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검은 숲으로
“말썽 안 부리고 잘 지내고 있었냐.”
“알파 경!”
블랑카는 요한이 숲으로 돌아오자 크게 반색했다.
“아니 뭐, 말썽이고 자시고 말이 통해야 뭐라도 해 먹죠. 나오는 음식도 순 풀떼기들뿐이고. 그런데 같이 온 애들은 뭡니까?”
블랑카는 요한과 함께 온 아이들을 스윽 훑어보며 물었다. 복장을 보아 평민은 아닌 것이 대체적으로 5살 미만의 아이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라마콘 왕국 현 귀족들의 장손들.”
“예? 현 귀족의 장손들이라면…… 후에 작위를 물려받을 아이들 아닙니까?”
대부분의 왕국은 작위 세습제였고 라마콘 왕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맞아.”
“설마 납치라도 하신 건……?”
“에헤이, 듣는 사람 오해하겠네. 국왕과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모아서 보낸 애들이야. 물론 내가 조금 추천을 하긴 했지만 엄연히 결정은 그들이 한 거라고?”
“아, 예…….”
블랑카는 요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현재 라마콘 왕국에서 요한의 추천을 거절할 사람이 과연 존재할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을 데려온 겁니까?”
“이 시기의 아이들이야말로 가장 생각이 유연할 때니까. 세간의 상식이나 어른들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이 시기에 올바른 교육을 배워 둬야 돌아가서도 제대로 된 귀족이 되지 않겠어?”
‘말이 교육이지, 그건 세뇌 아닌가?’
그러나 바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블랑카에겐 없었다.
“그것 참…… 대단한 교육관이네요.”
“나도 보고 배운 거야. 녀석들이 하는 걸 보니 이미 가치관이 딱딱하게 굳은 어른들을 교육하는 것보다 이 방법이 훨씬 효과가 좋더라고. 뭐, 여차할 때는 보험으로도 쓸 수 있고.”
물론 그 보험이란 귀족이나 왕족들에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보험이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이곳에 있는 아이들 모두가 귀족 가문의 대를 이을 장자나 장손들이었으니 라마콘 왕국에서도 위험한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요한의 이러한 생각과 계획 모두 대륙을 제국을 보고 배운 것들이었다.
“주군.”
“오, 왔어?”
그때마침 요한을 찾아온 한 사내를 보고 블랑카가 흠칫했다. 다시 봐도 적응하기 힘든 비주얼과 기세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수고했어, 자현. 덕분에 어려운 일을 쉽게 풀 수 있었다. 다친 덴 없고?”
“부상을 신경 쓸 만큼 강한 녀석이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게다가 나름의 보람도 있었고요.”
“모두 여기 계셨군요.”
엘라임의 대장로, 루비리드가 장로들과 함께 요한을 찾아왔다. 장로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동했으며 루비리드와 두나스가 요한 일행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알파 경께는 숲의 모두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대관절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감당해야 할지…….”
눈물을 글썽거리는 루비리드에게 요한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엘프 동포들을 구출하기 위해 함께 싸웠던 그 순간부터 저는 여러분을 저의 우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저 역시 목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함께 같은 적과 싸웠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알파 경 덕분에 인간이 모두 같은 인간이 아님을……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증오심과 원망을 많이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아인종들이 함께 미래를 그리는 가능성까지도요. 오늘 함께 온 많은 귀족 아이들을 그 희망의 씨앗으로 반드시 잘 키워 보이겠습니다.”
루비리드는 미소를 그리며 요한에게 손을 내밀었고 요한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마주 잡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참,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쪽은 마자현이라고 믿을 수 있는 제 심복입니다. 이번 라마콘 왕성 공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친구이기도 하죠.”
“그렇군요. 마자현 님의 공적을 저희 엘프들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요한이 마자현을 소개하자 루비리드와 두나스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마자현이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두 분.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군의 명이 있기에 앞서 이곳에서 관리하고 있던 보물 덕분에 제 딸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은혜를 갚아 그 도리를 다해야지요.”
“네? 그럼 알파 경이 말씀하신 당신께 중요한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신 분이시란 게…….”
루비리드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요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과거에 대장로님께서 내려 주신 영단이 지금의 동포들을 구한 겁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십쇼. 정령의 눈물을 제게 주신 대장로님의 결단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루비리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우며 물었다.
“따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따님 얘기를 듣고 싶네요.”
“물론입니다.”
요한은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신기하네…….’
회귀 전, 요한이 듣기로 엘프들의 목숨을 가장 많이 빼앗은 사람이 다름 아닌 마자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과 더불어 엘프들의 영웅이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생경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 * *
그날 밤.
엘프의 숲에서 축제가 열렸다. 먹을 거라고는 과일과 채소들뿐이라 블랑카는 눈물을 흘렸지만 그런 블랑카조차 엘프 특제 과실주의 맛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난 깊은 새벽…….
엘프들은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죽은 동포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가였다.
거기서 눈물을 흘리거나 오열하며 슬픔을 표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그저 나직하게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할 뿐이었다.
‘…….’
요한은 엘프들의 진혼가를 술과 함께 창가에서 음미하며 그렇게 밤을 새웠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그럼 부탁할게.”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주군.”
뒷일을 마자현에게 맡긴 요한은 블랑카와 함께 본래 목표였던 7신기를 찾기 위해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이렇게 그냥 가도 되는 겁니까?”
“뒷일이라고 해 봤자 중간 교역소가 완성될 때까지 어떤 미친놈이 정신 줄 놓고 깽판을 부리는지 감시만 하면 되는 역할이니까. 그나저나 너, 뭔가 많이 아쉬운 표정이다? 엘프들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거 아니었냐?”
“음식만 그렇다는 거죠. 혀가 고생할 동안 눈은 얼마나 호강했는데……. 그래서 저 결심했습니다. 노년에는 반드시 여기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 거라고요.”
“…….”
요한은 블랑카의 쓸데없는 노후 계획에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 * *
“거기서 뭐 하냐?”
요한은 숲의 초입에서 걸음을 멈춘 블랑카를 돌아보았다. 블랑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마뜩찮은 표정으로 요한을 설득했다.
“지, 진짜 여기로 들어갈 겁니까? 다시 한번만 생각해 보시죠? 여기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다니까요? 오죽했으면 겁 없다고 소문난 용병들도 이 숲에 관련된 의뢰는 일절 거부하겠습니까, 예?”
“…….”
블랑카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요한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혼자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이, 씨부럴!”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던 블랑카 결국 다시 몸을 돌린 후 눈을 딱 감고 발을 내디뎠다.
숲에서 느껴지는 위기감보다 몸을 돌린 순간 느껴졌던 위기감이 몇 배는 더 컸기 때문이었다.
“같이 가요!”
숲은 들어가자마자 수 미터 앞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횃불을 켜도 별반 소용이 없네요.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낮인데…… 이래서 검은 숲이라고들 하나 봅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검은 나무와 검은 흙, 그리고 검은 하늘까지…….
몬스터나 짐승들 이전에 이곳에서 길을 찾아 따라간다는 건 그 자체로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막말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돌아갈 길마저 잃어버린 것 같았다.
“호, 혹시 이대로 미아가 되는 건 아니겠죠? 히익! 이렇게 평생 이곳을 헤매다 백골이 되는 건……!”
블랑카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위기감에 제대로 길을 찾는 것조차 불가능했기에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 갈 뿐이었다.
“좀 닥쳐, 멍청아. 바람 소리가 안 들리잖아.”
“네? 바람 소리요?”
요한은 눈을 감고 바람 소리에 집중했다.
검은 숲의 길은 눈이 아닌 귀로 찾아야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쪽이다.”
그렇게 요한은 거침없이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블랑카의 입장에서는 이게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구분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죽어라 요한의 뒤를 쫓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응? 무슨 소리 안 들리십니까? 바람 소리가 아니라 이건 마치…….”
“짐승들끼리 싸우는 소리 같다고?”
“네! 그거요.”
“그거 맞아.”
“네?”
“짐승들끼리 싸우는 거 맞다고. 정확히는 짐승들이 아니라 수인(獸人)족이지만.”
요한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 * *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자, 이 미련한 들소 놈들!”
아우우우우우!
“시끄러운 늑대 놈들! 오늘에야말로 씨를 말려 버리겠다!”
무오오오오!
서로를 노려보며 울부짖던 우인족과 낭인족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숫자는 낭인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거의 우인족 한 명당 다섯에서 많게는 열 명의 낭인족이 달라붙었으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전황은 백중지세였다.
후우웅…… 퍽!
깨갱깨갱!
“조심해!”
“함부로 파고들지 마라! 뒤를 노리라고!”
우인족…… 미노타우로스가 아무렇게나 휘두른 주먹에 낭인족…… 웨어울프 전사 하나가 스쳐 맞았다.
그것만으로도 녀석은 정신없이 날아가더니 거칠게 나무에 부딪힌 후,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녀석은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노력했지만 보기보다 쉽지는 않아 보였다.
거칠고 단단한 피부, 두꺼운 근육,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 거대한 덩치, 그리고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까지…….
미노타우로스들은 그야말로 괴물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에 맞서는 웨어울프들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한 미노타우로스들조차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놓칠 만큼 엄청나게 민첩한 녀석들이 바로 웨어울프였다.
게다가 녀석들은 미노타우로스와 달리 단체로 싸우는 전투에 익숙했다. 자신을 희생해서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전투에 특화된 것이다.
게다가 미노타우로스만큼 괴력은 없었지만 대신 아름드리나무 기둥을 할퀴어 찢을 수 있는 손톱과 바위도 물어서 부술 수 있는 치악력이 있었다.
물론 그조차도 미노타우로스의 두꺼운 근육을 뚫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와드득!
무오오오오!
‘됐…….’
콰직!
근육 분포도가 낮은 부위는 웨어울프들의 이빨이나 손톱으로도 충분히 치명상을 줄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한 웨어울프의 머리가 박살이 나 버렸지만.
덕분에 지금까지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숱한 전투를 치렀지만 어느 한쪽이 승리하는 일 없이 전투가 끝나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공사다망한 와중에 뭐 하나만 물어보자.”
별안간 생각지도 못했던 불청객이 난데없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