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용사 블랑카
순식간에 마나를 가득 채운 요한은 만족의 미소를 그렸다.
‘이것만 있으면 전투 중에도 어지간해서는 마나가 마를 일이 없겠어.’
제반의 팔찌를 손에 넣은 후, 요한은 화이트와 블랙을 돌아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대로 두고 가기엔 상당히 아까운 녀석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함께 동행하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데……. 나노,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개체명 화이트와 블랙의 능력을 마스터의 뇌로 전송하시겠습니까?]
‘부탁하지.’
그렇게 화이트와 블랙의 능력을 상세히 전송받은 요한은 꽤나 꼼꼼하게 표기된 자료에 놀라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며 나노 크리에이터에게 물었다.
‘잠깐, 이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으면서 방금 전에 내가 저 녀석들을 시험할 때는 왜 이걸 먼저 알려 주지 않았냐?’
[……마스터께서 즐거워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
약 1초 정도 되는 그 잠깐의 침묵에서 당황하는 듯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블랙, 너는 내 그림자 속으로 들어오고. 화이트, 너는 늑대로 변신해라.”
“마스터의 분부대로…….”
복명을 마친 블랙은 거대한 체구가 스멀스멀 녹아내리더니 요한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고, 화이트는 새하얀 늑대의 모습을 변신하였다.
“세상에…….”
그 모습을 블랑카가 입을 벌린 채 지켜보았다.
방금 전에 보여 준 강함도 심장이 멈출 만큼 강했는데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할 일을 마친 두 사람과 한 마리는 그렇게 유적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요한과 블랑카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
“히익……!”
요한은 그 모습은 찬찬히 훑어보았고 블랑카는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더니 요한의 뒤로 빠르게 숨어 버렸다.
미노타우로스 무리와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웨어울프 무리가 한데 섞여 요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탓이다.
무오오오오!
아우우우우!
자신들도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듯, 혼란스러운 하울링이 여기저기에서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와……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요? 보아하니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요한은 블랑카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녀석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별도의 명령이 따로 있을 때까지 여기서 대기한다. 그리고 더 이상 서로 싸우는 건 금지야. 부족한 먹이는 내가 공급해 주도록 하지.”
3세대 호문쿨루스의 번식력이라면 먹이만 제대로 공급될 경우 폭발적으로 그 수가 증가할 터였다.
이는 다가올 전쟁에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되리라.
무오오오……!
아우우우……!
녀석들은 요한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길게 하울링을 하더니 숲속으로 퍼져 나갔다.
“화이트, 기승 모드.”
요한이 곁에 있던 화이트에게 다시 한번 명령하자 화이트의 네 발로 서 있는 화이트의 등이 요한의 어깨까지 이를 정도로 커졌다.
“읏차.”
요한은 그런 화이트의 등에 가볍게 올라타더니 블랑카를 돌아보았다.
“뭐 해? 안 타?”
“네? 저도 타라고요?”
“그럼 여기서 살래? 얼른 안 타면 놔두고 간다.”
꿀꺽…….
방금 전까지 요한과 전투를 벌이던 화이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블랑카. 그런 상황에서 난데없이 화이트의 등에 타라고 하니 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탈 생각 없으면 뛰어오든가.”
“아, 아뇨! 탑니다, 타요!”
결국 눈을 딱 감고 화이트의 등에 오른 블랑카가 가장 먼저 느낌 감촉은 털가죽이 상상 이상으로 부드럽다는 사실이었다.
“가자.”
-예, 마스터.
“으아아악!”
화이트가 검은 숲을 내달리기 시작하자 블랑카의 비명이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 * *
검은 숲을 빠져나온 뒤에도 화이트는 한참을 질주했다.
그렇게 빠르게 다리를 놀리는 것도 아닌데 녀석의 신형은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 어떤 명마를 데려와도 지금의 화이트와 비교하면 굼벵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기서 좀 쉬고 가자.”
요한은 멀리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 찬성입니다! 흐엑…….”
털썩…….
다급하게 블랑카가 기절하듯 쓰러져 바닥에 떨어지자 요한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화이트는 요한이 마나만 충전해 주면 몇날며칠이건 달릴 수 있는 호문쿨루스였지만 블랑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삼 일 밤낮 쉬지 않고 달리는 건 좀 심했나?’
하기야, 먹는 것도 싸는 것도 자는 것도 전부 달리는 화이트 위에서 해결하며 시간을 단축했으니 블랑카가 뻗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화이트, 퍼피 모드.”
그렇게 화이를 작은 강아지 사이즈까지 축소시킨 요한이 블랑카를 깨워 가까운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헉!”
“초, 촌장님!”
“촌장님! 어서 좀 나와 봐요!”
요한과 블랑카를 발견한 사람들은 다급하게 촌장을 찾더니 요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오들오들 떨었다.
‘이게 무슨…….’
요한이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하고 눈살을 찌푸리자 옆에서 블랑카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여기 와서 이 사람들 삥 뜯은 적 있습니까?”
“야, 이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그때였다.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노인이 부리나케 집에서 나와 요한의 앞으로 달려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고 오들오들 떨었던 것은…….
“죄송합니다, 나리! 설마 사흘이나 일찍 오실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탓에 대접할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농사가 흉작인 탓에 상납금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니 일주일만 더 기다려 주시면…….”
“자, 잠깐만요. 대접은 뭐고 상납금은 뭡니까? 아니, 그 이전에 좀 일어나 주시죠. 괜히 사람 불편해지니까요.”
“예?”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오해를 푼 촌장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이 마을의 촌장, 반스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두 분이 산채에서 온 놈들인 줄 알고 그만…….”
“차린 게 변변치 않지만 많이 드세요.”
촌장의 며느리가 두 사람 앞에 내려놓은 그릇에는 지금 막 쪄낸 감자와 옥수수가 담겨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이미 감자와 옥수수 냄새를 맡았을 때부터 군침을 흘리던 블랑카는 접시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그것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요한도 감자 한 알을 들어 맛을 보았는데 상당히 달콤하고 맛있었다.
“그런데 방금 하신 말씀은 뭡니까? 산채에서 찾아온 놈들이라뇨? 산적들이 여기를 찾아온다는 얘긴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 분은 신경 쓰지 마시고 그저 편하게 묵고 가 주십시오. 저희가 부족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손님 두 분 대접할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사실 이런 외진 마을에 여행객이 찾아오는 경우가 잘 없어서요. 혹시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조금이라도 좋으니 바깥세상 얘기를 들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요한은 촌장이 자신들의 사정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아무 상관도 없는 외지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거나 어쩌면 동정받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
‘내가 여기서 말을 더 얹는 건 괜한 오지랖이 될 수도 있겠군.’
요한은 산적에 대한 생각을 접어 두고 촌장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훌륭한 대접을 받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죠.”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어멈! 가서 마을 아이들을 불러 오게. 아이들이 정말로 좋아할 게야.”
“네, 아버님.”
사실 아이들을 따로 모을 필요도 없었다. 산적이 아니라 여행객이 찾아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 아이들이 촌장의 집에 모여 하나같이 문이나 창에 귀를 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촌장의 집 앞에 모이자 요한과 블랑카는 이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바깥세상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곳은 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환상적이고……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지. 계절마다 볼 수 있는 꽃들이 정원에 가득하고, 나무에 열려 있는 과일들은 한입 베어 먹으면 꿀이 넘쳐흐르는 곳이었단다. 그런데 그 낙원을 지키는 거대한 뱀이 감히 겁도 없이 이 몸을 가로막은 거야. 너희 같은 애송이들은 한 입에 꿀꺽!”
“꺄악!”
“꿀꺽!”
“꺄악!”
“……하고 삼킬 수 있는 거대한 뱀이 샛노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거야.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면서 말이지.”
꿀꺽…….
어느새 아이들은 블랑카의 얘기에 집중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초롱초롱한 눈빛에는 긴장감이 가득했고, 호흡은 마치 자기들이 뱀과 싸우는 것처럼 거칠어져 있었다.
요한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도굴꾼보단 이쪽이 더 천직 같은데?’
“하지만 이 몸이 누구라고 했지?”
“용사 블랑카!”
아이들이 크게 소리치자 블랑카가 허공에 대고 실감나게 보이지 않는 뱀의 목을 조르는 열연을 펼쳐 보였다.
“그래, 용사 블랑카가 바로 이 몸이시다, 이 말이야. 달려드는 뱀을 바로 이렇게 목을 졸라서 응? 보이지? 목을 이렇게 졸라서 쓰러트린 후에 녀석의 이빨을 뽑아 만든 단검이 바로 이거다!”
“우와!”
“블랑카! 블랑카! 블랑카!”
블랑카가 허리께에서 단검을 뽑아 들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블랑카의 이름을 연호했다. 순식간에 아이들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고 아이들이 부모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자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블랑카에게 물었다.
“근데 너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피곤하다고 죽으려 하지 않았냐? 애들이랑 노는 거 보니 훨훨 날아다니던데?”
“네? 그, 그럴 리가요. 하하하…….”
“하여간 내일부터 엄살 피웠다간 죽을 줄 알아. 목적지까지 이제 정말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쉬지 않고 갈 거야. 그러니까 오늘 밤은 죽을 각오로 푹 쉬어 둬.”
“하아……. 넵. 근데 목적지가 어딘데요?”
“내가 말 안 해 줬나?”
블랑카는 의문이 가득한 두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번도 안 해 주셨는데요.”
“우리가 갈 곳은 엘프들의 왕국, 엘븐 글로리아다.”
* * *
다음 날 아침, 아직 해도 전부 떠오르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마을을 찾아왔다.
“이 새끼들이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까지도 속 편하게 처자고들 계시네. 이래가지고 밀린 상납금이나 갚을 수 있겠어? 어?”
난데없는 소란에 촌장을 비롯해서 마을 어른들이 전부 밖으로 나와 불청객을 확인했다.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가죽 갑옷에 볼품없는 흉기, 싸구려 같은 살기에 험상궂은 인상까지…….
세트로 모아서 보면 누가 봐도 산적임을 알 수 있는 열댓 명의 무리가 마을을 찾아와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덜덜 떨었다.
그런 싸구려 산적들이라도 이들에게는 사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리! 어찌 약속한 기일이 아직 이틀이나 더 남았는데 이러시는지요…….”
촌장이 고개만 간신히 들어 애원하자 이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산적, 뎀이 촌장의 머리를 지그시 밟아 누르며 이죽거렸다.
“이틀 후면 뾰족한 수가 생기나? 촌장. 말은 똑바로 하자고. 지금 밀린 상납금만 얼마인지 알아? 그거 다 갚고 이번 달 치 상납금까지 이틀 안으로 준비할 수 있다고? 지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니면 또 구라 치는 거야? 내가 약속 했지? 이번에도 구라 치면 영감 혓바닥부터 잘라 버리겠다고.”
덥석!
“허억!”
뎀이 쪼그려 앉아 촌장의 머리를 움켜쥐고선 단검을 뽑아 그의 입가로 들이밀던 순간이었다.
“그만해! 이 악당들아!”
“루이스!”
촌장의 집에서 튀어나온 아이는 다름 아닌 촌장의 손자, 루이스였다.
루이스가 산적들을 향해 분노를 담아 소리치자 화들짝 놀란 그의 엄마가 서둘러 아들을 집 안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잠깐, 거기 꼬맹이. 이리 와 봐. 지금 누구보도 악당이라고?”
“나리!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의 헛소리입니다! 제발 자비를……!”
퍽!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는 촌장을 발로 차서 기절시킨 뎀이 루이스에게 손짓했다.
“닥쳐, 영감. 잘못을 판단하는 건 영감이 아니라 나라고. 그래, 꼬마 용사님. 네 말대로 우리가 악당이라 지차. 그렇게 엄마 치마폭에 숨어서는 우리를 쓰러트릴 수 없을걸. 네가 오기 무섭다면 우리가 갈까?”
“푸하하하하!”
뎀과 그의 부하들이 비웃음을 터트리자 루이스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닥쳐! 나는 아직 용사가 아니지만 우리 마을에 용사님께서 오셨어! 그분이 너희들은 전부 혼내 줄 거야!”
루이스의 외침은 집 안에서 눈만 빼꼼 내밀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블랑카에게도 들렸다.
“서, 설마 루이스가 말하는 용사가 저는 아니겠죠?”
“그럼 여기에 용사님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태연하게 교차한 팔을 베고 누워 있던 요한이 심드렁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자 블랑카는 울상이 된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요한에게 청했다.
“도와……주실 거죠?”
“에헤이, 거대한 뱀에, 불을 뿜는 거인에, 모든 걸 얼리는 설인까지 쓰러트리신 용사님께서 설마 그깟 산적이 무서워 주저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알파 경…… 아니, 알파 님! 제발…….”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이러다 진짜 루이스한테 큰일 나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블랑카가 고개를 돌리자 루이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뎀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씨부레!’
결국 무기를 챙겨 다급하게 집을 박차고 나가는 블랑카를 보며 요한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나노, 저 녀석 좀 도와줘. 저 녀석의 허풍은 몰라도 아이들의 꿈과 생명은 지켜 줘야지.’
[네. 마스터.]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