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가만히 있어
“하이든 크림포드 백작과 상인 알파 경 입장하십니다.”
경비병의 외침과 함께 왕성의 그랜드 홀 문이 열리며 요한과 하이든이 홀에 입장하였다.
중앙에 깔린 레드 카펫을 기준으로 양쪽에 열을 맞춰 귀족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저자가 알파인가?”
“소문대로 가면을 쓰고 있잖아? 설마 전하의 어전에서도 저걸 계속 쓰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무튼 저 가면 속에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지 기대되는군.”
요한을 구경하던 귀족들의 사담은 국왕의 등장으로 멈췄다.
“국왕 전하 드십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국왕, 포라드 린곤 벨로반 3세가 자리에 착석했다.
포라드는 한눈에 봐도 용맹함을 얼굴로 표현한 것 같은 굴강한 분위기의 젊은 사자 같은 왕이었다.
“전하를 알현하나이다.”
“오랜만이군, 백작. 그래, 함께 온 이가 요새 그 유명한 정체불명의 상인인가? 확실히 이름이…….”
“알파라고 하옵니다, 전하.”
요한이 직접 자신을 소개하자 포라드가 신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듣던 것처럼 특이한 목소리를 가졌군. 아, 미안하네. 무신경한 말이었다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전하.”
그때였다.
“전하, 신 가니온 유스터프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허하노라.”
벨로반 제일의 검, 가니온이 나서서 국왕에게 청하자 포라드가 허락했다.
“왕국을 수호하는 검이자 전하의 안위를 염려하는 저로서는 저런 정체불명의 상인이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로 전하를 알현하는 것이 못내 불안하고 못마땅하옵니다. 만약 흉험한 생각을 품고 있는 자라면 더욱 더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터. 저자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기를 전하께 간곡히 청하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 순간, 가면 속 요한의 시선이 슬쩍 가니온에게 향했다.
가니온 역시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알파를 노려보았다.
‘가니온 유스터프 공작…….’
가니온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의 간청이 꼭 국왕의 안위만을 걱정해서는 아니라는 걸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크림포드 백작이 직접 천거한 인물이 아닌가? 그리 위험한 사람일 거라고는 걱정되지 않는다만?”
“전하, 매사에 조심하여 손해 볼 것은 없사옵니다. 신들도 저 정체불명의 상인이 가면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 그지없사옵니다. 부디 유스터프 공작의 간청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귀족파의 수장인 가니온 유스터프 공작을 따르는 귀족파 무리가 강력히 요청하자 포라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니온의 행동이 귀족파의 위세를 보이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 참, 이 너구리같은 영감탱이. 왕국 제일검께서 내 안위 때문이라고 명분을 붙여 버리니 무시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이든을 비롯한 국왕파 귀족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여기서 가니온에게 반박하는 건 국왕의 안위를 무시하는 처사로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에게 듣자 하니 어릴 적 심한 화재를 당해 아직도 그 화상이 낫지 않았다고 들었네. 가면도 그걸 감추기 위해 착용한 거고.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옵니다, 전하.”
요한의 대답에 가니온이 다시 한번 나서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저자의 불행한 과거와 전하의 안위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설령 이 자리에서 전하께 무례를 저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전하의 안위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쭈? 누가 보면 충신 나신 줄 알겠어, 너구리 영감.’
그때였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가니온의 생각에 찬성한 것은…….
“유스터프 공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금 흉측한 몰골을 드러내게 되겠지만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가면을 벗고 제 떳떳함을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흐음……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렇게 하게.”
포라드의 허락이 떨어지고 가니온의 매 같은 시선이 요한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아니, 수많은 귀족들과 포라드 자신도 요한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차였다.
그렇게 가면을 벗은 뒤 얼굴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자…….
“우욱……!”
“자, 잠깐만…….”
“흐억!”
요한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이 역겨움과 메스꺼움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불에 타 죽지 못한 시체가 저러할까? 얼굴 대부분이 화상으로 타 버린 요한의 얼굴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나와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요한의 본래 얼굴이 아니라 죄수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것이었다.
얼마 전, 히로벤칼 자작령에서 최근 남자들을 산 채로 고문하여 죽인 뒤, 그 시체 앞에서 애인이나 아내를 강간하고 죽인 변태 살인마가 붙잡힌 적이 있었다.
지금 요한이 쓰고 있는 얼굴 가죽은 녀석의 얼굴을 산 채로 불에 태운 뒤에 벗긴 가죽이었던 것이다.
한편, 요한의 얼굴을 살펴보던 가니온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 역시 다른 사람의 얼굴가죽으로 만든 인피면구를 의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얼굴 가죽을 벗겨서 뒤집어썼다면 농이 굳어 흐르지 않았을 것이고, 농이 흐르도록 얼굴 가죽을 미리 데워서 썼다면 접착제가 효력을 잃어 얼굴에 제대로 붙지 않았겠지. 그렇다는 건 진짜 놈의 얼굴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데…… 응? 잠깐……!’
오러 마스터인 가니온의 기감에 아주 미세한 마나의 흐름이 요한으로부터 느껴졌다.
마나는 주로 요한의 얼굴에 집중되어 있었다.
‘설마…… 그러고 보니 녀석은 뇌전의 마나를 쓰지 않았던가! 정전기를 유지해서 가죽을 붙이고 뇌전의 마나로 열기를 높이면 아직 굳지 않은 얼굴 가죽에서 농을 흘리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허허, 저런 조잡한 방법으로 감히 이 몸의 눈을 속이려 했단 말인가? 우습군!’
“네 이……!”
가니온이 요한의 트릭을 까발리며 그의 진짜 정체를 밝히려던 순간!
-보니스 라 두메로.
‘……!’
머릿속에 들려온 정체불명의 말 한마디에 가니온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부릅뜬 가니온의 눈은 요한을 향해 있었는데 머릿속으로 들려온 텔레파시가 요한에게서 전달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향해 있던 요한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왜 그러는가, 공작?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는가?”
“아, 아니옵니다, 전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알파라는 자의 얼굴이 망측한지라……. 소신은 그가 어전에서도 가면을 쓰던 무례를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군. 더 이상 죄인도 아닌 이의 치부를 드러내 망신을 줄 수는 없지. 상인 알파는 가면을 다시 착용하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요한이 다시 가면을 착용하는 순간에도 가니온의 마음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어째서 저자가 황실의 언어를…….’
-보니스 라 두메로(가만히 있어).
이 말은 현재 로한 제국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된……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 가는 트리스탄 제국의 말이었다.
심지어 제국의 일반 평민들조차 모르는 황가의 언어였다.
그 때문에 지금은 그림자들이나 일부 황제 직속 조직의 언어로 사용되는 암호문을 알파가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이 나라의 그림자들은 모두 내가 총괄하고 있다. 내가 모르는 그림자가 있을 리 없는데…….’
그 순간 가니온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가능성에 그의 눈이 저절로 부릅떠졌다.
‘설마!’
* * *
“그래서, 백작과 함께 과인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상인 알파여.”
가면을 다시 완벽히 착용한 요한이 포라드의 질문에 대답했다.
“전하께 구르칸 산맥을 제 영지로 인정받기 위해 알현을 청했나이다.”
요한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귀족들이 경악했다.
“구르칸 산맥을 영지로 달라고?”
“고작 일개 상인 따위가 전하께 영토를 요구하다니……!”
“저런 무엄한 자를 보았나!”
요한을 질타하며 날뛰는 귀족들은 대게 귀족파 귀족들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를 국왕에게 소개한 사람이 왕족파 귀족들의 거두인 하이든이었기 때문이다.
출세욕이 없고, 국왕에 대한 충성심만 넘치는 괴짜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사실 하이든의 영향력은 결코 가니온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런 자와 결탁한 사내가 영향력을 키운다는 건 귀족파 입장에서 결코 바람직한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경들은 정숙하라.”
포라드가 신하들의 입을 다물게 만든 뒤 요한에게 직접 물었다.
“과인조차 포기한 구르칸 산맥을 개발하고 교역로까지 건설한 사실은 과인도 높이 평가한다만, 애석하게도 구르칸 산맥은 우리나라의 영토가 아니다. 그걸 자네가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구르칸 산맥에 많은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는 그중 벨로반 왕국이 가지고 있는 지분에 대해서만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가 보유한 지분에 관해서는 제가 해결할 문제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치 마십시오.”
사실 포라드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지분이라고 해도 국경을 지키기 위한 감시 명목의 영토일 뿐이지, 실효지인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하이든의 추천인. 하이든도 국왕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서 그를 추천해 준 것이라 믿었다.
“오호라? 보기보다 꽤나 당돌한 녀석이로구나. 하지만 맨입으로 나라의 영토를 떼어 달라는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만약 구르칸 산맥에서 벨로반 왕국의 지분을 제 영토로 인정해 주신다면 향후, 왕국에 속한 상단들의 통행세를 30% 낮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호, 그것 참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구나. 백작,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구르칸 교역로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가?”
포라드의 질문이 하이든에게 향하자 하이든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통행세를 10%만 낮춘다 하더라도 그 이익을 가늠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전하, 기존에 확립된 교역로를 버리고 검증도 덜 된 위험한 교역로를 국가 교역로로 지정하다니요?”
“이제 겨우 한 번의 상행이 성공했을 뿐입니다! 구르칸 산맥 교역로라니…… 이런 위험투성이의 교역로를 사용한다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이든의 대답에 귀족파 귀족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의 목적은 반대를 위한 반대.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아 이번 일을 무산시키는 데에 있었다.
“지금 크림포드 경의 검증을 무시하시는 것이오?”
“상인으로서의 능력도 경들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나신 분의 안목이오! 경들의 지금 행동은 크림포드 경을 무시하는 행동임을 자각하시오!”
“위험한 교역로라고는 하나 분명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완벽하게 상행에 성공했다 들었소! 조금의 검증만 더 거치면 지금의 교역로보다 충분히 메리트가 있는 선택지를 굳이 포기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오!”
당연히 왕족파 귀족들과 상충하면서 그랜드 홀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결국 이렇게 되나…….’
포라드는 뻔한 귀족들의 반응에 한숨을 쉬며 하이든과 요한을 쳐다보았다.
‘이 난관을 돌파하는 건 경들의 몫이다. 부디 뜻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좋겠구나.’
“그만! 사안의 비중이 중대하고 경들의 뜻이 그러하니 이 일은 좀 더 논의를 거친 후에 결정하도록 하겠소. 이만 물러들 가시오.”
국왕이 어전 회의를 파하자 사람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조용히 그랜드 홀을 떠났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