로 재촉하는 하이든에게 요한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알면 당장 칼 들고 찾아가시게요? 이것만큼은 아버지라도 알려 드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아니,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강한 아버지라서 알려 드릴 수 없어요. 분명 그자를 만나는 순간 티가 날 테고 놈은 아버지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단 걸 절대로 놓칠 리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위험해지세요.”

“상관없다! 그런 가죽을 벗겨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의 모가지만 딸 수 있으면 나는……!”

“굳이 아버지가 희생하지 않아도 그런 놈들을 처리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용해 먹을 방법도 무궁무진하죠.”

“이용해 먹는다고? 놈들을?”

요한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고 지켜봐 주세요. 아무튼 왕실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국왕 전하 한 분만큼은 믿을 수 있으니까 안심하시고요.”

“그것 참……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하지만 전하께도 이 사실을 말씀드려선 안 됩니다. 어차피 믿지도 않으실 거고, 믿는다고 해도 그것대로 골치 아파지니까요. 제가 전하를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 네 말대로 하마.”

그렇게 요한과 하이든 부자를 태운 마차는 벨로반의 왕도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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